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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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알려 줄까?]
보관에 갇히기 직전, 뱀 악령은 그런 말을 지껄였다.
[저주 탓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 여자가 불행해진 건 저주가 아니라 너 때문이야.]
[네 부모와 핏줄들이 그랬듯, 결국 그 여자도 너를 증오하게 될 거야.]
[어린 칼라일아, 너는 결코 행복 해질 수 없을거다.]
저주를 지껄이던 뱀은 생각보다 싱겁게 봉인되었다.
지난 수백 년간 그랬던 것처럼 결국 동쪽 탑에 갇혔다. 최소한 그는 그렇게 믿었다.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레녹스는 그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너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다.
[전하, 탄일을 감축드립니다.]
생일이라고 해 봐야 그에게는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기억이 없고, 가문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한가하게 생일 따위를 챙일 형편이 아니었다.
생각 없이 독한 술을 연신 들이켰지만 의식은 좀처럼 흐려지지 않았다.
[저, 전하…….]
시시한 연회가 얼마쯤 흘렀을까, 만취해 킬킬거리는 하객들이 슬슬 눈에 띌 무렵이었다. 갑자기 당황한 얼굴을 한 밀란 경이 달려왔다.
그러나 달려온 밀란 경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연회장 입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이봐, 저기 좀 보세.]
끼이이.
한참 늦은 시간에 사뿐사뿐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온 여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단숨에 연회장 안이 조용해졌다.
레녹스는 잠시 아연해졌다.
고정시킨 옅은 색의 머리칼과 섬우아하게 틀어 올려 은 핀으로 세한 이목구비는 틀림없는 줄리 엣이었다.
돌연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 나타난 여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베일만 없다뿐이지 그가 몇 번이고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혹시 저 여자가…….]
[그, 미쳤다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않고 연회장으로 들어선 줄리엣은 생긋 웃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제야 레녹스는 생기 넘치는 줄리엣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해 냈다.
[공작 전하.]
이후 연회 내내 옆에서 누가 뭐라고 말을 걸든 그는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오직 줄리엣을 향해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이제 다시 용서를 구해도 되는건지. 묻고 싶은 게 수천가지였다.
하지만 연회장에 들어온 이래, 줄리엣은 그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줄리엣 모나드예요.]
그녀는 대신 호기심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상냥히 웃어 주었다.
그가 노려보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줄리엣은 춤을 권해 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도 않았다.
간사한 하객들은 비밀스러운 소문에 둘러싸인 미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전하께서 꼭꼭 숨기고 보여 주지 않으시더니, 이런 미인을 독점하고 계셨군요?]
칼라일 공작은 말없이 독주를 비울 뿐 줄리엣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하객들은 상당수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겁을 상실하고 그녀에게 추파와 질문을 던질 만큼.
[실례지만 모나드 양, 공작 전하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알고 계시는 대로예요.]
줄리엣은 부드럽고 세련된 화법으로 둘러댔다.
[전하께서 저를 남부에서 구해 주셨고, 자비롭게도 손님 신분으로 성에 머물기를 허락해 주셨어요.]
[아아, 역시 그렇군요.]
[과연 자비로우십니다!]
……손님?
레녹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기가 차지도 않았다.
[세상에, 저 흉터 좀 보세요.]
[공작과의 관계가 끝날 것 같으니, 다음 상대를 물색하는 모양이죠?]
앞에서는 줄리엣에게 아부를 늘어놓는 주제에, 무례한 하객들은 뒤에서는 줄리엣을 헐뜯었다.
함부로 수군거리는 것들의 혀를 자르고, 그녀를 힐끔거리는 것들의 눈을 뽑고 싶었지만 레녹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하지만 그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줄리엣이었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나비처럼 우아하게 춤추고 해사하게 웃었다.
제발, 그렇게 웃지 마.
돌연 속이 뒤틀렸다. 그녀가 제발로 걸어 나와 모습을 보여준 것을 감사히 여기진 못할망정.
순간 뱀의 속살거림이 떠올랐다.
[그 여자를 불행하게 만든 건 전부 네 탓이란다.]
[너희가 사랑하는 것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모두 너희 칼라일 놈들의 천성이라고.]
줄리엣 모나드는 운이 나빴다.
운 없이 그에게 붙들리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순탄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밝게 웃는 줄리엣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줄리엣은 훨씬 행복했을 거라고, 그럭저럭 선량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아이를 잃는 일도 없이.
[아, 모나드 양께서 축사를 하시면 어떻습니까?]
생글생글 웃던 줄리엣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축사?]
무슨 바람이 불어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는 이 연회가 무슨 자리인지도 모르고 온 게 분명했다.
[축사라는 건 적당히 축하의 말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온 걸까.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벌을 주려고?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레녹스는 어느새 줄리엣의 표정을 읽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줄리엣의 저런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미소를 보았을 때, 그녀는 아이를 가졌으니 그를 떠나겠다고 말했었다.
