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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28화 (225/229)

228화.

줄리엣은 반짝이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꾸미려면 공을 꽤 들였을 텐데.

"갑자기 정원은 왜요?"

“네 거야.”

“.....… 정원이요?”

줄리엣은 태연히 말하는 남자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최근 그가 불쑥불쑥 이상한 선물을 가져다 안기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책으로 가득 찬 개인 서재를 만들어 주었고, 그보다 좀 더 전에는 별관을 단장해 통째로 열쇠를 들려주었다.

그러더니 오늘은 백합 정원인 인모양이었다.

“네가 집이 그리운 것 같아서.”

집?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줄리 엣은 정원의 배치가 수도 모나드저택의 정원과 상당히 흡사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다. 어린 시절 줄리엣은 그 정원을 보고 그림을 그렸으니까.

예쁘긴 예쁘지만.

“...… 저건 뭐예요?"

줄리엣은 정원 구석의 수상한 그림자들을 발견하곤 흠칫했다.

백합 정원에 있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아한 현악 춤곡이 흘러나왔다.

오케스트라까지. 꼭 개인 무도회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줄리엣은 그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레녹스 칼라일을 잘 알았다.

그가 불쑥 이렇게 돌발 행동을 할 때면 뭔가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아, 알았다.”

줄리엣은 이내 그의 속내를 눈치채고 그를 돌아보았다.

레녹스는 태연자약한 표정이었지만, 돌이켜보니 짚이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무도회 때문에 이러시는 거 죠?”

열흘쯤 전, 그들은 작은 무도회에 초대받았다.

칼라일 공작 앞으로 온 초대였지만 정작 그는 조금 늦게 연회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가 연회장에 막 들어섰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줄리엣이 낯선 사람과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그날 춤을 춘 상대 중에는 수도에서 유명한 안무가라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엄하지만 잘 가르친다고 평이 좋은 춤 선생이었다.

그리고 레녹스가 무슨 용건이든 마중을 핑계로 줄리엣을 직접 데 리러 오기 시작한 건 정확히 그 직후의 일이었다.

“춤 연습하는 거 구경하고 대화만 했다니까. 역시 안 믿었죠?"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게다가 저보고 왈츠를 잘 춘다고 칭찬했다고요.”

유치한 속내가 들통났지만 레녹스는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기다.

렸다는 듯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너한테 춤 연습이 왜 필요해."

줄리엣은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같은 성질머리로 오래도 참았다 싶었다.

연회장을 선물한 게 아니라 정원으로 참아 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연습이 필요하면 나랑 해."

레녹스는 정말로 춤을 신청하듯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뻔뻔한 대꾸에 줄리엣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싫어한 적 없어."

매번 무도회 때마다 질색하던게 누군데? 줄리엣이 곱게 눈을 흘기자 레녹스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상대가 너라면 괜찮아.”

레녹스가 손을 뻗어 줄리엣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연습 상대가 필요하면 얼마든 든지 가르쳐 준다니까.”

“춤은 제가 더 잘 추는데도요?"

줄리엣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항의하자 레녹스가 장난스레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난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해.”

레녹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줄리엣의 귓가에 속삭였다.

“못 믿겠으면 시험해 봐도 좋아.”

***

한밤의 개인 교습은 줄리엣이 예견했던 대로 흘러갔다.

레녹스가 장담했던 대로 그는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깜빡 잠들었던 줄리엣은 새벽 나절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레녹스가 그녀를 침대 위에 바로 눕히다가 눈이 마주쳤다.

"나 때문에 깼나?"

"아뇨.”

줄리엣은 눈을 깜빡이며 불긋한 자국이 남은 쇄골 언저리까지 시트를 끌어당겼다.

침대 맞은편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레녹스는 안 자고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오랫동안 잠든 그녀를 지켜 본 듯 의자 옆 협탁에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술인가 했는데 찻잎 냄새가 났다. 줄리엣도 잘 아는 실피움 차였다.

