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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매는 뭔가 잘못되었다-1화 (2/124)

1화

“사장님, 방문객이 왔습니다.”

“내담자?”

“아뇨, 페드로 자작이 사장님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직원의 말에 내 눈썹이 자연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조금만 인상을 찌푸려도 사납고 험악해지는 내 인상에 남직원은 소심한 얼굴로 어깨를 수그렸다.

그런 사사로운 일 정도는 본인 선에서 끊어야 하는데, 이번에 새로 고용한 신입이라 그런지 일 처리에 미숙한 면이 보였다.

“난 바쁘다고 말하고 적당히 예의가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돌려보내세요. 상담 문의가 아니라면, 여자 빼고 전부 본인 선에서 해결하면 돼요.”

손안에서 펜대를 굴리며 생각했다. 저 신입을 고용한 게 누구였지. 아, 페트리샤.

‘인수인계를 하면서 이런 중요한 걸 빼먹다니.’

아침부터 신입 교육이나 시켜야 한다는 게 조금 짜증이 일었지만, 신출내기에게 아량을 베풀 요량은 있었다.

“이거 보여요?”

나는 그의 쪽에서 손등이 보이게 왼손을 들었다.

“예, 손가락도… 아주 예쁘십니다.”

참나, 실없는 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니, 약지를 보라고.”

내 약지에는 사파이어가 가운데 박힌 은색 반지가 걸려 있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손으로 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받쳤다.

“간혹 귀족분들이 제가 결혼한 유부녀라는 걸 모르고 만남을 원하시죠. 그쪽들이 말하는 대로 나이치곤 얼굴도 반반하고-”

신입은 직원들끼리 나눈 대화를 내가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핼쑥하게 변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돈도 많으니까요.”

꽃뱀 퇴치 스프레이라도 있다면 이런 거치적거리는 반지 따윈 필요 없을 텐데. 깨나 통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신입은 이 순간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처럼 핼쑥한 얼굴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른 직원들이랑 나눈 이야기를 솔직히 얘기하고 사과한다면 사내 왕따는 낙점이고 앞으로의 출근길이 지옥길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사장인 내 눈치는 보이고…… 알만하군.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나는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휙휙 저어 신입의 걱정을 일단락시켰다.

그가 사무실을 나가고 난 후, 힐끗 사무실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50분.’

첫 내담자가 방문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거울을 꺼내 얼굴을 체크했다.

한 올도 벗어나지 않게 깔끔히 올려진 금발 머리와 다홍색 눈동자.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흐르는 미녀가 도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즈니스의 기본은 신뢰를 주는 단정한 용모였다.

그 때문에 철저히 자기 관리를 놓지 않아 나는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말끔했다.

원래 이렇게 타고난 탓도 있지만.

‘오늘도 완벽.’

흠잡을 데 없는 모습에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울을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문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올 시간이 되었는데.’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1년째 보는 익숙한 광경에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내실로 들어온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도 어두운 네이비색의 신사복을 말쑥이 갖춰 입은 채였다.

신이 얼음으로 조각한 피조물 같은 그는 내 책상 쪽으로 긴 다리를 시원히 뻗으며 걸어왔다.

착시일 게 분명하지만, 주인공이라고 그의 주위로 휘광이 휘감겨 있는 듯했다. 이게 바로 주인공 버프라는 건가?

리카르도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책상 앞에 놓인 손님용 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느른한 자세를 취했다.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자태에 홀려 입을 헤, 벌리려던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처럼 나는 아침마다 휴식과 눈 건강을 맞바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1년 전부터 줄곧 나의 첫 내담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에게 나는 갓 뽑은 커피를 내밀었다.

“정말 성실하시네요. 만일 제 직원이었다면 개근상이라도 챙겨드렸을 거예요.”

“개근상이라.”

“원하시면 드릴까요?”

“그대가 원한다면.”

“상장은 인편으로 보내면 될까요?”

내 대답에 냉기가 풀풀 흐르는 리카르도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미소였다.

‘크으,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미소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네.’

속으로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는 허심탄회하게 생각했다.

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이제 곧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들었다.

벌써 1년. 이제는 여주가 등장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편안히 농담이 오가는 대화를 나누게 된 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아침마다 사무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 리카르도 에르도안 덕분이었다. 여주를 만나려는 노력이 가상하기도 하네.

‘남주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여주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람.’

이 소설의 여주는 아직 우리 앞에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얼른 와서 리카르도를 데려갔으면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야 직원보다 더 부지런하게 출근하는 그에게 벗어나 꿀 같은 아침 휴식을 즐길 텐데 말이지.

