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30화 (227/229)

230화.

*

레녹스 칼라일의 애정은 맹목적 이면서도 얄팍했다.

그는 줄리엣에게 뭐든 주고 싶어 안달했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 가족이나 아이 같은 건 그의 뜻대로 안겨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감정에 무딘 편이었지만, 자신이 건네는 값비싼 선물도 줄리엣에게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제아무리 값진 선물을 안겨줘 줘봤자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줄리 엣은 그간 받은 물건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났다.

하지만 그 방법뿐이었다. 줄리 엣이 조금이라도 웃어주는 게 좋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밖에 제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다.

“그러니까 가르쳐 줘.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테이블에 걸터앉은 줄리엣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굳이 매번 뭔가 보상하듯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증명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차근차근 신뢰를 쌓는 거예요.”

평범하게?

레녹스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걸 보고 줄리엣은 난처해졌다. 그는 여러모로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줄리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전의 연인들에게도 이런 식이었을까?

“그러니까…… 값비싼 보석을 을주는 거 말고, 호감을 사려고 노력해본 적 없어요?"

“그런 적 없어.”

레녹스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딱 잘라 대답했다. 줄리엣은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굳이 타인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매번 선물만 안겨주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젠장.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레녹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누군가한테 잘 보이려고 안달내는 것도, 미움받을까 겁내는 것도. 전부 네가 처음인데.”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 넘기던 레녹스는 말을 내뱉고서야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킥.”

줄리엣은 웃음을 터뜨렸다. 레녹스는 그녀가 왜 웃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였지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줄리엣은 붉어진 뺨을 숨기려고 괜히 헛기침했다.

가끔 레녹스는 지나치게 직설적이라 줄리엣을 당황시키기 일쑤였다. 줄리엣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몇 년을 살았는데.

소꿉놀이하는 어린애들도 그들의 관계보다는 어른스러울 것 같았다.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게 서투른건 줄리엣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은 좋아하면 손부터 잡고, 그 다음에 입맞추거나 해요.”

“매일 하는 거잖아. 뭐가 다른데?"

레녹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였다.

“달라요. 누구처럼 눈만 마주치면 성급하게 손목부터 잡는 게 아니거든요.”

레녹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너도 날 한참 모른다 싶어서.”

레녹스는 담백하게 웃으며 그녀를 제 무릎으로 끌어당겨 앉혔다.

“내가 널 모르는 것 만큼이나.”

줄리엣은 그가 왜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레녹스는 비딱하게 턱을 괴고 물었다.

“그래. 손잡고 입 맞추고, 그리고 또?”

“그리고 대화를 해야죠.”

"......."

"아까 당신이 그랬잖아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줄리엣이 싱긋 웃으며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아침부터 밤까지요.”

“… 고작 그런 걸로?"

“그거면 충분해요.”

부드러운 시선이 부딪혔다. 말없이 줄리엣을 응시하던 그가 줄리엣의 목덜미에 잘게 입맞췄다.

“그래. 약속할게.”

줄리엣은 간지러운 듯 목을 움츠리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레녹스는 깍지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니까."

그리고 레녹스는 깨닫게 되었다. 대화는 좋은 것이라는 걸.

온갖 협박에 못 이긴 신전은 결국 칼라일 공작가에 내렸던 파문령을 철회했다.

레녹스 칼라일은 폐쇄됐던 예배당을 가장 먼저 다시 열라고 지시했는데, 이유가 가관이었다.

공작 본인이 결혼식을 올려야겠으니까.

필요하다면 본인의 손으로 없애버린 대신전이라도 다시 지으라고 명령할 기세였다.

이윽고 리오넬 르바탄이 도착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칼라일 공작은 놀랄 만큼 정중하게 손님들을 맞았다.

“공작.”

리오넬 르바탄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최소한 인사는 받아주었다.

사실 줄리엣은 무슨 수로 레녹스가 리오넬 르바탄의 허락을 받아냈는지 꽤 궁금했다.

줄리엣이 사라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이후로 외조부는 대놓고 레녹스를 몹쓸 놈 취급했던 것이다.

“그래, 예물 목록은 이건가?"

아니나 다를까. 리오넬 르바탄은 공작성에 들어오자마자 어깃장을 놓았다.

“하! 내 손녀를 데려가는데 고작 그 정도라고?”

예물 목록을 대충 훑어보기 무섭게 리오넬 르바탄은 다분히 과장된 동작으로 두루마리를 내팽개쳤다.

“우리 애를 이 낡아빠진 성에서 살게 할 셈인가? 페잉!"

설마 '낡아빠진 성'이 북부에서 가장 커다란 성인 이곳을 말하는 건가? 줄리엣은 기겁해서 자신도 모르게 천장을 힐끔거렸다.

“최소한 번듯한 지붕은 있어야……!”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따로 준비해뒀습니다.”

하지만 칼라일 공작은 이쯤은 예상했다는 듯 조금 전 리오넬르바탄이 팽개친 두루마리를 다시 주워서 정중하게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뒷면을 안 보셨군요."

