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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0화 (11/124)

10화

쏴아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눅진한 풀잎 향이 나는 비 냄새가 스쳤다. 날씨가 조금 풀린 듯 눈 대신 장대비가 추적추적 바닥을 적시고 있다.

그만큼 제도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특히나 겨울엔 더욱.

어제는 눈이 오다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창문을 보면 비가 내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나는 오늘 유독 더 얄미워 보이는 동승자에게 입을 열었다.

“너 거기서도 통찰 쓸 생각하지 마.”

“아무렴. 마님.”

엘렌이 장난스럽게 대답하곤 눈을 감았다. 어제 마탑으로 돌아가 연구를 하겠다더니 피곤이 짙게 깔린 얼굴이었다.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피곤한 낯으로 대역을 자처하는 건 무슨 심리란 말인가.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구인 회사에서 그렇게 많은 남자 중에 내 남편감이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주변에 있는 사람을 데려다 놓을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엘렌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외모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으며, 통찰까지 쓸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임기응변은 가능할 것이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차선책 정도는 되겠지.

그래, 차선책 정도는 될 거야…….

나는 물밀 듯 들어오는 걱정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엘렌은 속없이 웃으며 ‘오필, 왜 그래?’라고 묻는데 걱정만 더 심해졌다.

까도 까도 걱정거리가 나오는 양파 같은 그가 정말 차선책이 맞을까.

“너 얼굴 조금만 더 바꾸자.”

“왜? 이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다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문제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그가 마법으로 외향을 바꾸더라도, 묘하게 엘렌의 느낌이 나서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의 가족이 우리 집에 올 일은 없었지만, 가족이라도 알아보지 못하게 모습을 바꾸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

속마음을 읽은 엘렌이 거울 잡고 가만히 바라보더니 내 말대로 순순히 얼굴을 바꾸었다.

“아냐, 아직도 네 느낌이 나.”

아, 이게 아닌데.

그가 아무리 외양을 바꾸더라도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주치면 그임을 알아볼 것 같았다.

엘렌은 그런 나를 보고 미묘한 미소를 지었지만, 내가 그 미소의 의미를 묻기도 전에 마차는 이미 백작저에 도착해 있었다.

마차의 옆문을 두드리며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어서 와.”

엘렌은 빙글 웃으며 마차 아래로 내려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능글맞은 그의 행동에 혀를 내두르며 그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주변의 시선이 놀란 빛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엘렌에게 슬쩍 눈치를 보냈다.

‘이미 화목한 부부는 글렀으니까 연기할 필요 없어.’

속으로 내 생각을 그에게 전달했다. 게다가 백작저의 식솔들은 내가 백작과 몇 년째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사이 좋은 부부인 척하는 것이 더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일 일이지.

내 생각을 읽은 엘렌은 난감한 낯을 띠더니 이내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각각 따로 우산을 쓰고 정문으로 들어오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부부를 보며 집사 리온은 허리를 숙이며 단정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보는 저택 주인의 모습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리온은 제 기분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정작 긴장한 건 나였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리온이 엘렌의 모습을 알아볼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리온은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표정이 만면에 가득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리온뿐만 아니라 고용인들이 줄줄이 양쪽에 일렬로 늘어져 서 있었다.

평소엔 근무시간인 몇몇 하인들만 마중을 나왔는데 오늘은 저택 내부에 있는 모든 인원이 나온 듯했다.

어떻게 이리 속이 뻔히 보일 수가.

그들이 평소답지 않게 부지런히 마중을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마르그리트 백작.

그는 사교계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어 그의 주위를 둘러싼 소문만 무성했다.

얼굴이 밖에 나오지 못할 만큼 금수같이 흉측하여 차마 밖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남부 전쟁에서 다리를 잃어 걸을 수 없다, 어두운 저택 안에서 이상한 연구를 한다…… 등등.

그 누구도 백작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갔다. 자극적인 소문은 그만큼 강력하게 반박하지 않으면 사실로 굳혀지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소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나는 ‘뭐, 실제로 있는 사람도 아닌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깊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 결과, 마중을 나온 하인과 하녀는 두 눈이 동그래져 입만 벌리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엘렌 쪽을.

소문과는 다른 양호한 모습에 신기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들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리온보다 더욱 어색하고 뻣뻣한 모습이었다.

