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6화 (7/124)

6화

너? 나는 헛웃음을 감추지 않고 터트렸다. 아마 내 얼굴엔 썩소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너 흙바닥에서 뒹굴다가 바윗돌에 머리라도 박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설사 네가 내 남편 역이 된다고 해도 네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는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치며 활짝 웃었다.

“아! 얼굴이 문제였어? 그러면 해결은 간단해지지.”

아주 잠깐, 찰나였다.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생판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하얀 상앗빛 피부. 검은 머리에 붉은 홍채. 이목구비가 세밀하게 조형된 잘생긴 미남이었다.

“……이게 뭐야?”

“변신 마법. 어때? 네가 갖고 있는 이상형을 취합해 봤어.”

그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왜인지 그의 시선이 조금 서늘하게 보였다.

“……근데 이거 에르도안 공작이랑 많이 닮았는데? 이 모습으론 안 되겠다.”

“됐어. 어떤 모습이라도 넌 안 돼.”

그의 손에 든 거울을 빼앗은 나는 냉정하게 일갈했다. 엘렌이 내 남편이란 신분을 달고 무슨 사고를 칠지 상상조차 안 되지만,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했다. 나는 다시 시선을 엘렌에게 옮겼다.

아직 변신 마법을 풀지 않는 그가 테이블에 있는 꽃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근데 진짜… 리카르도랑 많이 닮았네.”

매일 아침마다 리카르도를 보니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미남이 그의 모습으로 굳혀진 모양이었다.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엘렌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그래서-”

만지면 눈처럼 녹을 듯한 새하얗고 창백한 피부. 남자치곤 긴 속눈썹에 드리워진 깊고 푸른 보석안. 그 아래 붉은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의 얼굴을 힐끗 살피던 나는 설핏 웃고 말을 이었다. 엘렌이 하던 미묘한 말이 딱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언제가 편하신가요?”

“어느 시간이나 상관없다.”

“그러면 다음 주에 잡을까요?”

어느새 나는 리카르도와 내 남편의 약속을 잡고 있었다.

왜냐면,

“그대의 남편과 사업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고 싶군.”

이런 황금과도 같은 기회를 내가 놓칠쏘냐.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날 안 데리고 가면 후회할지도 몰라. 오필.

엘렌이 꽃잎으로 장난을 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렌의 능력은 통찰과 마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패시브 능력으로 가까운 미래까지 볼 수 있는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장난 아니게 찝찝했다.

엘렌이 자기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평가절하의 뜻도 모르는 그가 사업가 행세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미 마르그리트 백작은 저명한 사업가로 소문이 퍼져 있지 않은가. 그런 자리에 시한폭탄인 엘렌을 데리고 가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다.

유형의 불안감을 선택할 바에는 무형의 불안감을 선택하고 말겠다.

“내일은?”

“죄송합니다. 그때는 무리일 것 같네요.”

내일은 당신이 아일라를 만나러 가야 하거든. 나는 그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소설 속에서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소설 속 오필리아는 어떤 말로 그에게 아일라를 만나보라고 권유했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

“공작님.”

“……?”

“제가 공작님께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일단 계약서를 보여주는 것이 먼저였다. 그가 여주의 조건을 승낙한 이유에는 황제의 결혼 재촉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안셀모 황태자에게 있었다.

그가 에르도안 공작이 섣불리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를 황위 계승에 있다고 생각해 수시로 빙벽에 병사를 보내기 때문이었다.

그걸 리카르도는 굉장히 성가셔했다. 명목은 제국의 안전을 위해 정찰병을 보낸 것이라곤 하지만 결국 ‘북부 또한 황실의 것이다.’라는 표시였다.

여주인 아일라가 회귀하기 전, 그러한 사실들을 신문으로 접했기에 그녀는 그의 심중에 딱 들어맞는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여주의 힘을 한번 믿어보자!’

원작에선 여주가 쓴 계약서는 그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귀한 그녀가 그가 원하는 바를 미리 파악하고 쓴 거니까.

나는 리카르도 앞에 아일라가 한땀 한땀 공을 들여 작성했을 서류를 내밀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서류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리카르도는 순순히 계약서를 받고 읽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나는 마치 아일라가 된 심정으로 리카르도의 표정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겠지?

허니문을 열고 처음으로 자신이 없어졌다.

“이게 뭐지?”

아일라가 건넸던 결혼 계약 서류를 살피고 있던 리카르도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노 아니면 예스. 이러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약간 김이 샌 얼굴로 대답했다.

“결혼 계약 서류예요.”

“…그건 알고 있는데, 아니. 되었다.”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살짝 불안감이 스쳤다. 이거 원작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 맞아?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주절주절 말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레니에 영애는 제가 직접 면담을 해 봤는데 인물도 아름답고 품위도 고아하시더군요. 그리고 레니에 후작 가문은 개국 공신 가문 중 하나로 유서도 깊으며 비옥한 영지 여럿과 광산을 갖고 있어서 재력도 있어요. 이만하면 공작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후작가에 있는 재물들이 에르도안 공작저로 향할 일은 없었다. 여주를 방임하고 학대한 양반들이 혼수 같은 걸 쥐여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득의 말을 길게 하다가 멈춘 나는 숨을 고르는 사이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새로운 사실에 깊이 고민했다. 이걸 말해, 말아?

