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23화 (220/229)

223화.

*

[독초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미친 듯 날뛰던 두 살배기 말은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다.

이미 독이 온몸에 퍼진 상태라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빨리 죽여주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어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녹스는 고통스러워하는 짐승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한때 줄리엣의 예쁨을 받았던 유순한 말은 잠시 바르작거리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곁에 서 있던 기사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결계를 드나드실 수 있었던 건 배 속의 아기님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피 묻은 단도를 움켜쥐고 있던 레녹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 그는 줄리엣이 어떻게 고위 사제도 뚫기 힘든 동쪽 탑의 결계며 성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었다.

하지만 그들 가문의 첫 아이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줄리엣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그녀를 죽였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배 속의 아이 덕분에 줄리엣은 달아날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허탈할 만큼 간단한 답에 맥이 풀렸다.

[다른 부상은 크지 않습니다.]

날뛰는 말에서 떨어진 것에 비해 줄리엣은 부러진 데도 없고, 찰과상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주치의는 어색하게 그를 위로했다.

[몸이 회복되면 아가씨도 곧 기운을 차리실 거니까요. 이만하면 천만다행입니다.]

다행이라고.

비록 그가 생각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눈엣가시 같던 아이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줄리 엣이 아이를 낳다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걸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성 안 복도를 걷던 그의 걸음이 침실 문 앞에 멈춰 섰다.

달칵.

때마침 침실을 나오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녀의 손에는 손도 대지 않은 정갈한 아침 식사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권해도 안 드세요…….]

변명하듯 쭈뼛거리며 하녀가 문가에서 비켜 주었다.

[......]

넓은 침실을 다 놔두고, 줄리엣은 구석에 오도카니 웅크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다리가 부러진 어린 말과 겹쳐 보였다.

긴 잠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아이를 유산했다는 주치의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줄리엣이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문가에 선 레녹스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은 원하지도 않았잖아! 내 아기였는데…….]

[그것만 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내가 부탁했잖아……!]

[그런데 왜,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해…….]

줄리엣이 원망과 저주를 퍼붓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품안에서 울고 소리를 지르는 줄리 엣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줄리엣은 악을 쓰며 그를 물어 뜯고 할퀴었지만, 결국은 탈진해서 그에게 안긴 채 축 늘어졌다.

[하필이면 왜,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했을까…….]

그날 이후로 줄리엣은 노골적으로 그를 귀찮아했다.

그럴수록 레녹스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는 어떻게든 줄리엣에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줄리엣.]

줄리엣은 고개를 돌리기도 귀찮다는 듯 내리깐 시선만 조금 움직였다.

그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은 줄리엣이 좋아한다던 푸른색 색 수레국화였다.

[……네가 좋아하던 꽃이잖아.]

겨우내 온실을 돌아다니며 그에게 들꽃 이름 따위를 가르친 것은 줄리엣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꽃송이를 툭 하고 꺾었다.

그러더니 가벼운 한숨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 필요 없어요.]

[뭐가.]

[이러실 필요 없다고요.]

고개를 든 줄리엣은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가 익숙했던 그녀의 미소와는 아주 달랐다.

[굳이 미안해하는 척, 신경 쓰이는 척하지 마세요.]

신경 쓰이는 척?

[저는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전하에 대해서는 이제 조금 알아요.]

[......]

[전하는 사람을 쉽게 쓰고 버리시죠. 그런데 제가 눈치 없이 아이를 가져 버린 거고.]

줄리엣이 우아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창백하고 그늘진 얼굴에 에아주 낯선 표정이 떠올랐다. 비웃음이었다.

[싫증 난 장난감에 억지로 관심 있는 척하실 필요 없단 거예요.]

숨이 꽉 막혔다. 동시에 어쩐지 제 꼴이 우스워졌다.

그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고 천박한 인간이었는지 기억해 냈다.

[…… 넌 아무것도 몰라.]

그는 메마르게 웃었다.

그는 헤어진 연인이 목숨을 끊겠다고 협박한들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 인간이었다.

아마 줄리엣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그녀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가증을 떨었는지.

[전하는 상냥한 분이세요.]

줄리엣은 단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겠지만, 그는 그 한마디 때문에 정말로 괜찮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다.

생전 해 본 적 없는 다정한 연인 흉내를 내려고 그는 무척이나 애를 썼다.

매번 줄리엣의 표정을 살피는 습관도, 그녀가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항상 겉옷을 챙겨야 한다는 것도, 보폭을 맞춰 걷는 행동도, 모두 그녀가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행여 줄리엣이 제 본성을 알아챌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그러니까 괜히 미안해하는 척, 동정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마음을 얻고자 했던 여자는 조용히, 그러나 완강히 그를 밀어냈다.

