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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3화 (14/124)

13화

역시 돈이 문제였다.

몇몇 사업이 제국에 있었고 벌어놓은 돈으로 사놓은 땅들도 다 클로비스 제국의 땅이었다.

아아, 내가 이렇게 근시안적이었다니.

원작이 틀어질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외국에 사업도 몇 가지 두거나 땅을 샀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에 통탄의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아냐. 지금도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냐, 늦었어. 아냐. 안 늦었어.

돈이 걸린 문제에 정신 줄을 놓은 나는 이리저리 생각을 번복했다.

이미 다른 제국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있는 클로비스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제국은 기후도 좋고 기름진 땅도 많았다.

하여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충분히 생각한 나는 내 돈의 80퍼센트를 제국의 땅을 사는데 몰빵 했다. 근데 마물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느냐.

말 그대로 내 땅이나 사업은 장렬히 공중분해 된다.

항만 도시가 물거품이 되는 건 물론이고, 매입한 땅덩어리가 X덩어리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특히 마물의 배변은 땅을 돌이킬 수 없이 썩게 만들어 천년이 흘러도 변이 닿았던 부분은 식물이 자랄 수 없다고.

……지금이라도 손절하고 얼른 다른 나라의 땅을 사둘까? 이 생각이 꽤 혹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시가지를 조금 지나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고, 백작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부는 도착을 알리고 계단을 깔았다. 사뿐히 걸어 내려간 나는 마중 나온 집사 리온과 가솔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백작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렇구나. 몰골, 아니, 낯 색은 어떠시지?”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

의외네. 다 죽은 사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고 있었는데.

엘렌의 체력이 생각보다 좋은 모양이었다.

-똑똑.

“들어와.”

엘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류가 책상 가득 산만히 퍼져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다리를 올린 채 서류 종이마냥 늘어져 있었다.

내가 들어온 걸 본 엘렌이 손짓했다. 그러자 서류들이 혼자 춤추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모습에 나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다.

“너 일한 거 맞아?”

“당연하지. 오필은 날 못 믿어?”

“응.”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하니까 더 의심스러웠다. 저 애가 눈 하나 끔뻑 안 하고 한 거짓말에 한두 번 속은 게 아니니까.

나는 책상에 다가가 종이를 보았다. 정말 일을 하긴 했다. 그래, 하기만 했다.

장부를 보니 계산이 죄다 틀려 있었다.

“너 여태까지 이 더하기 삼이 칠이라고 생각한 삶을 살아온 거야?”

심지어 물품 개수까지 틀렸다. 와, 이걸 틀리기는 절대 쉽지 않은데.

“응? 이 더하기 삼은 오지. 오필은 그것도 몰라?”

나는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오늘도 서류를 처리하는 나의 밤은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 * *

“공작님이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벌써?”

엘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시계를 보았다. 그가 오기로 예정한 시간보다 1시간은 더 일렀다.

“얼른 마중을 나가….”

나가야 하는데. 왠지 옆에 있는 엘렌 때문에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 속 읽는 게 취미인 얘가 공작님의 속을 읽지 않으리란… 아!

나는 지금 생각난 기막힌 아이디어에 집무실을 나가려는 엘렌을 붙잡았다.

“엘렌. 네가 리카르도의 마음속을 읽어줘.”

남주의 속마음을 알아야 아일라가 공략이란 걸 해볼 거 아니야. 내 속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엘렌이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래야…….”

내 항만사업을 지킬 수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정말 양심 없는 이유였다. 남의 인생을 내 사리사욕을 채우자고 조종하려는 거니까.

그러나 소설대로라면 이쪽이 아일라와 리카르도, 나에게도 좋은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중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네 말대로 레니에 영애랑 공작이 이어지면 나는 손가락이나 빨아야 하잖아.”

내 말투로 받아치는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건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니?

원작 내용처럼 흘러가는지 궁금하다고 리카르도에게 내 회사를 소개시킨 당사자가 할 소리는 더욱 아닌 것 같고.

한편으론, 왠지 서브 남주한테 남주랑 여주가 무사히 이어지도록 남주의 마음을 읽도록 하는 건 상도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니 양심의 가책은 배가 되었다.

어쩌면, 리카르도와 아일라가 이어지는 걸 떠올리자 엘렌은 원작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진짜 그런 거라면 이를 어떡하지?’

한쪽엔 주인공들이 이어지지 않아 산산조각 난 내 땅문서와 사업.

그리고 다른 한쪽엔 실연의 아픔으로 슬퍼하는 엘렌을 두고 저울질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해결할 방법이 있어.”

해결 방법? 그리 말한 엘렌이 문득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계속 집무실에 있어 정원도 다녀오지 않았을 텐데 그로부터 싱그러운 풀잎 향이 풍겼다. 밝고 해사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그는 나에게 말했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네가 나를….”

