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4화 (5/124)

4화

‘보상은 내기에 이겼을 때, 생각해 보기로 하지.’

홀로 사무실에 남은 나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방금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런데 어떡하나.

“여주가 오늘 상담받기로 예약 잡아뒀는데.”

후후후.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나는 거울로 내 용모를 체크했다. 입이 근질근질한 걸 참느라 힘들었다.

‘내기에 이겨 보상을 생각할 날은 오지 않을 거랍니다.’

리카르도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아일라가 내담할 시간이 다가왔다. 어쩌면 주인공들이 오다가다 서로 마주쳤을 수도?

완전 생면부지 남이랑 만나는 것보단 얼굴 정도는 스치듯 본 사람이랑 맞선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부러 아일라의 상담 시간을 리카르도 바로 뒤로 잡아 놓았다.

“설마 그사이에 둘이 눈 맞는 거 아니야?”

나는 잇새로 주책맞은 웃음을 흘리며 누가 봐도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책상 위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나를 발견하고 정색했다.

누가 보면 머리에 꽃이라도 꽂은 줄 알겠네.

슬쩍 문가를 살폈다. 다행히도 사람의 그림자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우리 착한 여주가 노크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올 리는 없지.

내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안도했다.

이미 남주와의 첫 만남에서 체면을 구겼으니 이번만큼은 체면을 살리고 싶었다.

“이런, 커피가 너무 식었잖아.”

이 추운 겨울에 제도까지 허름한 삯 마차를 타고 온 아일라에게 식은 커피를 줄 수는 없지.

비서가 없는 나는 평소에도 내 손으로 직접 끓인 커피로 손님을 대접했다.

그녀에게도 커피를 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달빛으로 빚은 듯한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은색 머리가 물결치듯 허리까지 내려온 여인은 갈색 코트를 입고 다소곳하게 서류를 들고 서 있었다.

아일라 레니에, 그녀였다.

* * *

커피콩이 곱게 갈린 거름망에 잔을 대고 천천히 물을 부었다.

깊고 진한 커피 향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아일라 앞에 커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녀와 나는 이미 비밀 보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그녀는 내가 레니에 후작에게 자신의 소재를 알릴까 두려워했다.

내가 비밀보증서까지 만들어 사인하자 비로소 아일라는 자리에 앉았다.

입술이 메말라 있는 그녀는 간밤에 잠을 설친 모양인지 눈그늘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이미 소설을 읽어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대면하니 동정심은 배가 되었다.

그런 일을 겪고, 불편한 삯 마차에서 쉬이 잠들기란 어려운 법이긴 하지.

그녀가 커피잔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자, 내가 말했다.

“커피 말고 다른 걸로 드릴까요?”

“아, 아뇨!”

약간 머뭇거리며 그녀가 커피잔을 잡았다. 잔을 잡은 손은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저 손이 후작가에서 허드렛일을 했던 손이라고?’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걸 보니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게 조금이나마 와닿았다.

한편, 아일라는 계속 찻잔을 들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커피를 보는 눈빛에서 아이가 처음 보는 간식을 관찰하는 듯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나는 ‘설마’ 하는 얼굴로 나도 모르게 아일라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그녀는 한 모금 홀짝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내 시선을 느끼곤 곧바로 인상을 폈다.

“너무 쓰면 옆에 있는 설탕을 넣으시면 돼요.”

부러 부드러이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아일라의 볼이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내가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녀 쪽에서도 깨달은 모양이다.

커피를 처음 마시는 그녀는 모기같이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며 설탕을 집어 들고 잔에 한 스푼씩 넣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그렇게 넣으면 커피가 너무 달아질 텐데?

내가 그녀의 행동을 막자 아일라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방금 설탕을 몇 번이나 넣은 거야.

나는 그녀가 놓아둔 설탕 단지 안을 보았다.

벌써 절반이 비어 있었다. 분명 아침에 내가 가득 채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일라는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처음 마셨던 것보다 한층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제야 아일라가 단것에 환장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반대로 쓴 것은 입에도 못 대고. 갑자기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코코아도 남은 게 있는데, 한잔 드릴까요?”

“아, 아뇨. 번거로우실 텐데…….”

사양하는 목소리도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곱디고왔다. 나는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다실로 들어갔다.

자꾸만 그녀를 보면 독자 시절 여주 엄마를 자처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덕심이 불쑥하고 떠오르려고 했다.

하아, 진정하자. 오필리아!

한 번 생긋 미소를 지을 때마다 작은 은방울꽃이 피어오르는 듯한-놀랍게도 원작의 묘사였다- 여주의 실물은 굉장했다.

그야말로 여신이었다, 여신!

저 모습으로 용케 험한 일없이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는 게 신기했다.

아무리 제도가 치안이 좋다지만 묘령의 여인이 혼자 다닐 정도로 청정한 곳은 아니었다. 특히 저런 미모로는 더더욱.

-피우욱!

