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털썩.
속절없이 무릎이 꺾였다.
시체를 노리는 갈가마귀 울음소리가 불길하게 어른거렸다. 황폐한 전쟁터에 살아 있는 인간이라곤 검은 머리칼의 남자 하나뿐이다.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검 한 자루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남자의 턱을 따라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제는 통증은커녕 팔다리의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이만하면 된 것 같네.]
그의 앞에 매끈한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 쓴 뱀이 나타났다.
뱀은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레녹스 칼라일을 보곤 흡족한 듯 킬킬거렸다.
[이 정도면 문을 열 수 있겠어.]
[......]
세상의 종말은 생각보다 무미건 조했다.
그날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레녹스 칼라일은 알지 못했다.
점점이 흩뿌려지던 핏방울. 붉 붉게 물든 흰 드레스와 파리한 여자의 낯빛.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던 그 온기와 피부의 감촉만이 생생했다.
그의 시간은 영원히 그 때에 멈춰 있었다.
줄리엣이 죽은 그날 이후로 그는 나이를 세지도, 날짜를 헤아리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터무니없는 사치였다.
자신의 의지는 없이 그는 닥치는 대로 전쟁터를 떠돌았다. 그의 정신이 피폐해질수록 뱀은 즐거워했다. 그야말로 악령에 홀린 꼴이었다.
[이런, 계약자가 다 죽어 가는데네 보호자인 그 짐승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뱀이 이죽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마지못한 표정의 커다란 검은 표범의 형상이 나타났다.
(……누가 누굴 보고 짐승이라는 거냐, 저속한 뱀.)
뱀을 노려보는 검은 표범은 아티팩트인 칠흑의 검에 종속된 악마였다. 그리고 나타난 검은 표범의 뒤로 신기루처럼 웅장한 문이 하나 서 있었다.
레녹스는 거대한 문의 가장자리가 불길한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것은 '시간의 문'이다.
레녹스 칼라일이 소유한 검의 악령. 그와 계약한 검은 표범에게 죽은 여자를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귀띔한 것은 저 간악한 뱀이었다.
시간을 지배하는 문을 통해서.
악령들은 인간의 고통과 부정적인 감정을 먹이로 삼지만, 저 웅장한 문을 움직이는 동력은 거대한 혼돈뿐이라고 했다.
툭하면 인간을 기만하고 속이기는 악령들이지만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엄밀히 말하면 그 여자가 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거야.)
억지로 소환해 사실인지를 묻자 검은 표범은 마지못해 시인했다.
(하지만 문을 열려면 거대한 혼돈과 재앙이 필요해.)
(그리고 그건 너 같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대가가 아니지.)
하지만 레녹스 칼라일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죽지 않은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살아 움직이는 줄리엣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세상에 종말을 가져왔다.
그는 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혼돈을 만들어 냈다. 그 자신을 포함해 세상을 망가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남은 것은 검은 표범이 저 문을 열어 주는 것뿐이었다.
탐욕스러운 보랏빛 눈을 번뜩이며 뱀이 재촉했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어서 열어!]
(.......)
그러나 거대한 문은 가장자리만 빛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안 열려?]
뱀의 매끈한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석상처럼 고고한 표정의 검은 짐승이 말했다.
(이걸론 부족해.)
[뭐?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시간을 되돌리는 건 인과율을 거스르는 일이다.)
경멸 어린 눈으로 뱀을 노려보던 검은 표범이 엄하게 꾸짖듯 말했다.
이어서 검은 표범의 연녹색 눈이 레녹스 칼라일을 향했다.
(계약자, 너는 네가 가진 가장 값진 걸 내놓아야 해.)
[……하.]
콜록.
레녹스는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실소를 터뜨리기 전에 망가진 폐에서 밭은기침이 먼저 튀어나왔다. 몸에 온전한 장기가 하나도 없었다.
'가장 값진 것이라고?'
그는 겨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웃기는 소리.
대체 여기서 뭘 더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던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그가 미친 순간부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빛났던 여자는…….