레녹스는 흰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타이는 풀어헤쳤고, 머리칼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기진맥진해 잠들었던 데다 네글리제 차림인 줄리엣에 비하면 아주 멀쩡해 보였다.

어쩜 저렇게 멀쩡해 보일 수가 있지…….

“안 잤어요?”

“잤어.”

거짓말.

줄리엣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안 자고 뭐 했어요?"

“너 자는 거 보다가. 오늘 몇 시에 깨울까 고민했지.”

“오늘?”

줄리엣은 순간 뜨끔했다.

“지금 자정이 지났어요?"

“그래.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이리 와요.”

줄리엣은 화제를 돌렸다.

“나는 아직 더 자야겠으니까.”

하지만 레녹스는 싱긋 웃더니, 침대로 돌아오는 대신 그녀 가까이에 와 앉았다.

왜?

줄리엣이 발끝을 까딱이는데, 레녹스가 웬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받아. 네 거야.”

“그게 뭐예요?”

“열어 봐.”

작게 하품하며 키득거리던 줄리 엣은 멈칫했다.

그건 그냥 꽃이 아니었다.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 완벽한 푸른 장미꽃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화려한 반지였다.

“…”

“이거"

“줄리엣.”

이게 뭐냐고 물으려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오래전에 약속했어.”

줄리엣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너를 만나게 된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갖게 해 주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남자가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은 채, 그녀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남은 미래에도, 내가 가진 건 전부 네 거야.”

달빛만 내리쬐는 평화롭고 적막한 침실 안, 반지를 내민 남자가 담담히 고백했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 동안 네 곁에 있게 해 줘."

기교도 꾸밈도 없는 고백은 담백했다.

“평생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

네 남편으로 살게 해 줘."

그러나 줄리엣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결혼해 줘, 줄리엣.”

툭.

"줄리엣?”

“아…… 미안해요. 그게.”

줄리엣의 뺨에서 툭하고 눈물한 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감격했다 기보다는 당황한 것처럼 보여서, 레녹스는 덩달아 초조해졌다.

'너무 성급했나.'

그는 줄리엣에 관한 일이라면 늘 충동적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낭만적인 장소에서 내일 저녁까지 기다리는 대신, 잠기운에 발그레해진 뺨으로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줄리엣을 본 순간 대뜸 청혼하기로 마음먹을 만큼.

'역시 성급하게 구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반지는 그가 공들여 고른 완벽한 약혼반지였다.

여름 동안 그는 틈만 나면 “결혼할까” 청혼해 댔고 줄리엣은 그때마다 웃음을 터뜨리거나 부드럽게 고개를 젓곤 했다.

지금이 좋아요, 라고.

하지만 레녹스는 지금 같은 관계가 싫었다. 적어도 줄리엣을 두고 겁 없이 입을 놀리는 것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자격이 있는 관계가 되고 싶었다.

남편이 아내의 외조를 하겠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레녹스 칼라일은 결국 신전을 협박해 가장 성대한 혼배성사를 주관해 주겠다는 약조와 함께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세례식 날짜까지 받아 냈다.

줄리엣은 몰랐겠지만 눈물겨운 공세 끝에 레녹스는 결국 리오넬르바탄으로부터 줄리엣에게 청혼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다.

남은 것은 반지를 고르는 일 정도였다.

그리고 레녹스는 결국 완벽한 반지를 찾아냈다.

하지만 줄리엣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는 절대 프러포즈를 받고 감격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줄리엣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난처함이었다.

구태여 거절이냐 승낙이냐 다그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화려한 반지를 보고 기가 질린 듯한 줄리엣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최소한 완벽한 반지를 찾아냈다고 생각했었다.

레녹스는 심미안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의 취향은 고급이었고, 특히나 줄리엣에 관한 취향은 더욱 그러했다.

오랫동안 공들여 고른 프러포즈링은 희귀한 푸른 다이아몬드를 백금 링에 세공한 것이었다.

화려하지만 지나치지는 않게.

