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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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단정하던 옅은 색 머리칼과 풍성한 치맛자락이 마구 나부끼고 있었다.
겁에 질린 줄리엣을 보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그럴 리 없지.
그렇게 애착 깊던 아이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언제는 도망칠 거라고 의심했어야 했는데,
[줄리엣…!]
이를 사리물고 그녀의 뒤를 쫓던 레녹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푸르륵!
줄리엣을 태운 말은 그가 선물한 두 살배기 말이었다. 튼튼하고 유순한 종으로, 공들여 고른 종이었건만.
어쩐지 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를 태운 말은 입에 거품을 문 채, 이상하리만치 미친 속도로 날뛰고 있었다.
줄리엣은 말을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안장에 겨우 매달려 있는 것에 가까웠다.
힘이 넘치는 미친 말은 등에 탄 그녀를 떨어뜨리려고 하듯 마구 날뛰었다.
줄리엣은 고삐를 움켜쥔 채 말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게 고작이었다.
빌어먹을.
레녹스는 잠시 등에 맨 화살통을 떠올렸지만 저 미친 말이 어떻게 날뛸지 몰라 섣불리 말을 쏠 수도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레녹스는 신중하게 그녀의 말을 따라잡았다.
어린 말은 미친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으나 직선으로 뛰는 대신 지그재그로 달리고 있는 덕분에 따라잡기는 수월했다.
[젠장, 고삐를 놔!]
묘기에 가깝지만 그는 줄리엣을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놓으라니까!]
와 간신히 매달려 있는 미친 말 그러나 줄리엣은 손을 내민 그의 갈기를 번갈아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 울먹였다.
[제발…….]
내밀어진 그의 손길을 향해 팔을 뻗는 대신, 그녀는 몸을 낮추고 날뛰는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싫…….]
[......]
창백하게 질린 줄리엣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지는 걸 보자 가슴 언저리가 싸늘해졌다.
그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다.
기어코 제 품에 안기는 것보다 미친 말에 매달려 목숨을 위협받는 걸 선택하겠다. 이건가.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싸늘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좀먹었다.
마구 내달리는 줄리엣의 말과는 달리, 잘 훈련된 검은 군마는 직선으로 효율적으로 달렸다. 영리한 말은 주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쫓아오느라 많이 지쳐 있었지만, 검은 말은 노련하게 미친 말을 길 밖으로 몰아붙였다.
히히힝!
줄리엣을 태운 어린 말은 경로를 이탈해 가장자리를 내몰리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뒤이어 둔탁하게 몸을 부딪쳐 오는 검은 말의 충격에 균형을 잃고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친 말의 다리가 꺾이고, 말의 등에 매달려 있던 줄리엣의 겁먹은 푸른 눈이 크게 뜨인 것은 아주 찰나였다.
다음 순간 벌어진 모든 일련의 동작이 느린 그림처럼 레녹스의 망막에 새겨졌다.
몸이 붕 뜨는 순간, 줄리엣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다급히 몸을 날렸지만 그의 손끝은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칼을 간신히 스쳤을 뿐이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줄리엣이 땅 위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줄리엣!]
그는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단번에 말을 멈추고 뛰어내렸다.
흙바닥 위에 쓰러진 줄리엣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공작 전하……!]
뒤쪽에서 그들을 뒤쫓아 오는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사정이 아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의식을 잃은 줄리엣의 창백한 뺨을 감쌌다.
숨을 쉬지 않았다.
[줄리엣……?]
아냐, 아니지.
이럴 리가 없는데.
육안으로 보기에 줄리엣은 어디한 군데 팔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지도, 큰 출혈이 있지도 않았다.
[미안해. 줄리엣, 응? 내가, 내가 전부-.]
그는 자신이 뭘 빌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말을 주워섬기며 애원했다.
[-사과할테니까, 이번 한 번만…….]
혹여 뼈가 부러졌다면 섣불리 움직이는 게 더 위험했다. 그는 몸에 익은 대로 그녀의 옷 여밈부터 끌렀다.
하지만 흉부를 압박하는 상의를 벗겨내도, 숨은 왜 쉬지 않는데
[……콜록.]
그 순간, 새하얗게 질려 있던 줄리엣이 밭은기침을 토해 냈다.
호흡이 돌아오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기적처럼 뜨였다.
[레녹스……?]
살아 있다.
그는 의식이 돌아온 줄리엣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맥박이 뛰고, 따뜻한 피가 돌고, 어디가 얼마나 다쳤건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깊이 감사했다.
[제가, 왜…….]
