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챙그랑.
레녹스 칼라일은 본래 꿈을 꾸지 않았다.
"너도 언젠가 나를 이해하게 될 거다.”
'또 이 꿈인가.' 하지만 최근 이틀간 그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부친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얄팍했으므로 곱씹을만한 기억도 별로 없었다.
부모에 관한 기억이라고 해 봐야 혹독하게 검술을 가르치다가 검을 내던지는 장면 정도인데.
그의 입장에서는 재수 없는 꿈일 뿐이었다.
그는 좋은 부모를 가져본 적이 없었고, 제대로 된 가족이 뭔지 모르기도 했다.
“전하.”
찬물을 뒤집어쓰고 침실로 돌아 오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 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주무셨습니까?"
“그다지.”
밀란은 오랜 충신이자 몇 안 되는 공작의 신뢰를 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밀란이 빙그레 웃었다.
“긴장하셨나 봅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긴장해서 잠을 설쳤으리라 짐작한 모양이었다.
들러리를 맡기로 한 밀란은 평소처럼 기사단 정복 대신 점잖은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나.”
레녹스는 한숨과 함께 싱긋 웃으며 남은 물기를 마저 닦아냈다.
그는 자신의 신경이 곤두선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결혼식 전에 신부를 보면 불행해진답니다.'
레녹스는 빌어먹을 미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시하기에는 영 껄끄러웠다.
그는 줄리엣을 한시도 떼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결혼식이 이틀 남은 시점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망할 미신 때문에 그는 꼬박 하루 하고도 열네 시간 동안 줄리 엣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몸 시중을 질색하는 성격답게 그는 손수 묵묵히 몸에 셔츠를 걸치고 커프스 단추를 채웠다.
똑똑.
“전하.”
“열려있어.”
달칵 문이 열리고 난처한 얼굴로 등장한 것은 젊은 기사인 주드였다.
“무슨 일인가?”
“저, 그게…….”
밀란이 대신 묻자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주드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벌컥 창문을 열었다.
“…그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결혼식 날 새벽, 창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녹스는 역시 흉몽이었다고 생각했다.
* * *
“어머, 비가 오네."
“어쩌죠, 헬레나 님?”
후두둑.
그리고 성의 정 반대편, 동관의 2층에 있던 사람들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말렴, 줄리엣. 예식 전까지는 비가 그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막 넓은 응접실로 들어선 것은 줄리엣의 외숙모인 헬레나였다.
“세상에.”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줄리엣을 발견한 헬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쁘기도 하지!”
헬레나는 밝은 표정으로 줄리엣의 베일을 정리해주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금치 못했다.
“숙모님이 좋은 드레스를 골라 주셔서 그래요.”
색소 연한 갈색 머리칼을 단정히 틀어 올린 줄리엣이 싱긋 웃었다.
머리핀과 어머니의 유품인 진주귀걸이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단사들이 자그마치 열세 명이나 매달려 만들어낸 웨딩드레스는 는고아하면서도 동시에 화려했다.
별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순백의 드레스는 우아한 목선과 가느다란 어깨를 돋보이게 했고, 곧은 자세는 그녀를 여왕처럼 보이게 했다.
“그래, 정말로 예쁘구나….….”
정작 눈물을 글썽인 것은 이자 크와 카일로스, 바리스. 그녀의 의세 외삼촌들이었다.
“릴리안을, 네 엄마를 꼭 닮았어.”
"네 엄마가 너를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험악한 인상의 장년 남자 셋이 응접실 입구를 꽉 막고 본격적으로 눈물을 찍어낼 기세이자, 헬레나가 팔을 걷어붙였다.
“어휴, 신사분들은 방해하지 말고 나가세요!”
결국 줄리엣의 외삼촌들은 방 밖으로 쫓겨났다.
“날씨는 걱정하지 말렴. 네 삼촌들도!”
언제나 쾌활하고 긍정적인 헬레나답게, 그녀는 줄리엣을 안심시켰다.
“잠은 안 설쳤니?”
"아뇨. 잘 잤어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걱정과는 달리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해가 뜨면 비가 곧 그칠 거예요.”
“걱정 마십쇼, 아가씨."
줄리엣의 마법사 친구인 에셀리 드가 비장하게 말했다.
“아침이 되도록 부슬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르신께서 반드시 비가 그치게 해주실 테니까요."
줄리엣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무슨 수로요?”
“날씨 마법이란 게 있습니다.”
“날씨 마법이 뭔데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하녀들이 물었다.
“비구름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겁니다.”
에셀리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주 고난도의 공간이동 마법이지만 마탑주님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마법사님이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저요? 제가 할 줄 알았음 마탑에 있지 여기에 있을까요?"
