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리카르도가 아일라를 만나러 간 덕분에 나는 1년 만에 돌아온 아침 시간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홀짝이고 신문을 보자, 황실에서 한 달 뒤에 연회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신문 덕분에 나는 소설의 두 번째 막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태자비 에테르나의 주도하에 열리는 황제의 탄신 연회.
거기에서 리카르도는 아일라를 파트너로 대동해 그녀를 공식적인 약혼자로 눈도장 찍게 만든다.
에테르나는 에르도안 공작의 혼처를 직접 구해 주어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계획이었으나 아일라의 존재로 인해 실패.
모든 걸 자기 손바닥 안에 굴리고 싶어 하는 에테르나는 생각을 바꾸어 아일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안셀모 황태자가 아일라에게 호감을 보이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질투에 휩싸인다.
에르도안 공작을 이용해 그녀의 입지를 공고히 할 계획이 흐트러진 와중에 제 남편까지 그녀에게 마음을 뺏겼다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고티에 제국의 황녀였던 그녀가 아일라를 가만히 두고 볼 성정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일라가 조금 고초를 겪지만 여주인공답게 똑부러지고 현명한 언변으로 황태자비의 마수에서 벗어난다.
리카르도와 결혼만 한다면 벌어질 모든 일도 일사천리가 될 터.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한가롭게 내담자를 기다리며 펜대를 굴리는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또르륵.
펜대가 대구루루 책상 위를 굴렀다.
나는 눈앞의 믿기지 않은 상황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책상에 어딘가 낯익은 고용계약서가 올려져 있었다.
“열심히 일할게요! 사장님! 뭐부터 하면 될까요?”
갑자기 장르가 여주가 돈 벌고 자급자족하는 걸로 바뀐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개꿈을 꾸고 있거나.
진짜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다.
* * *
오늘 일어난 아일라의 이상행보를 들은 엘렌은 배꼽이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저 반응. 예상은 했지만 너무 웃으니까 왜 이렇게 열이 받지.
아, 이유를 알겠네.
“너 지금 네 일 아니라고 웃는 거지?”
“아니야. 오필. 네 일은 곧 내 일인걸.”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오는 그에겐 산뜻한 풀잎 향이 났다.
천사처럼 말갛게 웃는 그의 모습에 ‘말은 잘하지.’라고 퉁명스레 생각하면서도, 한편은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기에 반박의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카시어스 공작 가문에서 무사히 나와 자리를 잡을 수 있던 것은 그의 도움도 컸다.
처음에 가문을 나왔을 때의 나는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건지 몰라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전생이 있더라도 이 세계는 처음이었다. 하물며 태어나자마자 후계 일에만 집중했던 내가 가문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도 나서서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금방 포기하고 집에 돌아올 줄 알았겠지.
가문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느라 인맥도 없었고, 허드렛일을 하기엔 자존심만 더럽게 센 나는 그저 돈만 많은 가출청소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엘렌이 그런 나에게 구명줄을 내밀어 주었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마탑에 들어와서 살라고 보금자리까지 내어주었으며, 비밀리에 초기 사업의 밑천도 대어 주었으니까.
자본금이 있더라도 사업 줄을 서지 못하면 그냥 묵히는 돈만 되어서 이익을 낼 수 없고 새기만 했다.
아버지 금고를 털어 가져온 돈은 꽤 서민에게 큰돈이었지만, 귀족적인 생활과 씀씀이에 길들어진 나에겐 10년도 버티기 힘든 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돈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
돈 만세!
“오랜만에 내 은혜에 대해 생각을 하는 줄 알았더니, 결국 돈의 찬양으로 이어지는구나. 정말 로위나다워.”
엘렌이 어느새 내 옆에 앉아서 사무실 안에 있는 쿠키를 집어 먹고 있었다.
“오필리아, 로위나. 부를 거면 둘 중 하나만 선택해. 정신 산만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두 이름 전부 마음에 드는걸.”
굳이 골라야 한다면…이라고 중얼거린 엘렌은 갑자기 테이블에 있는 꽃을 뽑았다.
꽃잎을 한 장 한 장씩 뗄 때마다 ‘오필리아,’ ‘로위나’ 하고 속삭이며 그는 꽃잎을 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태평스럽고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나는 부러운 기분이 들었다.
누구는 하루 걸러서 하루마다 내담자랑 얼굴 마주하며 결혼 성사시키려고 안달인데.
아, 나도 확 마법이나 배울까.
“진짜? 마탑으로 돌아오는 거야?”
“아, 깜짝이야. 너 사람 속 읽을 때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깜빡이?”
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곧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 엘렌 알렉산드로는 지금부터 오필리아의 마음을 계속 읽겠습니다.”
“누가 그렇게 뻔뻔해지래.”
“친구끼리인데 뭐 어때. 오필.”
가족끼리도 나누지 않는 속마음을 너랑 나눠서 어디에 쓰라고?
