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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24화 (221/229)

224화.

*

북부 공작성에 밤마다 우는 여자의 유령이 나온다.

그런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끔찍한 낙마 사고가 있은 지 한 달쯤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바스락. 달도 없는 밤에 중얼거리며 성의 곳곳을 배회하는 것은 선이 가는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어디 갔지…… 어떡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램프도 없이 헤매는 여자는 울먹이고 있었다.

맨발로 회랑을 돌아다니다가, 계단을 지나 정원으로, 불안한 모습으로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그녀는 꼭 뭔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남자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밟았다.

[줄리엣.]

조심스레 다가간 남자는 흐느끼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레녹……?]

풀숲에 주저앉아 가시덤불 안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흠칫 소스라쳤다.

갓 침대에서 빠져나온 듯 잠옷차림의 줄리엣이었다.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맨발은 상처투성이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잠옷도 엉망이었다.

[어떡해요, 전하…….]

줄리엣이 울먹이며 그에게 와락매달렸다. 제대로 울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하염없이 눈물만 떨구면서.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조곤조곤 말로 그의 속을 난도질하고, 그를 완강히 밀어내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괜히 욕심을 부려서….….]

잠에 취한 몽롱한 푸른 눈, 눈물로 엉망이 된 줄리엣의 흰 얼굴은 연약하고 가련했다.

하지만 연약하고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줄리엣이었다.

[…… 잃어버렸나 봐, 우리 아기.]

[......]

레녹스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야윈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줄리엣은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그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어느 날부터 줄리엣은 밤마다.

있지도 않은 아이를 울며 찾아다.

니기 시작했다.

[일종의 몽유병입니다.]

아이를 잃은 일시적인 충격일거라고 의사들은 입을 모아 조언했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잠에서 깬줄리엣은 자신이 헤매고 다녔다.

는 것도, 그를 만났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떡해, 나 때문에……. 못 찾으면…….]

[괜찮아.]

레녹스는 울먹이는 줄리엣을 침착하게 다독여 안아 들었다. 감정이 다 타서 까맣게 죽은 자리에는 뭐가 남을까.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그였다.

[너는 그냥 나쁜 꿈을 꾼 거야.]

[꿈…?]

몽롱한 눈을 깜빡이던 줄리엣이 그에게 물었다.

[그럼, 찾아 주실 거예요?]

[그래.]

줄리엣은 그제야 안도했다.

레녹스는 줄리엣을 끈기 있게 어르고 달래 침실로 데려왔다.

어차피 그녀는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그는 묵묵히 줄리엣의 시중을 들었다.

그는 익숙한 손길로 나뭇가지에 긁히고 쓸린 상처에 약을 발랐다. 붕대를 새로 감고, 잠옷을 갈아입히고 간신히 줄리엣을 잠자리에 눕혔다.

그러고 나면 어스름히 동이 밝아 올 무렵이 되었다. 그는 지쳐서 잠든 여자의 이마에 입 맞추며 되뇌었다.

[……괜찮아.]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줄리엣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초점없이 흐리고 냉랭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그는 그래도 괜찮았다.

줄리엣이 그를 밀어내고 원망과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 시간이 유일했다.

[……네가 더는 날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는 잠든 여자의 마른 몸을 끌어안고 성마르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줄리엣이 환하게 웃는 걸 본 게 언제인지, 눈을 빛내며 나붓이 안겨 오던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물기가 마른 풍성한 연갈색 머리칼에서는 그의 것과 같은 백단향 향기가 풍겼다.

[비 온 다음 날의 숲 냄새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말갛게 웃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줄리엣은 결국 그를 좋아했다.

정에 약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상관없다.

[처음부터 다시 하면 돼.]

애초에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반해서 목을 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없으면 죽고 싶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지경으로, 줄리엣은…… 단지 애정에 굶주리고 기댈 데가 필요했을 뿐이지만.

그는 얼마든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줄리엣이 텅 빈 방에 오도카니 앉아 며칠이고 기약 없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처음, 그녀가 맹목적으로 애정과 신뢰를 보내며 제게 매달렸던 것처럼.

[내가 그만큼 너를 사랑하면 그만이니까.]

동정이라도 좋았다.

