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여자의 고갯짓에 따라 결 좋은 금발 머리가 살랑거렸다. 가늘게 뜨인 붉은 눈동자는 매혹적이었다.
클로비스 제국의 황태자비이자, 고티에 제국의 황녀.
에테르나는 오늘도 홀로 황궁 정원에서 티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황태자 전하요? 이토록 아름다운 전하를 이리 두고, 다른 여자와 팔짱이라니…… 정말 이상한 분이시죠.”
황태자비의 말에, 평소처럼 시녀는 황태자의 험담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티룸에 둘이 있을 때 에테르나는 시녀가 하는 황태자의 험담을 즐겨 들었다. 고매한 황태자비의 입으로 남편의 험담을 걸쭉히 꺼내는 건 품위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이의 입을 걸친 대리만족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에테르나는 손을 들어 시녀의 입을 막았다.
“그분이야 하루 이틀 이상하니? 내 말은 리카르도 에르도안.”
황태자비에게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건 희귀한 일이었다. 그녀 곁에 서 있던 시녀는 내심 놀래며 반문했다.
“그분이 왜요?”
몇 달 전에 황궁에 방문한 에르도안 공작을 처음 본 시녀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 나머지 태자비께 갖다 드릴 디저트가 담긴 쟁반을 떨어뜨리는 중죄를 지을 뻔했다.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하얀 백지 같은 피부. 겨울 폭풍이 오는 듯 차가운 눈빛. 제도에서도 황실에서도 보기 드문 엄청난 미남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손등에 에르도안 공작의 입술이 닿는 걸 상상하고 볼을 붉히고 말았다.
“황궁 결혼식 때도 참석한 뒤 다음 날 북부로 내뺐던 인간이야. 그런데 이번엔 계속 제도에 머무르고 있네? 그럼 하루 이틀은 그럴 수 있다 쳐.”
2년 전, 갓 황궁에 들어왔던 에테르나는 제도 내에 있는 귀족의 연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그런 그녀에게 에르도안 공작은 금으로 된 동아줄이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친분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는 그녀의 결혼식 다음 날, 북부로 올라가고 말았다. 하루라도 빨리 빙벽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을 세우면서.
“벌써 1년이야. 정말 이상하지 않니?”
그랬던 그가 작년 제도에 온 기점으로 북부로 올라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게요?”
시녀는 그저 제도에 머물수록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기만 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시녀도 덩달아 궁금증이 일었다.
“분명 뭔가 있어도 있어.”
“하긴…… 이상하게 오래 머무르시는 것 같긴 하네요. 아!”
시녀의 탄성에 에테르나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요즘 근래에 결혼 업체에 계속 방문한다는데, 결혼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이제 공작님도 나이가 스물다섯이고, 제도에선 벌써 자식이 둘은 있어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니까요.”
“꽤나 자세히 알고 있구나.”
“전하를 보필하려면 이 정돈 상식이죠.”
잔망스러운 시녀의 말대꾸에 에테르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무색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꽃이 만개한 듯 화려한 기운이 흘렀다.
“그렇다면 나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럼 초대장을 보낼까요?”
“아직. 누가 상대로 적당할지 골라야 해. 명색에 공작 부인이 될 여자인데, 아무나 괜찮겠니?”
그리 말하고 웃는 에테르나는 ‘재미있는 일이 생겼네.’라는 표정을 달고 티를 입에 머금었다.
2년. 명석한 고티에의 피가 흐르는 그녀에겐 클로비스 황실에서 한 몫을 차지할 충분한 시간이었다.
귀족 영애들이 공작 부인이 되고 싶어 얼마나 벌떼같이 그녀의 발치에서 굽신거릴지, 누군가가 그녀에게 안달복달 못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퍽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한 달 뒤에 연회가 열리지.”
“한 달 뒤라면….”
“황제 폐하의 탄신연.”
황실에서 보낸 초대장은 에르도안 공작이라도 참여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게 황제의 탄신일을 경하하는 연회라면 더더욱.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한 달 사이에 공작이 북부로 올라가리란 가정은 하지 않았다.
* * *
대망의 날이 도래했다. 창가에는 매일의 아침을 알리는 새가 활기차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적미적 침대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아일라와 리카르도는 오전 10시, 여기서 가까운 시가지에 있는 유명한 찻집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특별히 전망 좋은 곳으로 예약해 두었으니 둘이 잘되어야 할 텐데.
왜인지 걱정이 되어서 몰래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나한테 믿을 건 원작뿐.
어제 리카르도의 표정을 보면… 좀 못 미더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남주인데.’
이야기로 듣는 것하고 직접 사람을 만나보는 건 다르지. 아일라를 직접 보게 된다면 분명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내가 이토록 원작에 맹신하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에 있었다.
처음 리카르도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땐 깜짝 놀라다 못해 간이 떨어질 뻔했다.
