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27화 (224/229)

227화.

***

레녹스 칼라일은 텅 빈 침실 안에서 눈을 떴다.

긴 꿈의 여운 때문에 잠시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거대한 문과 검은 짐승, 그리고 눈부신 빛이.

파라락.

열린 창으로 한 줄기 서늘한 새벽바람이 불어와 누군가 펼쳐 둔책장을 넘겼다.

정신이 맑아졌다.

오늘이 며칠인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헤아리기도 전에 그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지난 며칠간 그를 괴롭히던 열은 말끔히 내려 있었다.

"줄리엣?”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그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급히 침실을 나섰다.

사람을 불러 줄리엣의 행방을 물으면 된다는 당연한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제 눈으로 줄리엣의 안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조용한 성 안을 성급하게 헤매던 그는 1층 테라스로 통하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비가 갠 새벽. 나부끼는 반투명한 커튼 너머.

새가 지저귀는 탁 트인 테라스.

고풍스러운 카우치에 걸터앉은 여자의 뒷모습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 아이보리색 실내용 의상 위에 얇고 가벼운 로브를 한 겹 걸친 차림새였다.

하지만 가느다란 실루엣과 치렁하게 늘어뜨린 옅은 색의 머리칼은 결코 잘못 볼 수 없었다.

두근.

그토록 오랜 세월 그리워했던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차가운 손끝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닉스.”

아직 그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줄리엣이 투덜거렸다.

“맑?”

“나뭇잎이나 붙이고 다니고."

줄리엣을 따라 비 내린 숲을 신나게 헤매고 다녔는지, 새끼 용은 줄리엣에게 앞발을 붙잡힌 채 혼이 나고 있었다.

"이러면 또 목욕해야 하잖아?”

기분좋게 골골거리던 새끼용은 '목욕' 이란 단어에 기겁했다.

“삑!”

"어쩔 수 없어. 흙발로 돌아다니면 또 혼날 테니까 씻어야지.”

항의하듯 칭얼거리며 바동거리던 새끼 용은 줄리엣의 어깨 너머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꾸륵?”

“시치미 떼도 소용없……. 전하?”

새끼 용이 고개를 길게 빼자 줄리엣도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문가에 선 남자를 발견한 줄리엣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끼 용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후다닥 달아났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일어나도 괜찮은 거예요?"

고아한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고, 줄리엣이 그에게 미소 지었다.

한때,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줄리엣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열은 다 내렸어요? 약은.."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줄리엣을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레녹스……?”

“잠시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줘.”

줄리엣은 당황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단차가 있었기 때문에 줄리엣은 그보다 몇 계단 위에 올라와 있었다.

엉겁결에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를 끌어안게 된 줄리엣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남자를 조금 어색하게 토닥여 주었다.

“얘기해 줘."

“무… 무슨 얘기요?”

"아무거나. 네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음…… 어릴 때요, 자주 감기에 걸렸는데 저는 아프면 내심 좋아했어요.”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프면 엄마 아빠 방에 가서 두 분 침대를 차지하고 실컷 어리광 부렸거든요. 아빠가 밤새책을 읽어 주고, 엄마가 안아 주고…….”

레녹스는 어렵지 않게 그 풍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철이 없었죠. 그런데 전하가 나흘 내내 잠들어 있는 걸 보니까, 그때 생각이 났어요.”

레녹스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줄리엣이 그를 보곤 활짝 웃어 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웃는 얼굴이 아플 만큼 눈부셨다.

레녹스는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줄리엣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어 놓고도, 그는 과거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시간을 거슬러 오는 대가로 빼앗긴 것은 줄리엣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었다.

(네게서 빼앗은 부분만큼은 세상 어딘가의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지게 되는 거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인과율의 불가해한 작용으로 대신 과거의 기억을 갖게 된 것은 줄리엣이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다.

그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그녀에 대한 감정도, 자신이 저지른 일도 망각했다.

“레녹……?"

줄리엣은 당황한 듯 그의 뺨을 감쌌다.

“지금, 울어요?”

그걸 바로잡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그들은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레녹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뿐이었다.