에셀리드는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하녀들의 험악한 구박을 받았다.
비구름을 이동시키는 마법이라.
줄리엣은 문득 한참 전에 이별한 악령들이 아쉬워졌다.
공간을 마음대로 열고 닫던 그녀의 나비들 말이다.
쿠르릉.
하지만 새벽 일곱 시가 되어도 비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분명 어제 밤까지는 맑았는데요….”
부슬비 정도였지만 사람들이 걱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예식장으로 정해진 장소는 작은 예배당이 딸린 넓은 야외 홀이었다.
화려한 야외 식장을 꾸며두었는데 비 때문에 다급히 테이블과 장식들을 치워야 했다.
“뭐, 조금 더 지켜보다가 신전으로 장소를 옮기면 되니까요."
사람들은 줄리엣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성에서 가장 침착한 것은 줄리엣이었다.
“그래도 피로연 전까지는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그치?"
"삐약.”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오닉스의 앞발을 잡고 흔들었다.
깜찍한 보타이를 하고 등에는 쿠션을 맨 오닉스는 행복해하며 길고 화려한 베일 위를 데굴데굴굴러다녔다.
줄리엣은 별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레녹스…… 전하는 괜찮으세요?"
“평소와 같으십니다.”
엘리엇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지만 줄리엣은 알아들었다.
대충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이 갔다. 지난 이틀 내내 레녹스는 품고 있던 알을 뺏긴 어미새처럼 굴었으므로, 이틀 내내 떨어져 있던 덕분에 모처럼 만에 열 시간 넘게 푹 자긴 했지만, 줄리엣은 꽤 오랫동안 레녹스를 보지 못한 게 신경쓰였다.
'나는 괜찮은데.’
줄리엣은 스스로도 놀랄만큼 평온했다. 설령 폭풍우 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최근의 줄리엣은 행복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그녀에게 뭐든 좋은 걸 해주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레녹스를 보는 건 신기하고 즐거웠지만 줄리엣은 그도 편안했으면 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데 말이야.”
"?"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테이블위에 놓인 서툰 그림을 바라보았다.
제법 잘 그린 예배당과 햇살이 내리쬐고 꽃이 만발한 정원.
줄리엣은 그가 완벽한 결혼식을 만들어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고있었다.
그가 준비한 그림같은 작은 예배당과 야외 피로연을 못하게 된건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아하?'
느긋하게 오닉스와 장난을 치던 줄리엣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있잖아요, 엘리엇."
“네, 아가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뭐든 말씀만 하십쇼!"
엘리엇은 비장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잠시 후, 줄리엣의 부탁을 들은 엘리엇은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그런 게 필요하십니까....?”
*
전날 예보는 분명 맑을거라고 했었지만 북부의 유능한 행정관들은 돌발상황에도 충분히 대책을 세워 두었다.
결국 장소는 예배당 대신 신전으로 변경되었다.
“한두시간 가량 지체되긴 하겠지만 문제 없습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북부의 주인이라도 날씨를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신경이 곤두선 것은 비가 오거나 계획이 틀어져서 보다는 줄리엣을 못본 지 오래되어서가 아닐까 의심중이었다.
“저,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공작가의 수석비서인 엘리 엇이 그에게 접근했다.
“저랑 잠시 좀 예배당으로 잠시 가시죠. 꼭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어쩐지 엘리엇이 비장하게 속닥거렸다.
쓰지도 못할 예배당은 뭐하러?
"나중에 해.”
안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레녹스는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수석비서는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마법의 문장을 알고 있었다.
“줄리엣 아가씨에 관한 일입니다!"
결국 레녹스는 바쁜 와중에 엘리엇을 따라 나섰다.
“뭘 보라는 거야?”
“가 보시면 압니다.”
엘리엇은 공작을 본래 예식 장소였던 작은 예배당으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변경된 장소인 신전으로 몰려간 터라, 예배당 근처는 인적없이 조용했다.
끼이이.
“어서요.”
"......."
레녹스는 별 일 아니면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여기 뭐가 있다는 건지 -막 예배당 안으로 들어선 레녹스는 멈칫했다.
조용한 예배당 안에는 은은한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객석은 텅 비어있었지만 바닥에는 붉은 주단이 깔려있었고.
은은하게 빛나는 대리석 여신상좌우로는 싱그러운 꽃과 결혼을 상징하는 신성한 수반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줄리엣이 있었다.
레녹스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줄리엣은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그녀가 좋아하는 여름꽃으로 엮은 부케를 들었다.
여자는 그가 오랫동안 그렸던 모습 그대로였다. 우아하면서도 눈이 부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 줄리엣?”
"안녕, 레녹스.”
흰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이 그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