줄리엣의 상처가 아물고, 손톱만큼의 감정이 돋아나기까지 평생이 걸려도 상관없었다. 줄리엣은 여전히 제 곁에 남아 있었고, 그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잃어버린 아이는 언제든 다시 가지면 그만이었다. 불운하게도 잘 생기지도 않는 아이가 덜컥생긴 것만 봐도 그들은 빌어먹게 잘 맞는 한 쌍이었으므로, 한 번 잃어버린 아이를 포함해서, 그는 줄리엣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그들은 결국 행복해질 것이다. 언젠가 줄리엣이 들떠서 재잘거렸던 것처럼 그녀를 닮은 아이를 한둘쯤 쯤.

낳고 그림 같은 가족을 갖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괜찮아.]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잠든 줄리엣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그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다 괜찮아질 거야.

[뭐라고 했지?]

하지만 그의 한심한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담한 표정의 주치의가 어렵게 입을 연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아가씨께서 다시 아이를 갖기는 어려우십니다.]

[킥.]

돌연 웃음을 터뜨린 것은 줄리 엣이었다. 그녀는 즐거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레녹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라도 웃는 걸 봐서 기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다니. 자신은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뭐가 우습지?]

[그렇게 보실 것 없어요.]

……내가 널 어떻게 보는데.

줄리엣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억지로 동정하는 것처럼요. 불쌍해하실 필요 없어요.]

[......]

[그러니, 이제 더는 오지 마세요.]

그리고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영영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그녀에게 레녹스 칼라일은 침실 여기저기 놓인, 손 하나 대지 않은 선물 상자들과 마찬가지였다.

뭐든 해 주겠다고 애원했건만 줄리엣은 조금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는 줄리엣이 자신에게 웃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

그해 북부의 여름은 몹시 쾌청했지만 여름 내내 공작성은 고요했다.

줄리엣은 점점 더 잠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는 일부러 성을 떠나 있는 용건을 만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을 옥죄는 죄책감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주군!]

마중 나온 부관이 웃으며 말고 삐를 받아 주었다.

[늦지 않게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

레녹스는 열없는 시선으로 오랜만에 손님맞이 준비로 바쁜 성안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연회 홀에 불이 켜졌다.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를가로질러, 밀린 보고를 들으며 집무실로 향하는 내내 그의 신경은 오롯이 여자가 머물고 있는 침실 쪽을 향해 있었다.

공작성 전체가 연회 준비로 들떠 있는데 오직 줄리엣이 머무는 남관만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성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레녹스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실에 틀어박혀 지내는 단조로운 일상이었지만.

레녹스는 그녀가 밤마다 성을 배회하다 낯선 인간과 마주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남관에는 항상 통제된 극소수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줄리엣이 돌아다니다 상처 입는 일이 없도록 가시 덩굴을 없애고, 다치기 쉬운 유리나 날카로운 조각을 전부 치우고, 바닥 전체에 푹신한 융단을 깔게 했다.

줄리엣을 둘러싼 공간 전체가 안전하게 격리된 하나의 장난감성 같았다. 그러나 그토록 마음을 쓰는 동안에, 그가 깨어 있는 줄리엣을 만난 횟수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닫힌 방문 앞에서 몇 번이고 서 성였지만 마음을 닫아 버린 여자가 그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해서 오늘 연회만 끝나면 당분간의 일정은 없습니다.]

줄지어 언덕을 올라오는 마차들을 보고 그는 피곤한 눈가를 매만졌다.

오늘의 연회는 몇 안 되는 늦여 름의 연례행사이자, 그의 생일을 겸해 북부의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심하고 성가신 날이었다.

[버러지 같은 것.]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줄리엣이 아이를 잃은 다음에야 레녹스는 평생 자신을 경멸하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반려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줄리엣은.]

[…… 여전하십니다.]

여전히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뜻이었다.

레녹스는 손에 쥔 작은 꾸러미를 만지작거렸다. 안에 든 것은 치유 효과가 있다는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팔찌였다.

하지만 그도 알았다. 줄리엣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은 이깟 빛나는 돌멩이 따위로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한참 창밖을 노려보자 눈치 빠른 부관이 은근슬쩍 물었다.

[가 보시겠습니까?]

[......]

레녹스는 잠시 침묵했다.

고민은 짧았다. 그는 결국 상자를 내려놓았다.

[됐어.]

연회가 끝난 다음에, 언제나처럼 줄리엣이 잠든 다음에 몰래 보러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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