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오늘도 차이셨습니까?”
사택으로 돌아온 에르도안 공작을 발견한 펠릭스가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리카르도와 비슷한 색이지만 차가운 심연보다는 따뜻한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안부처럼 묻는 그의 말에 리카르도가 발길을 멈추었다.
“아니다.”
“물론 아니겠죠.”
어딘가 미묘한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펠릭스의 얼굴에 서늘히 꽂혔다. 마주 보는 이를 딱딱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가 흐르는 눈빛.
하지만 펠릭스는 벌써 그와 지낸 지, 수년이 지났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경을 닦았다.
“말씀도 안 꺼내셨을 테니 말입니다.”
“요즘 따라 얄궂은 말을 자주 하는군. 한가한가?”
공작의 말에 펠릭스가 반가운 듯 화색을 띠며 말했다.
“예, 한가합니다. 그러니 이제 공작가로 돌아가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빙벽에 있던 설인들이 공작님께서 언제 돌아오시냐고 연락을 취해 옵니다.”
“빙벽은 지금 어떤 상태지?”
“궁금하시면 직접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따로 언질이 없는 걸 보면, 빙벽은 괜찮은 모양이군.”
펠릭스는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마시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시라는 겁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는 “하, 하. 예. 그렇죠.” 하고 어색한 웃음만 뱉었다.
벽을 보고 대화해도 이보단 낫지 않을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처음 보좌관으로 부임이 되어 저 무심하면서도 위압적인 눈빛에 바짝 긴장을 차리고 일했던 때도 있었건만.
1년 전, 펠릭스는 보좌관으로 부임된 이래 처음으로 공작을 따라 황궁으로 왔던 날을 떠올렸다.
촌수로는 삼촌인 황제는 조카인 리카르도를 극진히 환대하며 기쁨을 금치 않았다.
안 그래도 아끼는 여동생의 아들인지라 귀애하던 친조카 리카르도였다.
그런 그가 제법 수세에 몰려 있던 큰 전쟁에서 승전 소식을 가져왔으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으리라.
그러나 황제는 황관의 주인답게 욕심 또한 많았다. 그는 조카가 하루라도 빨리 좋은 짝을 만나 오손도손 가족을 꾸리는 바람을 감추지 않았다.
공연히 황실파로 알려진 조카가 좋은 배경의 가문과 결합이 된다면 황실의 권위를 조금 더 공고히 다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반면에 여러 전투를 겪은 에르도안 공작의 머릿속엔 빙벽 너머의 마물과 싸우는 방법만 있었다.
하지만 개선식 날, 황제는 승전을 축하하며 와인을 들고 축사를 한다.
‘짐은 이제 조카 내외가 아들, 딸 낳고 오손도손 사는 모습을 본다면 여한이 없느니라.’
라는 내용으로.
보통 그런 자리에선 에둘러서 말하는 게 일반적인데, 조카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황제의 말이니 온전히 무시로 일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도는 노력하는 성의라도 보일 겸, 제도에 올라와 황궁에서 만난 마법사의 소개로 결혼 업체 <허니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화근이었다.
그는 그곳에 다녀오고 뭔가 이상해졌다. 아니, 정정한다.
공작님은 누굴 만나고 이상해진 것이다.
그 상대는 허니문을 운영하는 사업가,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화려한 블론드 금발 머리와 작은 태양을 품은 듯한-공작님의 묘사에 따르면- 다홍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공작은 오필리아의 눈을 보면 북부의 추운 겨울을 금방이라도 따뜻하게 녹여줄 것 같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가 끼어도 단단히 낀 게 틀림없다.
펠릭스가 그녀를 본 첫인상을 후술하자면-
도도하게 눈매가 올라간 그녀는 남에게 명령받기보단 명령하는 것에 어울리는 여자였다.
제도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굉장히 아름다운 축에 속한 것도 인정하지만, 그건 리카르도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로 조금 부족했다.
‘지금 생각해도 절대로 공작님의 이상형은 아니야.’
외려 상극이었다.
비교적 남보다 공작과 긴 시간을 보내온 그는 공작이 순정적이고 얌전한 여인을 선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군림하는 자였으니까. 이 명제는 공사에 따라 분리되지 않았다.
과거, 세간에서도 에르도안 공작과 안셀모 황태자 중 누가 황위를 거머쥘 것인가를 두고 뜨거운 감자마냥 입방아를 찧었다.
그런데 그 열띤 토론이 무색하게 공작은 황실 계승권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북부로 올라갔다.
성가신 알력싸움은 딱 질색이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북부의 지배자였던 공작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린 펠릭스는 그가 제도에 와서 무얼 잘못 먹은 것이 아닐까 심히 우려스러워졌다.
“공작님.”
“알고 있다.”
“제가 무슨 말씀을 할 줄 알고 선수를 치십니까?”
그의 말에 리카르도가 야트막한 한숨을 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미려하고 반듯한 그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져 있었다.