나는 하인과 하녀들의 표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설마 그중 한 명이라도 엘렌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엘렌은 그런 나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할 말은 많은데 굳이 말로 하지 않겠다는 미소같이 느껴졌다.

‘뭐야, 말로 해.’

내가 그런 의미가 담긴 눈총을 보내자 엘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왼쪽 뺨이 따가워 고개를 돌렸다. 고용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땐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나는 리온에게 재빨리 힐끗 눈짓했다. 그러자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고급스러운 실내 한쪽에 있는 벽난로에서 따뜻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결혼 중매 일로 바쁜 나와-애초에 있지도 않은- 백작의 부재로 손님을 받을 수가 없어 응접실은 사용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 때문에 내 집인데도 응접실은 나에게 꽤 낯선 공간이었다.

“제대로 준비해 뒀구나. 수고했어. 리온.”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응접실 탁자 위에는 어마어마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리온은 잠시간 그 책을 바라보더니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엘렌은 책이 놓인 테이블로부터 거리가 먼 소파에 앉아 태평스럽게 웃고 있었다.

마치 제삼자의 일을 대하는 듯한 태연자약한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밑장 빼기야? 이미 내 속마음 다 읽은 거 알고 있으니까 운명을 받아들여. 대역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오필, 1일 대역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좋지 못한 습관이야.”

내 속을 훤히 읽고 있으면서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래, 그럼.”

나는 그의 팔을 놓고 두 손을 들었다. 순순히 놓아주는 내 모습이 의심스러웠는지 엘렌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얌전히 테이블 앞에 앉았다. 사람이 파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는 책들 앞에.

저렇게까지 남편 역을 맡고 싶을까.

잠시 그를 골려주고 싶어 백작 가문의 조세 상황이나 영지에 걸린 융자 등등 가문에 대한 일들이 적혀 있는 서류와 경제 서적들을 모아 산더미처럼 올려두었는데 ‘까짓거 남편 대역 바꾸면 되지.’라는 마음속 한마디에 엘렌은 얌전한 강아지처럼 자리를 잡았다.

이미 하인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은 남편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못 이긴 척 엘렌은 서류 한 장을 들고 눈꼬리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마음 변하면 말해. 알았지?”

그는 자세를 고쳐잡고 서류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어휴, 기특해라. 열심히 일하는 우리 직원 같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 * *

때늦은 오후. 결혼 중매 업체의 직원들이 퇴근 전 잔업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일라는 비어 있는 사장실을 보며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정처 없이 회사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도 고용계약서를 들고 오필리아 앞에 등장한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역시 내가 못 미더운 걸까.”

하긴 그녀가 오필리아라도 경력이 없는 초짜에게 덜컥 일을 시킬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한편으론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난처한 미소를 짓던 오필리아를 떠올리자 어깨가 축 내려갔다.

고용계약서를 내밀 당시 오필리아는 놀란 얼굴이었지만 품위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아일라, 잠시 쿠키랑 커피라도 마시면서 앉아 있겠어요?’라는 다정한 말만 할 뿐, 그녀에게 일은 시키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라는 말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휴.”

아일라는 다정한 오필리아가 싸늘한 얼굴로 나가라는 말을 하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에게 소일거리라도 받아 볼까 싶어 직원들이 모인 사무실에 발을 디뎠을 때, 그녀는 들리는 말소리에 발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리스트 좀 정리 못 했다고 타박을 들었다니까?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마녀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이야? 월급보고 참는 거지.”

마녀, 라는 말이 누굴 지칭하는 건지 곧바로 촉이 온 아일라는 자신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짜증 나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아서라, 아서. 여기만큼 월급 많이 주고 정시퇴근인 곳 없어.”

“깐깐하기는 엄청 깐깐해 가지고……. 귀족 녀석들 결국 재산만 보고 결혼하는데 우리가 그들의 사소한 습관까지 기록해야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니까? 얼굴만 별로였으면 확.”

“확, 어떻게 할 건데요?”

그녀의 또랑또랑한 말이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사장의 험담을 하고 있던 직원들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내담자였던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주춤주춤 입을 열었다.

“레니에 영애, 지금은 곧 문을 닫을 시간이라 상담이 불가합니다. 따로 예약을 잡아드릴까요?”

“전 내담자로서 온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일로….”

“저 오늘부터 여기 직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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