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29화 (226/229)

229화.

북부 공작성의 대회의실.

석달에 한 번 열리는 정기 회동일이었다. 회의실에서는 아침부터 공작가의 가신들과 북부 공작령의 영주들이 출석해 있었다.

“……해서 가을까지의 생산량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엘파사와 알제 광산도 무탈히 복구 중입니다.”

여름 동안 영지 시찰을 핑계로 인접한 다른 귀족들을 윽박질러 놓은 데다가, 황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기 때문에 공작령의 위상은 더 높아질 데가 없어 보였다.

슬슬 일각에서는 이러다 공국으로 독립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통창을 등지고 비딱하게 의자에 기대앉은 칼라일 공작에게서는 새파랗게 젊은 지배자의 위압감과는 조금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뭔가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분명 평소와는 달랐다.

가신들은 남몰래 공작을 곁눈질하며 속닥거렸다.

“전하께서 회의에 늦으시다니."

“..…무슨 일이신가?"

칼라일 공작은 오늘 회의장에 10분쯤 늦게 등장했다. 타이도 매지 않고, 검은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진 채로.

회의에 지각이라니.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보고를 듣는 내내 레녹스는 그 답지 않게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리거나, 창밖을 보기도 했다.

헉.

공작을 예의 주시하던 영주들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평소 찬바람 쌩쌩 불던 칼라일공작의 입가가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슬쩍 옅은 미소 비슷한 게 보였던 것이다.

‘뭐지? 어디 편찮으신가??'

영주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며 자신들의 행적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난 십여 년간 칼라일 공작을 알아 왔지만 그가 미소짓는 것은 대개 불길한 일의 전조였다.

예를 들면, 그에게 반기를 든 상대를 처절하게 응징한다든지.

'주변 영지를 박살내 놓아서 기분이 좋으신가?'

'……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작가를 넘봤던 가문들의 피가 마르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영주들은 몸을 사려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덕분에 회의는 묘한 긴장 상태로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용건과 지시 사항만 간단히 주고받는 회의 시간은 길어도 두 시간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럼 다음 보고일에-"

하지만 회의가 마무리되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칼라일 공작이 불쑥 말했다.

“뭐 할 말 없나?"

“예?”

“더 할 말 없냐고.”

뭐지?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영주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부터 그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작은 상자였다.

테이블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작은 상자 안에는 한 쌍의 반짝이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아…… 반지! 반지가…….”

“전하!”

“약혼하셨군요? 감축드립니다!”

눈치가 비상한 공작가의 가신들이 먼저 기뻐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다른 영주들도 왜 냉혈한으로 유명한 칼라일 공작이 내내 약 먹은 사람처럼 실실댔는지 알게 되었다.

"아니, 약혼이라니요? 이런 경사가……!”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었다. 칼라일 공작은 약도 없는 열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영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흐뭇하게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건 결혼반지인 모양이지요?”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하지만 칼라일 공작은 다소 고압적으로 반지를 자랑했다.

“이건 그냥 결혼반지가 아니야.”

“예?”

“고상한 안목으로 줄리엣이 직접 고른 거라고.”

게다가 공작의 열병은 꽤 중증이었다.

'내가 미쳐…….'

그리고 잠시 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줄리엣은 부끄러워서 수치사 할 뻔했다.

사회생활은 힘든 것이다.

줄리엣은 살려고 앞다투어 축하인사를 건넸을 북부 영주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 중 하나인 밀란 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준 당사자인 엘리 엇이 가장 감격한 것 같았다.

"모두들 주군이 절대 결혼 못할 거라고 했지만 저만은 꿋꿋이 믿고 있었다고요.”

흡사 딸자식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처럼, 엘리엇은 그간의 설움을 토로하듯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다들 우리 전하가 저 성질머리 못 고치고 아가씨한테 또 차인다에 내기를 걸 때 저만은…….”

“무슨 내기?”

줄리엣을 붙잡고 눈물의 하소연을 하던 엘리엇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칼라일 공작이 활짝 열린 응접실로 막 들어왔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는 엘리엇을 구해 준 건 줄리엣이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요, 두 사람?”

“물론입니다, 아가씨.”

빙긋 웃은 밀란 경이 굳어 버린 엘리엇을 데리고 응접실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둘만 남게 되자 줄리엣은 곱게 눈을 흘겼다.

“뭐가?”

그러나 레녹스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해서, 줄리엣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니까…….”

줄리엣이 어디서부터 항의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 레녹스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줄리엣의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잘 어울리네.”