줄리엣은 아직 상황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말하지 말고 있어. 우선 돌아가서 주치의부터 -.]
[아.]
그는 조심스레 줄리엣을 안아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줄리엣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요.]
[아프다니, 어디가?]
창백하게 질린 줄리엣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아까부터 배가 ……….]
[......]
[전하?]
그녀를 안아 들던 그는 멈칫했다.
줄리엣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는 똑똑히 보았다.
[왜요?]
치맛자락에 점점이 출혈의 흔적이 번지고 있었다.
* * *
달려온 사람들이 그에게서 줄리 엣을 빼앗아갔다.
[서두르게!]
[이쪽, 이쪽으로 눕히세요!]
[산파는 뭐하고 있나!]
[지금 도착했습니다!]
하녀들은 다급히 줄리엣을 침상에 눕히고 더운 물과 깨끗한 시트를 날랐다.
주치의며산파며, 한쪽에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약물을 끓여 대고 뭔가를 소독했다.
아수라장이었다.
[아가씨!]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이 지긋한 산파들은 무섭게 줄리엣을 다그쳤다.
[흐윽…….]
고통 때문인지 겁에 질려서인지 울먹이는 줄리엣은 창백한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찬물을 뿌리고 부채질을 하고, 산파들은 곁에서 어떻게든 그녀가 의식을 잃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건 의학적 지식이 없는 그가 보기에도 분명했다.
[급히 수술을 해야 합니다.]
심각한 표정의 의사들이 뭔가 말하고 있었으나 문가에 못 박힌 듯 선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
눈에 보이는 것은 정신을 차리려 힘겹게 눈을 깜빡이는 줄리엣뿐이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역시 아이는….]
[전하?]
순간 치미는 욕지기를 참기 어려웠다.
파리해진 얼굴의 줄리엣과 완전히 붉게 물든 흰 시트.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그녀의 생명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존재가 사라지기만을 바랐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렇게 다급히 쫓아가지만 않았어도, 줄리엣이 몰래 도망칠 만큼, 겁에 질리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그녀의 환심을 사겠답시고 멍청한 말을 선물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제 욕심에 눈이 멀어 그녀를 가두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고작 몇 개월을 함께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그를 멋대로 들뜨게 했고, 생소한 감정을 잔뜩 가르쳤으며,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무너지게 했다.
그리고 그는 줄리엣을 영영 망가뜨렸다.
*
시간은 몹시 느리고 지루하게 흘렀다.
[줄리엣.]
[......]
인기척에도 침대에 멍하니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보는 여자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벌써 몇 달째 익숙한 무시에 레녹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줄리엣을 놀래지 않을 만큼 조심스레 다가갔다.
[......]
저벅, 하고 커다란 남자가 다가 오자 줄리엣의 도자기 같은 이마가 설핏 찌푸려졌다.
두 발짝 하고 반.
꼭 그만큼의 거리가 그녀가 그에게 허락하는 거리였다.
[차라리 죽여요.]
처음에는 제 눈에 띄자마자 화병을 내던지고 악을 써 댔다. 이만하면 많이 나아진 축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어떻게든 줄리 엣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뭐라고 애원하며 잘못을 빌고 아무리 값진 물건을 가져다 바쳐도 줄리엣은 그가 바라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그가 들고 온 것은 흔한 목걸이나 꽃다발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무릎에 초라한 헝겊 인형을 내려놓았다.
[네 거야.]
그건 몇 달 전, 그가 홧김에 빼앗아 궤짝에 넣고 잠가 버린 물건들 중 하나였다.
줄리엣이 아기 방으로 몰래 꾸며 놓았던, 그 작은 방에 있던 인형이었다.
[......]
공허했던 줄리엣의 시선이 헝겊인형으로 향했다.
그녀는 조그만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걸 알아.]
듣고 있는지나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계속된 무시에도 결코 줄리엣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냥 네가 있기만 하면.]
텅 빈 눈이 어른거릴 때마다 밤마다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 살아 있는 줄리엣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차라리 화를 내.]
밤마다 그는 버석거리는 마른 몸을 끌어안고 애원했다.
화를 내도 좋고 욕을 퍼부어도 좋으니, 어떻게든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반응을 보여 달라고.
그러자 가만가만 인형을 매만지던 줄리엣이 불쑥 그를 향해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그건 줄곧 넓게 울거나 멍하니 그를 무시하던 줄리엣이 그에게 아주 오랜만에 건넨 첫 마디였다.
[골칫거리가 사라졌으니까요.]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