“오필리아가 결혼했다는 건 나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습니까. 이제 아셨으니 얼른 포기하시지요.”
“내일 한 번만 더 보고 생각하지.”
“그렇게 내일이 또 내일이 되고, 그 내일이 내일이 되어 1년이 흘렀습니다만.”
“…….”
대화의 승기가 펠릭스에게로 기울었다.
이 대화로 인해 할 말을 잃은 건 리카르도 쪽이었지만, 진정으로 할 말을 잃은 쪽은 펠릭스였다.
‘이건 중증이다!’
그것도 상사병 말기.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공작님이 이성을 잃을 리가 없었다.
병에 걸리면 약도 필요한 법.
여자로 인해 생긴 병은 여자로 치료하면 된다. 그게 펠릭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금발 머리에 다홍색 눈동자. 얼마든지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사…”
사양하지, 라는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펠릭스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래도 임자 있는 사람을 넘보는 건 파렴치하지 않습니까.”
파렴치. 정곡을 송곳으로 찌르는 그의 말에 얼음 공작은 얼음 파편마냥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리카르도는 ‘파렴치…’라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펠릭스는 최후의 비수를 꽂듯 단호히 일갈했다.
“그러니 포기하십시오.”
* * *
남주인공은 광휘를 휘감은 채 어김없이 허니문에 아침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어머, 오늘도 오셨네요?”
그런데 남주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였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방문을 반겼다. 드디어 왔구나! 우리 남주!
나를 본 그의 잘생긴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아, 내가 너무 과하게 반가운 티를 내서 이상해 보였나?
그런데 내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드디어 우리 남주가 장가를 가거든요!
혼기가 꽉 찼는데 집안에서만 틀어박혀 있던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었던 난 속으로 환호했다.
그런데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카르도는 왠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내 앞에 앉은 그는 잔을 잡는 내 손을 잠시간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반지, 별로군.”
그의 시선이 내 약지에 닿아 있었다.
“쿨럭…… 네?”
정말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이 절로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멍하니 약지에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가 못마땅한 듯 바라보는 게 지금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알았다.
이게 무슨 아침부터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람.
“…….”
평소라면 무던히 대꾸하며 넘길 상황이건만, 이 말을 꺼낸 게 하필 리카르도라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 때문에 내 대답도 반 박자 느리게 나왔다.
“그렇게 보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생긋 미소를 지으며 가장 무난해 보이는 대답을 골랐다.
“제 남편의 취향이에요.”
“…….”
우두둑.
“어머!”
갑자기 그가 잡은 찻잔의 손잡이가 부서졌다. 그러면서 그의 바지에 커피가 쏟아졌다.
“괜찮으세요?”
나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거 방금 내린 커피라서 엄청 뜨거울 텐데!
정작 바지에 커피가 쏟아진 장본인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찻잔이 깨진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 장가갈 날이 멀지도 않았는데 흠이라도 생기면….”
내 중얼거림을 들은 리카르도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진짜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게 들렸을 줄이야. 내 손수건으로 커피를 닦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차가운 눈빛에 나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드, 들으셨어요? 그게…… 아! 맞아. 이제 곧 공작님 마음에 쏙 드는 여자가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여자주인공이 오기 전에 밑밥 작업 좀 해놓자.
그러나 리카르도는 내 대답에 반박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작 내용을 알고 있는 나로선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지만.
나는 도발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기할까요?”
“어떤 내기를 말하는 거지?”
“만일 1년 이내에 공작님께 마음에 드는 여인이 나타나면, 이번 항만 사업의 지분 10퍼센트를 제 몫으로 돌려주시는 거예요.”
농담처럼 꺼낸 내기는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지분 10퍼센트라니. 리카르도가 호구도 아니고…….
“좋군.”
아무래도 호구가 맞았나 봅니다. 까일 걸 100퍼센트 염두하고 말한 게 먹히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콜록.”
마시던 커피에 사레가 들린 나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카르도가 ‘괜찮나?’ 하고 묻는 것이 들려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내 동공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거 완전 호구 아니야?’
어느 정도 내 해수기가 멈추고 약간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모양새는 떨어지지만, 지금이라도 말을 바꾸기엔 늦지 않았단다. 남주야.
“그럼, 대신 조건을 조금 추가했으면 하는군.”
어떤 조건을 추가해도 그가 호구임은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바꿀까요?”
“1년 이내에 그대가 소개하는 여자 중 마음에 드는 여인이 나타난다면, 이렇게 추가하지.”
그거나 저거나, 나한테는 그게 그거였다. 어떤 조건을 내걸지 살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김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게 뻔한 게임. 이렇게 날로 거저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운인가.
계속 비식비식 흘러나오는 승리의 미소를 억지로 참고 있는데,
“아직, 내가 이겼을 때는 보상을 무엇으로 할지 정하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운 표정을 만면에 채운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