“...... 미안해."

“뭐가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

북부 공작성에는 전례 없이 평화로운 상태가 이어졌다.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칼라일 공작이라면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남을 거라고 믿던 가신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당사자인 칼라일 공작과 줄리엣은 평화로운 늦여름을 보냈다.

오늘 저녁의 티 파티만 해도 그렇다. 줄리엣은 커다란 흑단목마차를 끌고 마중 나온 레녹스를 보고 더 이상 놀라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1년 내내 사교계에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공작이..…..'

'무슨 유난이람?'

'게다가 상대는 '그' 줄리엣 모나드잖아?'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레녹스는 지난 몇 개월간 그녀의 발이 땅에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줄리엣 역시 의아했지만 줄리엣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북부 귀족들을 조심하라고 한건 전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정작 전하께서 이목을 신경 쓰지 않으시면 괜한 헛소문이 돌지 않을까요?”

줄리엣은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이미 별별 말이 돌고 있었다.

줄리엣은 레녹스가 다른 귀족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건조금 신경 쓰였다.

마차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녹스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신경 쓰여?”

“.....… 조금?”

“널 두고 뭐라고 떠들면 혀를 자르면 그만이지."

"아니, 제가 아니라 …….”

줄리엣은 조금 머뭇거리다 냉철하게 지적했다.

“전하를 두고 치마폭에 싸여 이 성을 잃었다는 둥, 여자에 눈이 멀어 남자 망신을 시킨다는 둥그런 소문이 돌잖아요."

그러나 레녹스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떠들라고 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위를 자르면 그만이니까.”

줄리엣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말 한마디로 북부 귀족가의 남편들을 죄다 적으로 만들었단 걸이 남자는 알까?

마차는 이윽고 공작가의 입구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정원을 힐끔 거리는 줄리엣을 보고 레녹스가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성까지 잠시 걸을까.”

“좋아요.”

레녹스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마차를 먼저 성으로 돌려보냈다.

“걷기 좋은 날씨잖아."

단순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뭐 아무래도 그녀는 좋았다.

늦여름 밤의 향취는 사람을 들뜨게 했다. 좋아하는 꽃이 만발한 정원을 걷는 것은 기분 좋았다.

“그런데 웬 백합이에요?”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원의 반절 정도가 흰 꽃이었는 데, 그 많은 꽃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흰 백합 군락이었다.

구근의 상태나 흙이 정갈한 걸 보면 최근에 정원을 갈아엎고 옮겨 심은 듯했다.

줄리엣은 별생각 없이 물었지만 레녹스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그랬잖아. 아이가 태어나면 릴리라고 짓고 싶었다고."

줄리엣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줄리엣이 남들에게는 말한 적 없는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내가 그걸 말했어요? 언제?"

“아주 예전에, 네가 그렇게 말했어.”

그러나 레녹스는 알 듯 모를 듯한 대답만 내놓았다.

뭐지?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점점 더 모를 일이 되었다.

“여긴……."

그녀는 문득 정원 한가운데에 설치된 반짝이는 조형물들을 발견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반 발짝 뒤에 따라오던 레녹스는 느긋하게 그런 소리나 했지만 줄리엣은 순간 경악했다.

한밤중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나무들과 동물 모양 조형물들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건 설마.

줄리엣은 멈칫했다. 짚이는 데가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그러니까 한 예닐곱 살 무렵의 줄리엣은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은 줄리엣이 언젠가 친구인 샬롯에게 별생각 없이 보여 줬던 어린 시절의 유치한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화려한 공주풍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들이 마법의 숲에 사는 그림이었다.

“.....… 봤어요?" ”

“응.”

줄리엣은 양 뺨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지난 며칠간 레녹스가 뭘 하느라 비밀스럽게 바빴는지 알 것 같았다.

수도 백작저에 사람을 보내서 그녀의 어린 시절 그림을 구해온 모양이었다.

“잘 그렸던데.”

그는 씩 웃으며 보존 마법이 걸린 그림을 건네주었다.

줄리엣은 신음하며 그림을 받아들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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