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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5화 (6/124)

5화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럼요. 여기 단골 고객이세요.”

그녀의 눈이 안도의 빛으로 물들다가 곧 각오가 서렸다.

“그럼 이 계약서를 공작님께 갖다 주세요.”

“그럴게요.”

“안 된다고 해도… 네?”

순순히 나온 내 대답에 놀란 아일라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작고 하얀 새 같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불안해했다.

“…정말인가요?”

외려 순순한 승낙에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여전히 경계심이 짙은 아일라에게 나는 그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이럴 땐 오히려 친절한 태도가 더 의심을 살 수 있다.

“네. 같은 고객끼리 연결해 드리는 게 저희 일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내 확답에도 그녀는 아직도 불안한지 흘긋한 시선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늙은 귀족에게 팔려가 여생을 보내야 하니 불안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판 남에게도 불안감을 보일 정도로 그녀를 내몬 야박한 상황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일라. 상상하시는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이때의 나는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런 말 따윈 하진 않았을 테니까.

“만일 잘 안 된다면, 말씀하세요. 여기에 취직시켜 드릴게요.”

우스개처럼 꺼낸 말이었다.

어차피 아일라는 리카르도와 결혼해서 북부로 떠나 자애롭고 현명한 공작 부인으로 정평이 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테니까.

내 말을 들은 아일라는 표정을 굳힌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데 어째 불안할 정도로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다고 느낀다면…… 착각이겠지?

“그 말씀, 약조해줄 수 있나요?”

그녀는 품에서 다른 종이를 부스럭 꺼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이상하면서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허니문의 사장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아일라 레니에가 무사히 결혼 계약을 체결하지 못할 시 허니문에 취직시켜 드릴 것을 약조 드립니다….”

나는 그녀가 급하게 쓴 종이를 훑어 내렸다. 나를 보는 그녀의 시선이 너무 반짝거려서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사인하시면 돼요.”

누가 계약 결혼 소설의 주인공 아니랄까 봐. 이런 일까지 계약서로 남기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이 상황을 되새김질하며 판단했다.

그래, 어차피 남주랑 이어질 건데 여기 사인 하나 한들 달라지는 게 있겠어?

이러는 그녀의 입장도 한편으론 이해가 되었다.

만일 일이 성사가 안 된다면-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녀는 경력도 없어서 자리 잡기도 힘들 테고, 빈털터리라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것이다.

온갖 고생을 한 뒤 그녀는 후작저로 끌려가 혼처에 팔아 넘겨질 터. 그 사실 때문에 여주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문서화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같은 여자로서, 독자 시절 여주 엄마를 자처했던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아일라의 불안감을 없애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여주의 계약서에 사인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주가 되었을 텐데.

이런 내용은 원작에도 안 나왔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뭐, 결혼 계약서도 아닌데 상관없겠지.’

나는 그렇게 그녀의 고용계약서 아래에 사인했다.

* * *

아일라와의 대화는 계약 결혼으로 물꼬를 텄고, 어느덧 그녀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렀다.

갑자기 고용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아일라가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소설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입으로 전해 듣는 거랑은 느낌이 또 달랐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에 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아일라, 나만 믿어요!’

반드시 둘이 행복하게 이어줄 테니까!

그런 결심을 하고 있을 땐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퇴근 준비를 하는데, 그때 천천히 사무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푸른 머리의 남자가 느긋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숲의 요정이라는 별명처럼 겉모습은 신비롭고 청량한 분위기가 흐르는 미남자였다.

엘렌 알렉산드로.

그는 가문 간의 친분으로 어릴 적부터 카시어스 공작가에 왕래하면서 알게 된 내 유일한 친구. 그리고 서브 남주였다.

청명한 색을 띠는 연두색 눈동자를 곱게 휘며 그가 활짝 웃었다.

“좋은 아침.”

“노을 안 보여? 아침은 무슨.”

나는 얼룩덜룩 흙과 눈이 묻은 하얀 옷을 입은 그가 태평하게 실내로 들어오는 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영락없이 흙바닥에서 뒹굴고 온 한량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흙 파먹는 사람은 출입 금지야.”

“흙을 왜 먹어? 맛있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엘렌을 보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녀석. 또 통찰을 쓰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님 진짜 모르는 거야?

그는 순진무구한 소년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다리를 쭉 뻗었다.