[더는 전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저도 마찬가지니까.]

쿠르릉.

불현듯 잠에서 깬 남자는 아직 열에 취해 있었다. 잠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무척이나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오래 잠들었다 깨어난 것 치고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눈에 익은 풍경과 함께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북부 공작성의 낯익은 침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벽난로가 타오르고, 창밖에는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툭하고 물수건이 떨어졌다.

아, 그랬지.

수도에서 돌아온 직후, 열병에 걸려 약을 먹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느슨한 실내용 가운이 벌어져 드러난 가슴팍에는 진홍열의 증상인 붉은 열꽃이 반쯤 남아 있었다.

무심코 물 잔으로 입술을 축이던 그는 침대에 기대 잠든 여자를 발견했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칼, 살짝 벌어진 입술과 생기 넘치는 흰 뺨.

줄리엣?

아무래도 잠든 그를 살피러 왔다가 덩달아 잠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그를 안도하게 했다. 줄리엣은 천둥과 번개라면 질색하니까, 차라리 잠든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불편한 자세로 잠든 게 신경이 쓰여 제대로 눕혀 주려고 줄리엣의 팔을 움켜쥔 순간, 그는 흠칫 얼어붙었다.

뒤죽박죽된 끔찍한 이미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피로 엉망이 된 치맛자락. 붉게 물든 시트와 축 늘어진 여자.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자신이 뭘 하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그는 다급히 잠든 줄리엣을 끌어안고 있었다.

줄리엣의 팔목은 그의 기억과는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 했었는지 어렴풋이 떠올렸다.

“삐약!”

순간 침대 아래에서 까만 뭔가가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

늘 줄리엣을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용이었다. 덕분에 끔찍한 잔상에서 깨어난 레녹스는 잠시 어린 용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린 그가 줄리엣을 침대 위에 눕히는 내내 새끼용은 앙증맞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릉거렸다.

"조용히 해.”

"..…꾸륵.”

조그만 주제에 제법 사나웠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오닉스는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줄리엣의 발치로 이동했다.

용은 나쁜 꿈을 먹어 치운다더니, 줄리엣 한정인 모양이었다.

똑똑. 문밖에서 누군가 작게 노크했다.

“들어와."

“아, 전하. 일어나셨군요.”

약이 든 쟁반을 들고 온 것은 주치의였다. 주치의는 어쩐지 몹시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레녹스는 침대 위에서 깊이 잠든 줄리엣을 깨우고 싶지 않아 그녀를 힐끔거렸다.

“옆방으로 가지.”

그들은 침실과 연결된 작은 서재로 장소를 옮겼다.

조심스레 서재 문을 닫고 뒤따라온 주치의가 그의 몸 상태를 물었다.

레녹스는 문득 물었다.

“..… 내가 얼마나 잤지?"

“사흘쯤 됐습니다.”

레녹스는 주치의가 ‘길어야 사흘'이라고 했던 걸 기억했다.

“그럼 이제 누워 있는 건 그만 둬도 되겠군.”

"아, 안 됩니다. 아직 열꽃도 남아 있고, 열이 완전히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안정하셔야 합니다.”

펄쩍 뛰며 주치의가 약이 든 차를 건넸다. 그는 약을 마시는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열을 내리는 약이지만 마시기만 하면 잠이 미친 듯 쏟아졌다.

"따로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약의 부작용 중에 환각을 본다든지, 이상한 꿈을 꾼다든지하는 것도 있나?"

주치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아니.”

어쩐지 그걸 악몽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보다는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엿봤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진홍열은 몸속의 마력이 충돌해서 열이 나는 겁니다. 환각을 보는 사례를 들어 보긴 했습니다.”

"......"

“앞으로 하루 이틀은 더 쉬셔야 합니다. 완전히 열이 내릴 때까지요.”

만족스러운 설명은 아니었다.

그가 본 건 악몽도 시시한 환각도 아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멀쩡해.”

몰려오는 수마와 두통에 혼란스러워하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태껏 그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시간을 되돌린 거였어.”

줄리엣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가 대가를 바쳐서 시간을 되돌렸더라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레녹스 자신 뿐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깨끗이 잊었고, 그에 의문을 품었다.

줄리엣은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존재였다. 레녹스는 자신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줄리엣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엿본 과거에서 그는 줄리엣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기억을 포기한 건 내 의지였나.'

줄리엣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차라리 모든 기억을 잊기를 선택한 건 아닐까?

레녹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인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잊혀진 줄리엣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