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아래 3층의 하얀 건물엔 새로 페인트칠한, 말끔한 간판이 반짝거렸다.
<허니문>
이곳은 귀족들 간의 결혼을 주선하는 결혼 중매 업체 허니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벌써 4년.
내가 <허니문>을 세운 후 흐른 시간이었다. 사업은 몇 개 더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만큼 애착이 가는 사업은 없었다.
전생에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본 결혼 광고를 떠올리고 처음 세운 사업이었다. 그 출근길이 마지막 출근길이 될 줄은 설마 몰랐었지.
과로로 쓰러지고 일어나니 나는 갓난아이가 되어있었고, 이곳이 내가 취준생일 때 푹 빠진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뒤였다.
꽤 명망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덕분에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나는 귀족들의 사회나 인습을 자연스럽게 파악했다.
그래서 확신했다. 필연적으로 사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의적절하게도 제국에서 이 사업을 시작한 것 또한 내가 처음이었고, 사업은 금방 번창했다.
웬만한 귀족들은 현대인보다 상대의 집안과 조건을 더 중요시하니 이런 회사를 가만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성공한 내 회사를 본 사람들은 뒤늦게 우후죽순 너도나도 결혼 사업을 시작했지만 결국 나 빼고 다 망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아침부터 바닥을 닦고 있는 청소부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장, 오필리아 마르그리트>라고 적혀 있는 명패가 걸린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있어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향긋한 커피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직원이 내려놓은 커피를 한 손으로 집어 들고, 에일 정도로 찬 바람이 부는 창문을 닫았다.
상담자가 오기 전에 사무실을 따뜻하게 만들어 놓는 게, 회사 일과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자 아침 신문을 들었다.
건조한 날씨로 뻑뻑해진 눈가에 팩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시끌시끌하네.’
레이디 로사의 베이커리 창업,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불화, 그리고…….
내 시선이 신문의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대서특필된 곳에 한 남자가 원치 않은 관심에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꽤 흐릿한 사진임에도 남자의 수려한 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나는 커피를 놓지 않은 채 노크에 대답했다.
아마 금일 결혼 상담을 받기로 한 내담자의 리스트를 정리한 직원일 것이다.
흠, 오늘은 얼마나 문의가 들어왔을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직원이 아니었다. 남자는 키와 장골이 크고, 다리가 화보 모델마냥 길쭉길쭉했다. 우리 직원 중에 저런 모델 같은 사람은 없었는데.
나는 두 눈을 의심하며, 신문과 눈앞의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왜 신문 속에 있는 사람이 내 눈앞에 있는 거지?
“리카르도 에르도안……?”
“나를 아는가?”
북부인의 특징인 창백한 피부와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달을 품은 심연처럼 푸른 눈동자.
전체적으로 조각 같은 미남자는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고압적이고 서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남주가 대체 왜 내 앞에…….”
“뭐라고?”
“아, 아니에요.”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빠르게 신문에 시선을 옮겼다.
리카르도 에르도안.
지금 개선식으로 올라온 그는 제도에서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 화제의 불씨를 지핀 건 다름 아닌 황제였고.
승리를 거머쥐고 온 조카에게 황제가 개선식에서 한마디를 한다.
‘나는 이제 조카가 아들딸 놓고 사는 걸 보면 여한이 없느니라.’
그의 말 한마디로 지금 신문에선 어떤 여인이 공작의 반려가 될 것인가-를 두고 열띤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렇다. 그 황제의 조카가 리카르도 에르도안이었다.
그 덕분에 하루라도 빼놓지 않고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고 있는 장본인이자, 동시에 이 세계의 주인공.
정확히는 <그 후작 영애의 계약 결혼>이라는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이었다.
“내가 잘못 찾아온 건가? 그의 말로는 이곳에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결혼 중매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맞게 찾아오신 거긴 한데….”
왜 그가 결혼 중매상 따위를, 왜 하필 여길 찾아왔을까.
그러한 의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의문도 잠시.
커피를 내려놓던 내 손이 멈추었다. 벼락같은 충격이 머리를 관통했다.
에르도안 공작이 괜찮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떠오른 의문을 해결할 단서를 떠올렸다.
-리카르도와 아일라는 중매상의 주선하에 만나게 되었다.
라는 소설의 한 구절을.
나는 새삼스럽게 제국에 있는 결혼 중매상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허니문 빼고 결혼 업체가 다 망했다.
고로 남주가 이곳에 온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닌, 원작을 위한 필연적인 코스였던 것.
나는 습관적으로 내담자에게 묻듯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위압감 때문인지 내뱉는 질문은 절로 공손해졌다.
“혹시 연세가……?”
“연세라고 불릴 정도로 늙지 않았다. 스물넷.”
리카르도 에르도안이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왠지 기분이 몹시 나빠 보였다.
나는 그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은 뒷전으로 미루며 다시 생각에 빠졌다.
스물넷이라.
나와 그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걸 자연스럽게 원작에 연결시켰다.
스물넷이라면…… 1년 후에 여주랑 만나게 된다는 건가?
리카르도 에르도안이 스물다섯에 일곱 살 어린 아일라와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는 사실도 덩달아 떠올랐다.
가만 생각하니 이거 완전 도둑놈인데?
“내가 잘못 찾았나 보군.”
“자, 잠깐!”
나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자리를 뜨는 남주를 붙잡았다.
리카르도 에르도안.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검사이자, 북부의 공작. 동시에 황제가 귀애하는 친조카.
그와의 관계가 돈으로 직결되자 아까 느려터진 사고가 놀랍게도 빠르게 흘러갔다.
황태자 아래로 황녀밖에 없는 제국에선 계승권 1위인 황태자에 이어 2위가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물과 재산도 상당했다.
그런 그와 친분을 쌓는다면, 내가 생각한 사업 로드맵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원작의 내용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는 것도 충분히 흥미는 있었지만, 이보다 더 내 구미를 당기는 사실은 없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오작교 역할 한 번 하자!’
제도에서 유명한 에르도안 공작의 선 자리를 주선했다는 소문이 돌면 허니문도 입지를 다질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동시에 북부의 공작, 남주인공과 인맥을 만들 절호의 기회.
‘타고난 돈복을 가진 남자주인공이니까 옆에 있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어?’
원작도 보고 인맥도 만들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덩달아 남주에게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닌가?
나로 인해-물론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운명의 짝을 만날 테니 말이다.
“맞아요. 제가 ‘오필리아 마르그리트’. 제국의 최고 결혼 전문가랍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는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사람이 경박해 보이지 않고 신뢰를 느끼게 만드는 미소는 내 비즈니스의 무기였다.
내 미소에도 명함을 받아드는 그의 얼굴은 아까와 같이 건조하고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느낌인데.
‘사람이 뭐 이렇게 건조하고 차가워. 어휴, 남주만 아니었으면 확 그냥….’
그러나 현실 직시는 빨랐다.
나는 권력 앞에 무력한 자신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며 다시 우아하게 미소를 그려보았다.
찾는 거라도 있으시냐, 묻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건 장식인가?”
“네?”
리카르도의 손이 허공에 맴돌았다. 음, 갑자기 눈 아래가 시원하네?
살랑살랑 가볍게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물체에 내 동공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툭.
눈 전용 마스크팩이 지면에 떨어졌다.
“어라, 저, 저게 왜 여기에. 호호.”
민망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나는 당황한 남주의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마스크팩이 떨어진 순간, 나에 대한 그의 신뢰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음을.
그게 나와 남주, 리카르도 에르도안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