돌연 불길한 직감에 그의 눈이 흐려졌다.
설마, 이번에도 떠나겠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전하, 잔을.]
[......]
주변의 권유에 그는 마지못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적당한 은잔을 줄리엣에게 건네주었다.
언제부터 그 잔이 거기에 있었는지, 안에 든 게 술이 맞는지.
그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서.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그들은 이미 뱀의 간계에 빠져있던 것이다.
줄리엣이 그의 눈을 똑바로 본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녀는 가면 같은 미소를 지었다.
[......]
그런데 그에게서 은잔을 받아 든 줄리엣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술잔에 담긴 것을 보고 잠시 놀란 듯 했다.
줄리엣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레녹스는 단정한 얼굴이 희게 질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마주친 시선이 흔들렸다. 푸른 눈이 놀람과 절망, 체념으로 점차 짙게 가라앉는데도.
어리석은 남자는 그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알지 못했다.
[모나드 양?]
[아.]
줄리엣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 감사했어요, 전하.]
[….]
의미 모를 인사와 함께, 줄리엣이 실로 오랜만에 그를 보고 눈부실 만큼 환히 웃어 주었다.
어쩐지 불길한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줄리엣이 저걸 마시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어떤 직감이….
그러나 그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팔을 뻗는 것보다 줄리엣이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더 빨랐다.
?
탕.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은잔이 떨어졌다.
줄리엣의 몸이 휘청이면서 긴 머리칼이 풀썩였다. 그는 인지하기도 전에 뛰쳐나가 그녀를 끌어 안고 있었다.
[…… 줄리엣?]
콜록. 품 안에 안긴 줄리엣이 밭은기침을 토해 냈다. 동시에 웨딩드레스 같던 흰 치맛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이게 뭘까.
초점 잃은 그의 눈이 흔들렸다.
점점이 흩뿌려진 핏방울이 마른 꽃잎처럼 보였다.
고통스러운 듯 피를 토해 낸 줄리엣이 몸을 뒤척였다. 덜덜 떨면서 그의 옷깃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떨렸다.
붉게 칠한 입술이 뭐라 말할 듯 달싹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줄리 엣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줄리엣……?]
아둔한 남자는 더듬더듬 뺨을 감싸 쥐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았다.
[……아아악!]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객들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도, 독살이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출입구를 봉쇄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술잔을 던지고 도망치려 하고, 의사들이 달려왔지만 이미 호흡이 멎은 뒤였다.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손에서 줄리엣을 떼어놓지 못했다.
초점 잃은 그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발견했다.
붉은 포도주가 담겨있던 은잔안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영민한 여자가 검게 변한 술잔이 뭘 뜻하는지 몰랐을 리 없다.
[…… 아니지?]
아니어야 했다.
그는 망연히 그 자리에서 줄리 엣을 끌어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숨이 막혔다. 줄리엣이 고약한 장난을 친 게 분명하다.
그를 벌주려고, 그에게 가장 끔찍한 벌이 그녀를 잃는 거란 걸 모를 리 없으니까.
줄리엣이 독이 든 걸 알면서도 그 잔을 마셨을 리 없다. 설마하니 그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택했을 리가…….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 한가운데, 그는 오래오래 줄리엣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대리석 바닥 위에서 넋을 놓고 있던 그의 눈앞에 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여자를 살리고 싶지?]
쉿쉿거리는 듯한 말투로 뱀이 속삭였다.
초점 잃은 눈으로 레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봉인되었을 뱀이 무슨 수로 버젓이 돌아다니는지 그는 의아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꺼져.]
레녹스는 짓씹듯 내뱉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갇혀 있어야 할 뱀은 쇠약해 보이긴 했으나 멀쩡히 나와 있었다.
사막이 비에 젖듯, 그는 깨달았다.
줄리엣이 그에게서 달아나려 한 것도, 그녀가 아이를 잃은 것도, 그녀가 죽게 된 것도, 모두 저 뱀에게 놀아난 것이다.
그리고 저 뱀을 이곳으로 직접 끌고온 것은 다름아닌 그였다.
[그 인간 계집을 살리고 싶을텐데? 응?]
뱀이 킬킬거렸다.
레녹스는 핏발선 눈으로 뱀을 노려보았다. 만약 이 뱀이 줄리 엣을 되살릴 능력이 있었다면 그는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뱀은 그런 능력 따위없었다.
[그래, 맞아. 나는 못 하지. 대신 어떻게 하면 그 여자를 살릴 수 있는지는 알아.]
뱀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너는 나를 못 죽여. 그래, 고작해야 가둘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죽은 여자가 돌아오겠어?]
뱀은 스르륵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말했지만, 선택은 언제나 너희 인간들의 몫이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는 것은 제발로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살릴 수, 있다고?]
하지만 연인을 잃은 남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