줄리엣의 약지에는 푸른색 다이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준비한 약혼반지는 줄리엣의 왼손 약지에, 줄리엣이 생일 선물로 준비한 한 쌍의 결혼반지는 레녹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레녹스는 그녀가 준 반지를 왜 당장 끼면 안 되는지 의아해했지만 “결혼반지는 결혼식 때부터 끼는 거예요.”라는 줄리엣의 말에 그럭저럭 수긍했다.

줄리엣은 차근차근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결혼 전까지는 그녀만 프러포즈를 승낙했다는 의미의 약혼반지를 끼다가, 결혼식 당일 결혼반지를 나눠 끼는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결혼 이후부터는 결혼반지와 약혼반지를 함께 겹쳐 끼는 것이 결혼한 귀부인들의 예법이었다.

지난밤에 줄리엣은 몇 개월간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던, 그가 사들였다는 예물들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레녹스는 별 감흥 없이 “다 네 거야.” 라고 말했지만 하나같이 값비싼 패물들이라 줄리엣은 살짝 기가 죽었다.

줄리엣은 그가 쥐고 있는 반지 케이스를 힐끔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근사한 걸로 준비할걸. 그의 생일에 맞춰서, 그것도 몰래 준비하느라 좀 촉박했다.

레녹스가 준비한 것은 프러포즈용 약혼반지만이 아니었다. 예식에서 나눠 끼는 용도로 준비된듯 한, 약혼반지와 쌍을 이루는 반지도 있었던 것이다.

“레녹스.”

“왜?”

줄리엣은 머뭇거리다 몇 번이고 말했다.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도 좋아요.”

결혼반지는 평생 끼는 건데, 이왕이면 그가 준비한 반지를 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몇 번 이는 같았다.

“이게 좋아.”

레녹스는 확고했다.

“네가 고른 거니까.”

*

결혼식 준비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사소한 의견 차이가 존재했다.

레녹스는 뭐든 크고 화려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 했고, 줄리엣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사소한 말다툼은 꼭 진득한 입맞춤으로 끝나곤 했다.

덕분에 눈만 마주치면 다투다가 입 맞추다가 정신이 없었다.

“좋아.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군.”

결국 그날 밤에만 세 번째로 목욕을 하다 다툰 레녹스는,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말해 봐.”

“뭘요?"

그는 줄리엣의 머리를 닦아 주던 수건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와 눈을 맞췄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말이야.”

레녹스는 그녀를 테이블 위에 앉힌 채 양옆을 손으로 짚고 서 있었다. 줄리엣이 입고 있는 품이 넉넉한 흰 셔츠는 그의 것이었다.

"내가 또 뭘 잘못한 거지?"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요?”

내가 널 모를까. 레녹스는 줄리 엣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줄리엣이 상처받았을 때 짓는 표정을 알고 있었다.

“너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매번 짓는 표정이 있어.”

“……내가요?”

“그래.”

입술을 다문 채, 엄마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상처 입은 눈으로 그를 보는 것이다.

레녹스는 그 시선을 마주하면 더럭 겁을 먹곤 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장난해요? 당연히 좋죠.”

줄리엣은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반짝이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하지만 레녹스는 속지 않았다.

이건 줄리엣이 아무렇지 않은 양상황을 모면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

줄리엣은 머뭇거렸다.

“말해 줘, 줄리엣. 내가 또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말하지 않으면 몰랐다. 빌어먹게도 그는 말재주가 없었고, 줄리엣은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그에게 뭔가 묻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그는 몇 번이나 줄리엣을 영영 잃을 뻔했다.

그는 손톱만큼의 불안요소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전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선물주는 거 고마워요. 그치만."

“그렇지만?”

“너무 과해요.”

줄리엣은 딱 잘라 말했다.

“……특히 오늘 아침처럼, 침대에서 덩그러니 보석만 남겨 두고 사라지는 건 싫어요. 차라리 꽃을 주세요.”

레녹스는 줄리엣을 다그쳐 대답을 듣긴 했지만, 뭐가 문제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가 문제지? 꽃보다는 보석이 좋은 게 아닌가?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이자 줄리엣이 조금 얼굴을 붉히고, 다시 말했다.

“그렇게 보상하듯이…… 꼭 값을 치르는 것처럼 덩그러니 남겨 지고 싶지 않아요.”

레녹스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게 아니야. 값을 치르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알아요. 그냥, 가끔 제 기분이 그렇다는 거예요."

레녹스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줄리엣은 이전의 그들의 관계를 말하고 있었다.

그가 충격받은 표정을 짓자 줄리엣은 괜히 말한 것을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말을 들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레녹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줄리엣의 흰 손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증명하는데.”

줄리엣은 순간 기가 막혔다.

“내 눈에 예쁜 것, 네가 좋아할만한 걸 주지 않으면…… 내가 널 귀하게 여긴다는 걸 무슨 수로 증명해?”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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