어쩐지 리카르도를 불청객인 양 말했지만, 솔직히 따지자면 나에겐 불청객보다는 귀빈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투자한 사업자금으로 항만도시 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충 이렇게 말하면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인지 가히 예측이 갈 것이다. 그냥 한마디로 천문학적.

그러나 말 좀 텄다고 1년밖에 알지 못한 사이인 날 뭘 믿고 이렇게 해주는 건지, 새삼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리카르도를 바라보자 심연의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몹시 차가운 색이었지만, 나는 그 색이 마냥 차갑지만은 않다는 것을 1년이란 세월 중에 깨달았다.

‘흠, 어쩌면 내가 사업 수완이 좋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본 것일 수도.’

의문의 시작은 결국 자화자찬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이 몸이 그만큼 잘난 것을.

나는 싱긋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 * *

그런데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공작님, 원래 그렇게 남을 잘 도와주시는 편인가요?”

조금의 눈치라도 있으면 그가 자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돌아볼 만도 했지만, 리카르도는 그럴만한 눈치는 없었다.

‘원작 내에서 조금 친해지기만 하면 뭐든 베푸는 자선사업가나 호구라는 설명도 나오진 않았는데.’

오지랖인 걸 알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1년간 지켜본 바로는 그는 꽤 착한 인간군상에 속했으니까.

그가 나한테 쥐여 준 초기 투자금만 자그마치 1억 실링(한화 500억)이었다.

이건 호구라도 보통 호구가 아니었다. 내 능력을 믿고 맡겼다고 하기엔, 그 또한 상식선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그의 이마 골이 깊어졌다.

그의 핏빛처럼 붉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조금씩 기부를 하는 편이지만, 그 외엔 딱히 남을 도와주거나 하진 않는다.”

“기부요?”

그가 기부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무릇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잘생긴 것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역시 좋은 얼굴엔 좋은 인성이 깃든다.

“어디에 기부를 하시나요?”

“구빈원이나 탁아소 같은 몇몇 곳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고 있지.”

“정말 공작님은 인품도 완벽하세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겐 칭찬은 아끼지 않는 법. 활짝 웃으며 말하자, 리카르도는 살짝 시선을 모로 향하며 커피를 마셨다. 수려한 턱선에 약간 힘이 들어간 듯 힘줄이 보였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에이, 설마.’

내가 한 말이 아무리 진심이라도 이런 이야기는 서로의 위치상 그저 입에 발린 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을 터.

사업의 대주주이자 물주한테 이러한 립서비스는 당연한 것 아닌가.

무엇보다 그는 개인이 정해놓은 선이 뚜렷했고, 그 선을 넘고 기어오르면 가차 없이 내친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에 익숙한 얼음성의 군주. 여주인공을 제외하곤 그 선에 예외란 없었다.

그 경계와 선을 찾지 못해서 그의 주변인이 얼마나 한순간에 내쳐졌는지.

그러나 그만큼 호오가 분명해서 기준점만 찾는다면 응대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기준점을 찾기가 어려워서 문제지.

‘일이나 하자.’

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었다.

이 안엔 조건에 맡는 혼처를 구하는 사람들의 리스트가 담겨 있었다. 아침마다 갱신이 되는 리스트였다.

본래 귀족들의 결혼 관례는 연회의 초청이나 파티 참석에서, 가문에서 내정한 약혼자를 만나 얼굴을 먼저 확인하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는 그 뒤에 여러 번의 만남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귀족들은 우연을 가장한 계획적인 만남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서로 약혼자라 소개하며 집에서 만나 ‘우리, 결혼합시다.’ 이래도 되지만, 귀족들은 그건 낭만이 부족하다면서 곧 죽어도 ‘우연한 만남’을 고집했다. 그게 옛날부터 내려와 관습처럼 굳어진 게 오래였다.

낭만은 낭만대로 챙기되 상대의 조건은 보고 싶고.

참 욕심도 많은 양반들이었다.

귀족들은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고 있었으나 그건 내가 결혼 사업을 펼치면서 종식시켜 버렸다.

귀족들은 장차 사돈댁이 될 귀족 가문에 대한 배경과 재력, 당사자의 후계 생산에 대한 능력 등등을 미친 듯이 궁금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체면이나 낭만 때문에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는데,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사업을 펼친 것이다.

그저 귀족들은 내가 내미는 리스트를 못 이기는 척, 받아들면 되는 일.

나를 통해 결혼에 골인한 영애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살롱에서 말해준 덕에 사업은 그 길로 승승장구했다.

이 얼마나 그들에게 편한 일인가. 체면도 챙기면서 상대 약혼자의 호구조사를 내 회사에서 대신해 주고 있으니 귀족들에겐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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