우아한 절제미가 돋보이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그는 반지가 어쩐지 줄리엣을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줄리엣에게 선택받지 못한 물건은 가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예물이 문제라면 얼마든지 다시 고를 수 있었다. 그는 줄리엣이 뭘 좋아할지 몰라 닥치는 대로 예물을 사들였다.

하지만 줄리엣은 어쩐지 목이 메인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예뻐요. 반지 너무 예쁜데…….”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줄리엣은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예쁘고, 많이 비쌀 것 같아요……. 비싸죠……?”

그럼 역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반지가 아니라 그걸 건넨 자신인 모양이었다.

물론 생각보다 레녹스는 담담했다.

서두르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역시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녹스는 그녀에게 왜 싫으냐고 캐물을 수도 없었다.

줄리엣이 그와 결혼하기 싫어할만한 이유는 너무 많았다.

그녀는 그 때문에 아이를 잃었고, 빌어먹을 저주와 악령 때문에 휘말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너무 많이 겪었다.

줄리엣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말해.”

“나랑 왜 결혼하고 싶어요?"

"네가.”

또 언젠가 나한테 지쳐서 도망갈까 봐.

-라고 말할 뻔했던 레녹스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줄리엣을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신중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두 번째로 떠오른 답을 말했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달라.”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네가 매번 정부니 연인이니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고, 내가 너한테….”

레녹스는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렸다.

"의미가 있으면 좋겠어.”

남편이라든지.

유치하지만 그랬다.

“풋.”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에 줄리엣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키득거렸다.

"음, 있죠. 레녹스."

줄리엣은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와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 것도 좀 좀 우습지만…… 그래도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중요하니까요.”

“그래.”

진지한 태도로 눈을 빛내던 줄리엣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내가 왜 좋아요?"

레녹스는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니, 그거야…….

“네가 줄리엣 모나드니까."

하지만 그건 줄리엣이 바란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제 말은, 왜 좋은지 생각해 본적 없어요?”

“있어.”

줄리엣은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단지 그뿐 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왜 줄리엣이어야 했는지, 목숨을 걸 상대로 왜 그녀를 골랐는지 생각해 봤으니까.

그는 결국 한참 동안 말을 고른 다음에야 겨우 서툴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너는 매번……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줄리엣은 참을성 있게 눈을 깜빡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가장 어려워.”

너는 모르겠지만.

레녹스는 엷게 웃었다.

줄리엣의 마음을 얻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조금이라도 괜찮은 인간인 척 굴게 만들거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줄리엣의 앞에서 늘 그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가 웃으면 뭐든 괜찮아지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도, 줄리엣이 웃으면 주변이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

“사랑이었어.

과거에도, 지금

도.”

줄리엣은 놀란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녹스는 어차피 거절당한 마당에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자.”

그는 줄리엣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뒤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줄리엣이 일어서려는 그의 손을 답삭 붙잡았다.

“잠깐만요.”

그러곤 그를 끌어다 의자에 앉힌 다음, 그의 무릎에 올라앉아 불쑥 말했다.

"눈 감아 봐요.”

"뭐?”

“얼른요.”

줄리엣의 재촉에 그는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눈 뜨면 안 돼요.”

신신당부한 줄리엣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한동안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제 눈 떠도 돼요.”

“......."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그는 시키는 대로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가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앞의 줄리엣이 뿌듯한 얼굴로 뭔가를 내밀었다.

작고 네모난 상자였다. 그가 말없이 보기만 하자 줄리엣이 재촉했다.

“열어야죠.”

레녹스는 순순히 작은 상자를 열었다.

단정한 디자인의, 그러나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백금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레녹스는 그제야 이해했다. 줄리엣이 왜 화려한 반지를 보고 당황한 기색이었는지.

“생일 축하해요, 전하."

줄리엣이 활짝 웃어 주었다.

“내가 먼저 주고 싶었는데.

별로 비싼 건 아니지만-."

줄리엣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그가 입 맞춰왔기 때문이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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