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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2화 (13/124)

12화

“앗. 네네!”

안 돼! 내 애기! 아일라가 상자에서 홍차 잎을 꺼내려고 하자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다.

커피 타는 실력을 보아선 홍차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가 탈게요. 어서 앉아서 쿠키 먹고 있어요.”

아일라가 이 홍차로 어떤 색다른 맛을 낼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아일라는 ‘그래도 비서인 제가…’ 이러면서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려고 했지만, 내가 억지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러 앉혔다.

“홍차는 내 전문이에요. 마시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답니다.”

그래, 아일라. 좋은 말만 듣고 살아야죠! 그녀가 본인이 하겠다고 조금만 더 버텼다간 욕이 절로 튀어나왔을 텐데 그런 불상사는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휴, 소중한 내 애기… 아니, 홍차를 지켰어.

나는 무사히 지켜낸 홍차를 우리고, 아일라와 같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입 맛을 본 아일라의 눈에 반짝 이채가 돌았다.

“너무, 너무 맛있어요! 별로 쓰지도 않고, 이건 마치 헤일리 바다의 향기가….”

“어머, 가 보신 적 있어요?”

“햐, 향기일 것 같아요.”

그녀는 늘 후작저택의 다락방에만 있던 신세라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생각 없이 말한 거였지만, 더듬거리며 말을 바꾸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숙연해졌다.

그냥 묻지 말걸.

“맞아요, 저도 거긴 가 본 적 없지만 듣고 보니 비슷한 향이 날 것 같네요. 나중에 같이 가 볼래요?”

아일라가 입에 찻물을 머금은 채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홍차를 한입 머금고는 깜짝 놀랐다.

와, 이거 뭐야. 뭔데 이렇게 맛있어.

아까 이리저리 상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카드나 편지, 혹은 메모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누가 나한테 이런 선물을 준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일라, 이거 혹시 누가 준 건지 알아요?”

아일라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려다 마는, 묘한 모습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돌연 방긋 미소 짓더니 말했다.

“사장님을 좋아하시는 분이 놓고 가셨어요.”

그래…… 나를 싫어하는데 이런 선물을 보낼 리는 없겠지…….

그런 당연한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다. 조용히 시선으로 대답을 종용해도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린아이처럼 상자 꾸러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올려 나에게 눈을 맞췄다.

“사장님, 제가 공작님께 묘한 소리를 들었는데 같이 고민해 주실 수 있나요?”

“에르도안 공작님이요?”

고용계약서를 들고 온 이래로 처음 그녀의 입에서 공작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반색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사실 주선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묻지는 못해 괴롭던 차였다.

“네, 그분이-”

아일라는 공작과 만났던 기억을 더듬는 듯 눈빛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저보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건보단 사랑을 찾아라, 라는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어요. 언뜻 듣기엔 낭만적인 말이지만…… 제 좁은 식견으로는 그런 분으로 보이진 않았거든요.”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맞답니다. 아일라. 나 또한 그가 그렇게 낭만을 챙기는 사람인 줄 몰랐거든요.

나는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던 거였구나. 전날 어째 불안하다 싶었더니. 거기서도 낭만, 사랑이나 타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의 남주님은 그놈의 낭만을 정말로 좋아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음… 정말 넘겨짚은 거지만, 마치 그분은 제가 일찍 죽을 걸 알고 있다는 사람 같달까요.”

기습적으로 정곡이 찔린 나는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콜록!”

내 기침 소리에 말이 끊긴 아일라가 깜짝 놀라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사장님?”

“괘, 괜찮아요.”

나는 짐짓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벌인 일에 속으로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여주를 2년짜리 시한부로 만들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아일라가 다시 운을 떼었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들킨 건가? 내가 그에게 구라를 쳤다는 걸?

“어, 어떤 거요?”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녀가 시한부라는 걸 공작한테 떠벌렸다는 걸 알면 아일라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볼지 눈앞이 훤했다.

완전 미친X, 상또라이로 보겠지.

아일라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변을 살피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상큼한 체리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귀에 속삭였다.

“살인 예고요.”

……네?

* * *

리카르도는 보좌관 펠릭스가 건네는 남색 외투를 입으며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체크했다.

“기어이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하아, 신이시여.’ 하고 중얼거리던 펠릭스는 그들의 만남으로 인해 어떤 치정극이 펼쳐질지 걱정했다.

그런 보좌관의 근심은 안중에 없는 리카르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머릿속에 있는 한 사람을.

누구나 예상하듯 그 사람은 바로 마르그리트 백작이었다.

금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흉측한 얼굴을 가졌지만, 사업수완이 좋아 투자하는 족족 돈이 흘러들어 온다는 비밀스러운 사내였다.

그러나 리카르도만은 알고 있었다. 사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마르그리트 백작이 아닌, 그의 아내 오필리아라는 것을.