주전자가 끓기 시작했다. 나는 두 개의 머그잔에 물을 채우고, 다시 아일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코코아 향에 킁킁 냄새를 맡은 아일라의 얼굴엔 발그레 화색이 돌아 있었다.

그러자 내내 성숙해 보였던 얼굴이 그제야 열여덟 살 여자아이로 보였다.

아일라는 단 걸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 리카르도가 황실의 유명한 디저트 셰프를 아일라의 전속 디저트 셰프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케이크라도 준비하는 건데.

오늘따라 준비성 없는 내 모습을 깊게 후회하며 코코아를 건넸다.

“따뜻해…….”

아일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말했으나 조용한 실내엔 비교적 크게 들렸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린 아일라가 뺨을 붉혔다.

“코코아 말고 실내도 따뜻하죠? 저것 덕분이에요.”

내 손끝이 가리키는 곳엔 마력석이 박힌 갈색 상자가 있었다.

“제 친구가 만들어준 난방인데 정말 따뜻해요.”

“……친구분이 뛰어난 기술자인가 봐요.”

아일라는 잠시간 상자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코코아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뛰어난 기술자…… 그렇죠.”

그 뛰어난 기술자, 아니, 마법사가 서브 남주랍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안으로 삼켰다.

‘그래, 너무 뛰어나서 사람 속까지 꿰뚫어 보니 탈이지.’

푸른 머리의 괴짜 마법사를 떠올린 난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우리 서브 남주가 이상해졌어요.’라는 방송이 있다면 제일 먼저 출연시켜서 솔루션을 처방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통찰 능력이 있다는 건 소설 속 내용으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신은 원작 보호의 법칙(?)도 모르는 모양이다.

첫 대면에 엘렌이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라는 말 따위를 하며 내 속을 뒤집었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했다.

로맨스 소설이 순간 호러 소설로 장르가 바뀌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여 내가 기억하고 있는 소설 내용이나 전생까지 모두 엘렌한테 다 들키고 말았다.

나중에 엘렌이 리카르도에게 이곳을 소개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진짜 책 내용처럼 될지 궁금하잖아?

라는 말을 하며 사람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게 아닌가.

아니, 책 내용처럼 되면 당신은 짝사랑하는 여주인공을 평생 잊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게 되는 신세가 된다니까요?

“들고 계신 서류 좀 볼까요?”

내 말에 아일라가 경계감 짙은 얼굴로 서류를 꼭 껴안았다.

저기요, 여주님. 제가 그걸 안 보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된답니다.

내가 열렬히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쏘아 보내자 아일라는 머뭇머뭇 팔에서 힘을 풀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서류를 쏙 빼냈다.

신줏단지라도 뺏긴 듯한 표정이었다. 일순 내가 악역이 된 기분이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어서 다음 내담자가 올 때까지 일을 진행시켜 놓아야 했다.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세계가 소설 속이라도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 또한 현생이 있다는 사실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내 인생이 주인공 위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도 먹고살아야 하진 않는가.

사실 저 서류 봉투 안에 무엇이 있을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나는 실링왁스를 벗겨내고 종이를 꺼냈다.

예상대로 리카르도에게 내밀 계약 결혼 서류들이었다.

혹독한 전생을 두 번은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히 보일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한 조항들.

이상한 조건들은 없었고, 전체적으로 마치 공동사업을 할 때 만들어지는 계약서 같았다.

다만 그와 차이라면 결혼을 두고 계약하는 거라 부부의 역할 같은 사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어쨌거나 공사가 딱딱 구분되어 있었다.

차라리 이런 실력으로 여기에 직원으로 입사한다면 꽤 좋은 직원이 될 텐데. 나는 습관처럼 악덕 사장 같은 생각을 하며 군침을 삼켰다.

“이상한 점이 있나요?”

아일라가 긴장 어린 눈으로 물었다. 저 옆에 리카르도가 앉아 있는 상상을 하자 한 쌍의 선남선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뇨, 완벽해요.”

바로 내 입에서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회귀한 여주인공의 준비성은 빈틈이 없었다.

아일라는 내 대답에 비로소 안심한 듯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저 미소 너머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엿보였다.

가족한테 벗어나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건 현타가 올 만도 하지.

보는 나도 조금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녀는 한 번 침을 꿀꺽 삼키더니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조건을 승낙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있죠. 방금 내담 받고 나가신 분이랍니다.’라고 기다렸다는 듯 말하면 조금 이상하게 보이겠지. 부러 나는 고심한 표정으로 턱을 쓱 문댔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불안감이 서렸다. 으앗, 저 표정 더 이상 못 보겠어! 우리 여주 다 해!

“마, 마침 적당한 분이 있네요! 원하신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일정을 잡아드릴 수 있는데, 그리해 드릴까요? 아일라?”

아일라는 코코아를 그러쥔 상태로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움직임에 따라 은빛 속눈썹이 살랑거렸다.

“네. 오…필리아.”

그녀는 다시 내가 건넸던 명함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에르도안 공작님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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