내가 너를?

그의 말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집무실 문의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들어오세요.”

나는 우리를 데리러 온 사람이 리온인 줄 알고 대답했지만, 들어온 사람은 정작 리카르도였다.

그의 뒤에 난처한 표정을 짓는 리온이 보였다.

“어머, 공작님. 죄송해요. 잠시 그이랑 대화를 한다는 게…….”

나는 호호, 웃으며 리카르도의 눈치를 살폈다. 으레 하는 말로 손님한테 내 집처럼 생각해서 편안하게 있으라 하지만…….

이쪽은 너무 편안한지 말도 없이 사무실로 들어오고 난리네.

‘리카르도가 이런 성격은 아닌데.’

방금의 행동은 평소 그와 거리가 멀었다.

내 대답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엘렌에게 향해 있었다.

이에 나는 엘렌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인사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다.

엘렌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빠져 있었다. 그곳엔 내가 처음 보는 싸늘한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둘이서 교환하는 눈빛에 파팍! 하고 불꽃이 튀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면 착각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서로 운명으로 매여진 연적이라는 걸 알아차린 걸 수도.’

왠지 나는 오늘 그들의 만남을 마련하기로 한 결정이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억겁 같은 이 상황만큼은 어서 타개해야 했다.

“시장하시죠? 여기까지 먼 길…”

“반갑군. 마르그리트 백작.”

‘와, 나 지금 개무시당한 거 실화냐.’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간 리카르도는 엘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악수를 청했다.

나는 힐끗 리카르도의 얼굴을 보았다.

잘생기고 수려한 얼굴은 만나고 싶은 상대를 만난 표정이 아니었다. 외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한 시선에 가까웠다.

혹시 오늘 처음 생긴 내 남편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예, 공작 각하.”

엘렌은 무례할 정도로 심플한 대답을 해놓곤 마주 손을 잡았다.

아니, 너는 또 왜 그러는 건데.

지금 그의 행동은 마르그리트 백작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려고 환장한 놈 같았다.

리카르도는 눈썹만 한번 꿈틀거릴 뿐, 지적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소문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군.”

“소문이야 얼치기들의 소유죠.”

엘렌은 그 말을 끝으로 웃었다.

그 말만 하고 웃는 건 좋은데 굉장히 비웃는 듯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너 그렇게 웃으면 꼭 리카르도한테 얼치기라고 돌려서 욕하는 것 같잖아.

설마 얘가 보지도 않은 아일라를 벌써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리카르도가 눈치채지 못하게 오늘따라 이상한 엘렌의 살을 콕콕 꼬집었다.

야, 너 지금 왜 그래?

“공작님, 같이 응접실에서 티 한잔하실래요? 제가 오늘 받은 홍차가 있는데 아주 향도 좋아요.”

언제까지고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응접실로 향하자고 그에게 부드러이 제안했다.

“홍차는 마음에 들었나?”

“네?”

느닷없는 그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맥락을 파악하고 나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홍차를 보내주신 분이?”

리카르도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의 침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다는 걸 1년의 세월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선물이라는 것에 내심 깜짝 놀랐다.

“혹시 제가 홍차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보내주셨나요?”

“그래.”

“어머, 감사해요.”

그한테 흘리듯 홍차를 좋아한다는 말은 한 적은 있었지만, 그걸 기억하고 나한테 보냈다는 것은 더욱 놀라웠다.

역시 우리 남주.

저렇게 표정은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알고 보면 기부도 하고 인품도 좋단 말이야. 우리 아일라의 남편으로 합격!

“쿡.”

옆에서 억지로 참았던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엘렌이었다. 그는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내 마음은 읽지 말고 리카르도의 마음을 읽으라니까.

내가 불만 어린 눈빛을 보내자 엘렌은 알겠다는 얼굴로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우습지?”

“그냥 우리 오필이 귀여워서요.”

“무, 무슨….”

우리 오필은 뭐고 귀엽다는 말은 뭐란 말인가.

하나같이 소름이 돋는 말에 절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지금 너 제정신이냐, 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 방엔 나와 엘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입만 벙긋거리다가 가식적으로 웃음만 흘렸다.

가만 보니 완전 리카르도는 병풍 취급이네.

슬쩍 그의 눈치를 보니 그는 서늘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보다 백배는 냉기가 흘렀다. 손님을 앞에 두고 격의 없이 굴어서 못마땅한 게 틀림없다.

“호호, 이이도 참, 낯부끄럽게. 그런 말씀은 단둘이 있을 때만 해요.”

내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에 엘렌이 마주 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 사실 나 괴로워하는 모습 보고 즐기는 거 아냐?

“공작님도 오필이 귀엽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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