[......]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망각해 버렸지만 그녀의 몸짓 하나, 표정 하나하나만큼은 또렷이 기억했다.
레녹스 칼라일이 가진 것 중 가치 있는 것은 모두 그녀와 관련있는 것뿐이었다.
줄리엣이 가르친 감정은 낯설었지만, 그는 이제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
너무 늦게 깨달았고, 그는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망쳐 버렸지만.
자신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매 순간 줄리엣을 되새겼다.
환히 웃으며 돌아보던 여자의 모습만큼은 잊지 않으려 애썼다.
[마음대로 해.]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더 가져갈 게 남아 있다면 말이야.]
그는 차갑게 비웃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남은 것은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몸과 악령 들린 검 한 자루뿐이었다.
[뭐, 눈이라도 뽑아 가든지.]
망가진 몸에서 그나마 멀쩡한 부분이라곤 눈 정도였다. 그마저도 멎지 않는 출혈 때문에 시야가 자꾸만 흐릿해졌다.
[그냥 저 녀석의 목숨을 받아가면 되잖아?]
불쑥 끼어든 뱀이 성급히 눈을 빛냈다.
[시시하게 눈 같은 거 말고, 그렇지, 저 녀석 심장이라든지?]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검은 표범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레녹스는 그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럼 누가 결정하는데?
(네게서 뭘 대가로 받을지는 인과율이 결정할 거다.)
[…… 인과율?]
(그래. 과거로 돌아갔을 때, 너는 현재 네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걸 잃은 상태일 거야.)
검은 표범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시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축복이나 재능일 수도 있다.
(네게서 빼앗은 부분만큼은 세상 어딘가의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지게 된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것 참 더럽게 까다롭군.]
레녹스는 웃지도 않고 빈정거렸다. 점차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뭘 뺏어 가든 관심 없으니까, 문이나 열어.]
[그래, 서두르라고!]
광기로 눈을 빛내며 뱀이 거들었다.
검은 표범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눈을 떴을 때 정확히 어느 시간대로 돌아가 있을지는 모른다. 수년 전이 될지, 혹은 수십년 전이 될지.)
쿠구궁.
검은 표범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표범의 등에서 눈부신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그리고 도통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틈새로 눈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구나, 계약자야.)
검은 표범은 끝내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레녹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눈부신 빛줄기가 그의 몸을 포함해 주변의 풍경을 조금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몹시 지쳐 있던 레녹스는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녀가 죽기 이전의 세상이겠지.
[......]
잠시 후면 만날 수 있다.
몸을 감싸는 따스한 빛줄기와 기대감으로 심장이 뛰었다.
얼마나 먼 과거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그는 아직 부모님을 잃지 않은 시기의 줄리엣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다면 줄리엣이 양친을 잃고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바꿀 수 있겠지.'
성공한다면 줄리엣은 애정에 굶주리고 갈 곳 없는 처지가 되는 대신 자존감 높은 우아한 아가씨로 자랄 것이다. 그러면 줄리엣은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가 제게 반한 이유는 기댈데 없고 애정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니까.
쿠르릉.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웅웅거리던 진동과 눈부신 빛은 이제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기세였다.
(행운을 빌지)
검은 표범이 몸을 휙 돌렸다.
따스한 빛이 완전히 그의 몸을 감싸고, 검은 표범과 뱀 악령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풍경이 문안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레녹스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광경은 줄리엣이 저를 보고 웃던 모습이었다.
레녹스는 천천히 곱씹었다.
다시 만난 줄리엣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온 것은 오직 그 뿐이니까.
행복하게 자란 줄리엣은 그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훨씬 제대로 된 남자를 고르겠지.
[......]
그래도 상관없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살아 움직이는 줄리엣을 한 번이라도 눈에 담는 것.
다시 줄리엣을 볼 수 있다면 대가로 뭘 내놓아도 좋았다.
'아.’
의식을 잃기 직전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려면 뺏기는 게 눈이 아니면 좋겠는데…….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