여기가 자기 집 안방인 듯한 느긋한 태도에 나는 찌릿 눈을 흘겼다.

그는 그런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상히 말했다.

“코코아 냄새가 나네? 누가 다녀갔어?”

“응. 상담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평소처럼 꽃향기가 짙게 났다. 황태자비랑 황궁 정원에서 티타임을 하고 왔다는 것에 내 머리털을 걸겠다.

“아일라 레니에…… 미래의 내가 반할 여자는 그렇게 생겼구나. 어차, 고용계약서까지 작성했어? 하하하!”

그는 방금 있던 일을 통찰로 보았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사람 속 좀 읽지 말라니까!

“이건 불가항력이야. 오필. 나라고 사람 속을 낱낱이 알고 싶을 리가 있겠어?”

구라치지 마라. 너 그거 스위치처럼 껐다 켤 수 있는 거 소설로 봐서 이미 알고 있거든?

엘렌이 ‘그런 거까지 나온단 말이야?’라고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진짜 소설 내용대로 레니에 영애가 이곳에 왔구나. 신의 존재성을 놓고 토론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는걸.”

그의 태도는 마치 레니에 영애랑 본인이 관련이 없는 듯한 관조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현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 너 이제 짝사랑하며 앓다가 죽을 일만 남았어.”

“듣기만 해도 가슴 아프다.”

그는 진짜로 가슴이 아픈 양 가슴께를 부여잡고 얼굴을 찌푸렸다. 허이구. 퍽이나 아파 보이네.

“별로 안 아파 보여?”

“그걸 말이라고.”

나는 엘렌과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가 커피를 마셨다.

그는 ‘내 꺼는?’ 하고 초롱초롱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그냥 씹었다. 그러자 그는 손발 달린 성인답게 스스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그래, 넌 손이 없니, 발이 없니.

“혹시 네가 레니에 영애도 여기로 부른 거 아니지?”

나는 리카르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엘렌을 의심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열린 그의 입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카시어스에 안 돌아올 거야?”

“응.”

“그래?”

나는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미묘함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가 무의미하고 실없는 질문을 할 때도 많긴 했지만, 집안과 관련된 질문을 할 때는 필히 어떤 용건이 있을 때였다.

“공작 부인께서 널 찾으셔.”

“알아.”

갑작스러운 출가 이후, 어머니가 날 찾고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사실도.

그러나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정에 움튼 반가움도 잠시. 돌아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좋은 혼처 자리를 마련해 놓았단다.’라는 말로 나를 결혼으로 떠밀 것이 뻔했다.

카시어스 공작 부인이자, 나의 어머니는 현숙하고 다정한 여인이었지만, 그만큼 스테레오 타입의 귀족 부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스물다섯이나 되는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나 있다는 소문을 꼬리처럼 붙이는 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감정에 휘둘려 가문에 들어가기엔 나에게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결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더라도 나이를 생각하면 방계 쪽 한미한 가문의 미혼남이나 혹은 건실한 가문의 이혼남과 결혼을 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런 건 말 안 해도 돼.”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껄끄러워하는 걸 알고 있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내 말투는 절로 퉁명스럽게 변했다.

그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의 맑고 청명한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올라와 있었다.

“진심이야?”

“알고 있으면서 능청은.”

나는 책상에 턱을 괴며, 아까 일들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리카르도를.

‘그냥 꺼낸 말이었겠지.’

그러나 그가 이 반지를 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닐 텐데 너무 새삼스럽기는 했다.

그래도 그것으로 리카르도가 내 남편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을 테니 슬슬 남편 대역을 세워놓는 게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대역?”

내 생각을 읽었는지 엘렌이 불쑥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아오, 깜짝이야!

나는 그의 얼굴을 꾸역꾸역 밀며 말했다.

“그래. 적당한 사람 알아?”

마탑주이자 알렉산드로 대공의 첫째 아들인 그가 알고 지낸 사람은 많았다.

‘물론 그 아는 사람들이 다 엘렌이랑 친한 건 아니지만….’

무엇보다 통찰을 갖고 있는 그였기에 나보다 더 적임자를 찾아낼 수도 있었다.

“응. 알아.”

‘역시!’

내 예측은 틀리지 않았어! 바로 긍정하는 그의 대답에 반색하며 활짝 웃었다.

“누구?”

그가 방긋 웃으며 검지를 치켜들고 자기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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