‘아내라.’

떠올린 단어에 리카르도는 기분이 불쾌해져 인상을 절로 찌푸렸다. 그걸 본 펠릭스는 또 깊은 한숨을 쉬었다. 펠릭스의 머리엔 치정극의 3막이 오르고 있었다.

거기엔 리카르도가 칼을 뽑고 마르그리트 백작를 능지처참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면상이나 보고 와야겠군.”

가만히 앉아 아내가 쥐여 주는 밥이나 얻어먹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치를.

“이젠 아주 서슴지 않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각하. 갑자기 어젯밤에 홍차는 왜 찾으셨습니까? 황실에 인편까지 보내시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생각이 나더군.”

리카르도는 레니에 후작 영애와 차를 마시는 도중에 오필리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공작님, 비밀이지만 사실 저는 홍차를 제일 좋아한답니다.

“백작 부인 말입니까?”

“오필리아.”

그는 곧바로 백작 부인이라 부르는 펠릭스의 말을 정정했다. 칼같이 호칭을 분리하는 상관의 모습에 펠릭스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치정극 4막을 떠올리고 말았다.

4막의 제목은 <장례식>이었다. 누구의 장례식일지는 누굴 예상하든 그 사람이 맞을 것이다.

* * *

“살인 예고라고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리 묻자 아일라는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쉿,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 계속 생각해 보니까 공작 각하가 저희 아버지랑 친분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어요.”

그래, 근데 그건 리카르도랑 레니에 후작이 아니라, 리카르도의 아버지와 레니에 후작의 친분이었지.

나는 그녀가 차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장막이 걷히듯 서서히 깨달았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과 접시가 날카롭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겐 그것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설마 후작님이 공작님께 살인 청부라도 했다는 얘기인가요?”

말하면서도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아주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엉뚱한 말에 웃음이 나올 법도 했지만, 그녀가 이런 생각까지 도달하게 만든 배경을 생각하니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가치가 없는 이는 죽어 마땅하지. 그리고 가치는 너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다. 레니에 아일라.

레니에 후작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일라는 가치가 없어진 자신을 아버지가 죽일까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오해를 풀어줘야 하는데.’

대체 리카르도가 첫 만남에 그녀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기에 살인 청부 업자 취급을 받는 걸까.

내 말에 아일라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고선 도저히 생면부지 사람한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리카르도의 탓이 아닌, 내 탓이었다.

“아니에요. 그거.”

나는 어서 그녀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단호히 입을 열었다.

“공작님의 말뜻은 사랑하기도 짧은 인생, 진정한 사랑을 찾아 결혼하라는 의미였을 거예요. 아일라.”

그녀는 나보다 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개 젓지 마! 진짜 아니라니까!

“그런 얼굴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건 절대로 믿기지 않아요.”

대체 어떤 얼굴을 했는데요.

근데 그가 어떤 얼굴이었을지 상상이 가서 더 괴로웠다.

아아. 그놈의 살얼음…….

그녀가 돌연 내 손을 잡으며 간청을 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공작님은 사장님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말씀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뭘요?”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탁에 앞부분에 말했던 이상한 말은 잊어버리고 되물었다.

“저 아주 쥐죽은 듯이 조용히 살 테니까… 죽이지 말아 달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수년간 핍박했던 가족들 앞에서 당당했던 아일라조차 겁에 질리게 한 남주의 저력에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단단히 꼬여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착각이길 바랄 뿐이었다.

거짓말을 했으면 그에 대한 뒤처리도 해야 하는 법.

나는 ‘공작님은 살인 청부를 받을 정도로 잔인한 냉혈한이 아니다.’라는 걸 아일라에게 끈덕지게 설득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마차에 올랐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맞아. 오늘 리카르도가 안 왔네.”

오늘 뭔가 허전한 느낌이 있다 싶었건만 남주가 오지 않았다. 아침마다 나보다 더 성실하게 출근하던 양반이 웬일이지?

“엘렌은 잘하고 있으려나.”

나는 중얼거리며 백작저에서 서류 더미에 있을 엘렌을 떠올렸다. 그러자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류 늪에 허덕이고 있을 그는 정작 가문 일을 질색해서 후계위도 동생에게 양도한 상태였다. 양도 이유가 누구와는 다른 이유였다.

그 누구가 누구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빠득. 잇새에서 절로 이가는 소리가 흘렀다.

“아, 열 받아.”

작위 따위 돈으로 사버리면 그만인데, 이놈의 제국에서 여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작위를 살 수가 없었다.

귀족 가문에서 불가피하게 아들이 없고 외동딸만 있는 경우에만 여성의 작위가 인정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굳이 억지로 둘을 이어주려고 노력하지 않고, 과자 씹으면서 설인에 의해 클로비스 제국이 망하는 꼴이나 구경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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