“글쎄, 쓸 데가 있지 않을까?”
어느새 또 내 마음을 읽은 엘렌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휴. 널 누가 말리리.
나는 커피를 마시며 아까 하던 고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아일라가 고용계약서를 들고 왔을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한낱 종이 쪼가리가 되어 북부에 있는 공작성 한쪽 화덕에 불태워져 온기를 더하지 않을까 싶었지.
‘엘렌이 내 속마음을 들여다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원작이 어설프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레니에 영애는 어떻게 했어?”
“너 이미 내 머릿속 다 읽어서 알고 있잖아.”
“그래도 모르는 척 물어보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서 예의라는 걸 챙겼니? 가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내 따가운 시선에 엘렌이 자신의 얼굴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오필. 요새 사업이 점점 커진다고 비서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레니에 영애를 그 자리에 넣어 주면 되겠네.”
유쾌한 얼굴로 문제 해결! 엄지와 중지를 ‘딱’ 소리 나게 마찰시키는 엘렌을 보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
“로위나.”
내 말을 끊고 엘렌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고민이 있지 않아?”
고민?
나는 곰곰이 나에게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는지 짚어보았다.
이번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북부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인의 폭주는 잠재워지지 않고 제국은 암흑기에 빠지게 되는 걸까?
그럼 내 항만 지분은……?
“네 말대로 아일라를 내 비서로 둬야겠어.”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이렇게라도 해놓으면 매일 내담하러 오는 리카르도랑 아일라가 마주칠 수 있을 테니까.
‘원래 결혼 전엔 오며 가며 얼굴도 마주치고 연애를 해야 자연스러운 거지! 요즘 세상에 낭만 없게 계약이 웬 말이야?’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런 생각 따위를 하고 있는데 엘렌의 표정이 이상했다.
정말 못 말린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데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확 나빠졌다.
“여기는 뭘 하는 회사야?”
엘렌의 질문에 나는 뒤늦게 내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정체성을 떠올렸다.
리카르도가 낭만을 말하던 때와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런데 오필리아. 네 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네가 그런 걸 물어볼 줄도 알아?”
“…….”
엘렌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저렇게 웃으니까 불안해졌다. 저럴 때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저 얼굴에 당한 게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다.
‘내 사업… 사업…. 리카르도.’
“미친. 너 내 생각 읽었지?”
“말했잖아. 나 안 데리고 가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너 데리고 가면 후회할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예리하게 파악했다.
“너, 지금 이게 재밌어 보여서 남편 하겠다고 한 거지?”
그의 표정에서 살짝 웃음기가 가셨다.
이거 맞네.
“너 심심해? 할 일 없어?”
나는 비꼬는 게 아닌, 진심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심각할 정도로 솔직했다.
“응. 할 일 없어.”
“그럼 마탑은 누가 운영해?”
“알아서?”
“마탑주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해도 돼?”
“아하! 그간 퉁명스러웠던 이유가 그게 걱정되어서 그랬던 거야? 오필은 다정하기도 하다니까. 이렇게까지 내 걱정을 해줄 필요는 없는데.”
엘렌이 찡긋 윙크를 하며 이제 비로소 내 진심을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을 뻔히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 건 나 열 받으라고 저러는 거다. 틀림없지.
이럴 땐 상종을 안 하는 게 답이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 오전의 일로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 했다.
그의 말대로 하루라도 빨리 의뢰를 맡겨 대역을 구해야 했다. 그래야 상대방과 가문에 대한 것들이나 사업에 대한 입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엘렌은 책상에 팔을 기대며 턱을 받치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는 지우지 않은 채.
“여기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네 말은 네 능력 때문에 번거롭게 입을 맞출 필요도 없다, 이 말이지?”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긋이 쳐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순진무구한 미청년인데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이쯤에서 그의 진짜 별명을 밝힐 때가 온 것 같다.
미친 요정.
어딘가 숲을 떠올리게 하는 푸릇한 색감과 순수해 보이는 얼굴에 처음엔 숲의 요정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나 그 수식어는 이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과 듣기 좋은 목소리에 호감을 품는다. 하지만 저런 수식어가 붙는 데는 다 이유가 있듯, 그가 벌인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한 일례로 엘렌이 초대된 연회에서 술 취한 영식과 실랑이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술 취한 영식을 바다 한가운데에 워프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 일화는 여태까지 있던 일에 비하면 미담 수준. 심각하다. 진짜.
“나는 술 좀 깨라고 호의 좀 베풀었지.”
엘렌은 자기 딴에는 선의를 베푼 것이라 주장하며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엘렌에게는 한 달간 외출 금지가 내려졌지만, 마법이 수준급인 그에게 외출 금지만큼 무의미한 벌이 없었다.
어째 왜 내 주변엔 정상이 없는지.
“원래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엘렌의 말은 무시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