기다란 예물 목록에는 뒷면도 있었다.

“..…어흠,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공작가의 체면이 좀 서겠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던 줄리엣은 기가 막혀 끼어들었다.

“두 분 다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이건 제 결혼이에요.”

"......"

“쓸데없는 기싸움 하실 거면 그만두세요.”

줄리엣이 다소 험악하게 의견을 타진하고 나서야 레녹스는 겨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서야 줄리엣은 외조부와 함께 오붓한 티타임을 가졌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네 덕분이지.”

누명을 벗고 자유민 신분을 되찾은 리오넬 르바탄은 사람들의 기대나 우려와는 달리, 황실에 피의 복수를 하거나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며 실력행사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체포당할 염려 없이 자유롭게 수도를 산책했다. 줄리엣을 대신해 막내딸의 무덤과 저택을 돌보는 것도 리오넬 르바탄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수도 사람들은 전설적인 수배자인 적왕이 해 질 무렵 느긋하고 자유롭게 거리를 산책하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런데 얘야.”

리오넬 르바탄은 안부 인사도 생략하고 온화한 얼굴로 다짜고짜 물었다.

“정말 저런 녀석으로도 좋은 게냐?”

“마지막으로 묻는 게다. 나는 어디까지나 네 판단을 존중한다 만~”

“할아버지, 이건 비밀인데요.”

줄리엣은 조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옛날부터, 저는 제가 좀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두 번의 열다섯 살을 경험했다. 불가해한 기현상으로 열다섯 살로 돌아왔지만, 줄리엣은 전생을 결코 잊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지치고 상처 입은 상태로 산 탓인지 스스로가 망가져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저만큼 엉망이라서요.”

줄리엣은 왼손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살포시 웃었다.

“그래서 첫눈에 반했나 봐요.”

그건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본능과 직감의 영역이니니까.

그리고 줄리엣의 선택은 옳았다.

'내가 바꿨어.'

줄리엣은 결국 예정된 궤도를 비틀고, 결말을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따스한 햇살처럼 만족감이 차올랐다.

* * *

예식 준비로 북부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 아기 용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예식 중간에 반지를 나르는 중대한 역할을 맡은 것이다.

"므양?”

“어쩜. 너무 귀여워요, 아가씨.”

“응. 다들 즐거워하겠지?"

솜씨 좋은 재단사들은 새끼 용이 등에 쿠션을 맬 수 있도록 끈을 만들어주었다.

반지가 놓일 쿠션을 배낭처럼 등에 맨 새카만 아기용은 하녀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반지 전달자(ring bearer)로 용을 쓰시겠다고요?”

줄리엣의 마법사 친구인 에셀리 드는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줄리엣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우리 닉스 똑똑해요."

“삐약!”

“어떻게 하라고 했지, 닉스?"

줄리엣이 말하자 아기 용은 의기양양하게 복도 저 끝으로 갔다.

그리곤 도도도도 위엄있게 걸어와 표시해둔 위치에 정확히 멈춰섰다.

등쪽 쿠션에 얹은 연습용 반지를 떨어뜨리지도 않고 말이다.

"어머, 딱 한 번만 설명했는데 알아듣는 것 좀 보세요."

“이제 8개월밖에 안 됐는데 말이에요."

“어쩜, 천재인가 봐요!”

줄리엣과 하녀들은 기특해 죽겠다는 듯 아기 용을 마구 칭찬해 주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오닉스는 완전히 우쭐해졌다.

“딱!”

기고만장해진 어린 용을 지켜보던 에셀리드는 할 말을 잃었다.

보통 결혼식에서 반지 전달은 은어린 화동이 맡았다. 간혹 잘 훈련된 동물을 쓰기도 했지만.

하지만 에셀리드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강력한 마법생물이 고작 반지나 나르고 있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용이면서!’

에셀리드는 그동안 꾸준히 오닉스에게 글자나 숫자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에셀리드는 새끼 용이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걸 눈치챘다.

오닉스는 사과의 개수를 열 개까지 셀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하는 게 귀찮아지자 새끼용은 에셀리드를 쫓아내려고 일부러 말을 못 알아듣는 척 굴었다.

줄리엣 앞에서만 찰파닥 엎드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증을 떠는 것이다.

'다들 속고 있단 말입니다!'

에셀리드는 마법사의 서고에서 꽤 섬뜩한 기록을 발견했다.

강력한 마법생물인 용은 태어난지 1년 이내로 웬만한 성인 마법사를 능가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각성하며, 바라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새끼용은 각성은 커녕 귀여움이나 받으려고 빈둥거리고 있으니…….

“우리 닉스 똑똑하기도 하지.”

“삑!”

혹시 줄리엣이 너무 오냐오냐 예뻐하며 뭐든 들어주는 바람에 마법을 각성할 일이 없는 거 아닐까?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문득 결혼도 전에 대단한 애처가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칼라일 공작을 떠올린 에셀리드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가까운 미래에 아이가 생긴다면 틀림없이 두 사람은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울 게 틀림없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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