그게 엘렌의 짓이라 해도.
카시어스 공작가에서 동생이 태어나고 후계권을 넘겨주는 일련의 일이 없었더라면 결혼 업체가 생길 일이 있었을까?
내가 겪었던 일련의 정황이 원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결국 사람마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필연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원작대로 진행시킬 거면 제대로나 할 것이지.’
지금 거듭 생각해도 엘렌에게 모든 걸 들킨 걸 떠올리면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신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읏차.”
오늘도 엑스트라는 돈을 벌어야 하는군. 나는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아일라는 차를 홀짝이며 찻집 내부를 조용히 살펴보고 있었다. 속눈썹 아래에 있는 금색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시골에서 올라온 얼뜨기라는 시선을 받기 싫어서 힐끗 곁눈질로 내부를 살피고 있었지만, 그녀가 여태껏 가본 찻집 중에 제일 호화스럽고 운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찻집은 가본 적도 없지만.
오필리아가 그녀를 위해 예약한 장소가 꽤 유명한 찻집이란 것을 알고, 아일라는 그녀의 센스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그녀는 정말 태양 같은 여자였다.
첫 만남에 불과한데도 오필리아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며 미소를 지었을 때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웃을 때 아일라도 따라 웃고 싶어져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린 것이 한두 번.
‘내가 무슨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중요한 남자를 두고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것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얼른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일라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회귀 전, 신문에서 보던 대로 신의 조형물이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짐승 같은 날것의 분위기를 몸에 휘두르고 있어 흑표범이 생각나기도 했다.
무정하고 냉기가 흐르는 그의 표정에 약간 주눅이 든 아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어제 오필리아에게 받은 고용계약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털어버렸다.
그 당시엔 절박했던 나머지 오필리아에게 계약서에 사인까지 시켰지만, 그녀도 가급적이면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그 정도 염치는 있었으니까.
딸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가능한 공작과 저 사이의 공통분모를 끄집어 꺼내도록 노력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가 미스 오필리아께서 추천해 준 곳인데 굉장히 분위기가 좋은 것 같아요.”
“오필리아가?”
계속 서릿발만 서 있던 에르도안 공작의 눈에 약간의 온기와 이채가 돌았다.
전생을 합해 눈칫밥을 먹은 지 20년이 넘은 아일라가 오필리아에 대한 얘기로 갑자기 바뀐 그의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네. 지금 생각하니 정말 따뜻하고 좋은 분이셨어요. 또 한 번 만나 뵙고 싶을 정도로.”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아일라는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공작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좋아하는 건가?’
에르도안 공작이 오필리아를. 눈에 보이는 것과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일라는 조금 혼동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필리아는 결혼한 유부녀로 알고 있었는데…….’
오필리아에 대한 그의 마음은 인간적인 호감일까, 이성적인 호감일까.
어느 쪽이든 그가 오필리아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계약 결혼을 하기 전에 상대가 누구에 대한 연정을 품는 것은 크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그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 부수적인 것까지 생각하기엔 자신의 상황이 녹록지 못했다.
아일라의 눈에 약간의 각오와 총기가 어렸다. 차 대신 물로 입을 축인 그녀는 에르도안 공작에게 입을 열었다.
“에르도안 공작님, 계약서는 읽어 보셨나요?”
그래도 전생으로 미래를 알고 있어 그가 원하는 바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그의 태도에도 아일라는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벌써 기가 죽으면 안 돼. 아일라.’
자신에게 각인하듯 속삭였다.
“꼭 나를 위해 작성된 듯한 계약서 같더군.”
그녀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한 그의 말에 아일라는 속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차를 홀짝였다.
이런 일일수록 저자세로 나가면 안 된다. 당당해지는 거야. 아일라.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여기서 면박을 당하더라도 그녀에겐 대답을 듣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초면에 이런 말씀 꺼내는 게 무례라는 것도 알지만, 공작님께는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해요.”
“조건이라.”
그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은 처음 이곳에서 그녀를 만났을 당시처럼 싸늘하게 돌아와 있었다. 아까 보였던 일말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아일라는 일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나는 조건 따위를 보고 결혼하지 않는다.”
“그럼 뭘 보시나요?”
“사랑이지.”
사… 사랑…?
그의 말에 어떤 대꾸라도 해야 하는데 입만 벙긋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은 저승에 가서나 해라.’ 하고 칼질을 할 것 같은 사람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오다니.
아일라는 그녀답지 않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것이 인지 부조화라는 걸까.
그녀는 잠시 찻잔을 든 채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전생의 기억을 과신했나,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영애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건보단 마음에 끌리는 사랑을 하도록.”
‘……? 그건 무슨 소리?’라고 그녀가 묻기도 전에 에르도안 공작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휑하니 비어 있는 의자를 보며 아일라는 차를 홀짝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