“최종적으론 공작님께 나쁘지 않은 조건일 게 분명합니다.”

아니.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당신들 속궁합이 아주 뛰어나다는 말을 면전에서 하기는 조금 그랬다.

그리고 미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지.

현재 계약서에는 최소 후계자로서 아들 한 명을 낳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조항만큼은 필히 지켜질 것이다. 왜냐면 에필로그에 그들이 이남이녀 4명의 아이를 낳고 잘 사는 게 나오거든.

어쨌든 다른 건-예를 들면 상대방한테 공적인 일 외엔 터치 금지- 다 못 지켜도 그 조항만큼은 지켜진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면전에서 말한다면 리카르도가 당장 내일부터 발길을 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상투적인 말로 그를 회유할 수밖에.

그는 내 말에 깊이 고심하는 듯하더니.

“돌연 그대가 열정적으로 설득하는 이유가 궁금하군.”

이따위의 말만 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곁다리만 뱅뱅 도는 느낌이 들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아오, 확 말해버려?

‘그야 당신들은 서로 결혼할 운명이니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냐, 참자. 다급해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까.

“결혼할 운명?”

내 말을 되새김질하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찻잔을 놓았다.

“제가 혹시 소리 내서 말했나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리카르도의 미려한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소리를 안 내고 말할 수도 있나?”

“그, 렇죠. 사실 그건-”

세상에. 내가 주인공한테 스포를 날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얼른 수습을 시도해야 했다.

“한눈에 보자마자 서로 천생연분 같다는 말씀이었어요.”

“…….”

그는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나는 팔을 쓱쓱 문댔다.

호호, 하면 입김도 보일 것 같은 한기였다.

“공작님, 안 추우세요?”

“…….”

대답 없는 그의 모습에 나도 눈치가 있었다. 그가 이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정도는 파악할 눈치.

“공작님,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결정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초장부터 포기하는 건 내 성미가 아니었다.

“만나볼 필요도 없을 것 같군.”

“네?”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람 간 사람이 결혼을 하는데 계약이 오고 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낭만이라곤 쥐뿔만큼도 없어.”

네에? 그의 ‘낭만’에 나는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정작 그 말을 한 그는 지극히 옳은 말을 했다는 듯 평온한 모습이지만.

나는 중앙 귀족들이 할 법한 말이 그에게 나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매일 찬 바람만 쌩쌩 부는 북부의 군주가 여느 귀족마냥 ‘낭만’을 찾는다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리카르도가 맞는지 얼굴 가죽을 잡아당겨 보고 싶어졌다.

하물며 이 소설의 키워드는 계약 결혼이 아니었던가요?

나는 잠시 내가 알고 있던 소설의 제목이 그 제목이 맞나 떠올렸다.

분명 <그 후작 영애의 계약 결혼>이 맞는데.

“공작님, 낭만도 좋지만, 낭만 없이 사는 부부 중에도 잘살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결혼 문제에 계약서를 들이미는 게 낭만이 없어 보인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쪽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결혼 전보다 결혼 후에 깨를 볶으며 살 사람이 미리부터 낭만을 찾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기만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낭만을 찾으신다면…….”

‘애초에 여기에 오시면 안 되죠. 정말 낭만이랑은 거리가 먼 곳인데.’

그건 내 책상 서랍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가문별로 초상화와 그 아래에 조건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고, 재력과 성격, 후사 능력에 따라 인간이 상품인 마냥 점수까지 적혀 있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이긴 했지만,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낭만이랑 거리가 먼 곳은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흠. 오늘따라 왜 그러시지.’

나는 그를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외관만 보아선 달라진 구석은 없었다.

어떤 극단에서 남녀의 격정적인 로맨스를 그린 감명 깊은 연극이라도 보고 왔나. 아니면 낭만 가득한 로맨스 책이라도 읽은 것인가?

나는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생각의 잔가지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인상을 쓰고 커피를 마시고 있자 리카르도가 내 얼굴을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내 눈엔 리카르도 대신 애처롭게 눈망울을 흐리는 아일라가 비추어 보였다.

‘역시 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 봐요.’

라고 글썽거릴 그녀의 얼굴이 상상되자 내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내 항만도시 지분 10퍼센트! 잊지 말라.

“공작님. 저를 믿고 딱 한 번만. 한 번만 만나 보세요.”

서로 만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일 거라니까?

뒤의 일을 알고 있는 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는 걸 결심했다. 아무리 얼음 공작이라지만, 그도 인간이니 감성팔이를 하면 좀 통하지 않겠나.

“그리고 공작님, 사실…….”

미안해요. 아일라. 이건 전부 당신을 위한 일이자 내 항만 지분을 위한 일이에요.

“레니에 영애는 앞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해요.”

여주를 시한부로 만들어 버리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