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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21화 (218/229)

221화.

**

달그락.

레녹스는 고집스럽게 묽은 죽이 담긴 그릇을 줄리엣에게 들이밀었다.

[먹어.]

[싫어요.]

그 대화를 문 밖에서 지켜보던 주치의는 '또 시작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닷새 동안 그들은 수없이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좀 더 교묘하게 상처 입힐 수 있을지 싸우는 사람들 같았다.

그는 줄리엣을 자신의 침실에 가둔 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갇혀 있는 줄리엣을 불쌍하게 여긴 하녀가 몰래 넣어 준 아기물건 때문에, 그는 아예 시중드는 사람들조차 출입을 금지시켰다.

대신 직접 줄리엣의 자질구레한 수발을 들었다.

덕분에 매 식사 시간이 전쟁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먹이려 애를 썼고 줄리엣은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줄리엣이 그를 힐끔 노려보았다.

[매번 이러셨나요?]

[매번?]

[신분 낮은 연인들이 아이를 가질 때마다 시중을 들어 주셨나하고요.]

[......]

레녹스는 건조한 시선으로 줄리 엣을 바라보았다.

[글쎄, 모르겠군.]

자신의 화를 돋우려고 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았다.

[보통은, 한 번도 그렇게 쉽게 애가 들어서지 않았거든.]

짝.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갈랐다.

[………미안해요.]

줄리엣은 때려 놓고 자기가 더 놀란 눈치였다.

정작 레녹스는 대수롭지 않게 턱을 매만졌다. 소리만 요란했지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않은 줄리 엣이 힘껏 때려 봤자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화풀이는 다 한 건가?]

그는 일부러 비딱하게 싱긋 웃었다.

[그렇게 굶어서 애를 잃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지.]

[걱정하는 척하지 마세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줄리 엣이 쏘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사라지면 가장 반기실 분이시잖아요.]

그렇게 빈정거려 봤자 레녹스에게는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그는 며칠 내내 목 놓아 우느라 붉어진 줄리엣의 눈가가 더 신경쓰였다.

[왜 시간 낭비를 해요, 어차피 좋아한 적도 없었으면서 …..…]

[......]

줄리엣은 시무룩하게 등을 돌리고 누워 버렸고, 그는 주치의가 기다리는 복도로 나와 버렸다.

[안정제를 다시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주치의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주치의는 대륙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는 약제사를 데려와, 곧장 약을 만들게 했다.

[아직 일주일가량 더 걸립니다.]

약제사는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그리고 실피움 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 귀부인께서 건강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알아.]

레녹스가 줄리엣을 어떻게든 먹이려고 실랑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줄리엣의 약해진 몸이 걱정스러웠다.

[정말 다른 부작용은 없는 거겠지.]

[귀부인의 몸 상태만 건강하시다면, 물론입니다.]

이 약제사는 줄리엣을 꼬박꼬박 ‘귀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의 속내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처럼, 위험을 감지한 초식동물처럼, 줄리엣은 그에게 갇혀 있는 내내 극도로 불안해했다.

얼마든 상냥하게 굴어 주겠다고 마음먹었음에도.

‘어차피 좋아한 적도 없었으면서'라고?

무심코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피식 실소가 나왔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괴로웠을까.

[약을 쓰든 뭘 하든, 배 속의 애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다시금 되.

되새겼다.

[여자만 살려 놔.]

* * *

[…… 미안해, 아가야. 미안]

다시 데운 약과 식사를 가지고 침실로 돌아오던 레녹스는 열린 문 틈새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멈칫했다.

어쩐지 넋이 나간 듯한 줄리엣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렇지만 미워하지 말아줘.]

그녀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레녹스는 괴로운 얼굴로 잠시 그녀를 보다가, 일부러 인기척을냈다.

웅크려 앉아 있던 줄리엣이 인기척에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먹어.]

[......]

[먹여 줘?]

달그락.

뜻밖에도 줄리엣은 잠시 그를 열없이 쳐다보다가 순순히 수저를 들었다.

웬일인가 싶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줄리엣은 평소 몇 입 먹지도 못했던 묽은 죽을 다 비우고, 군말없이 약차까지 받아 마셨다.

[미안해요.]

[뭐가?]

[제가 눈치도 없이, 미련하게 아이를 가져 버려서요.]

툭, 하고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찻잔에 떨어졌다.

[우리 아가도 좋은 엄마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줄리엣은 드디어 모든 걸 포기한 듯 초연해 보였다.

옷까지 갈아입은 다음 줄리엣이 말했다.

[좀 걷고 싶어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그는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 산책을 했다.

줄리엣은 닷새 만에 보는 뜰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릴리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흰 백합이 만발한 뒤뜰을 보고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남자아이일지도 모르지만요.]

줄리엣은 희미하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

[비가 오려나 봐요.]

줄리엣은 아침저녁으로 백합이 핀 뜰을 거닐며 조금씩 체력을 을회복했다.

물론 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시종이나 기사들의 삼엄한 감시가 꼬리처럼 따라붙곤 했지만, 줄리엣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그날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그녀는 다시는 떠나게 해 달라거나, 아이가 어떻다는 둥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줄리엣은 의지를 잃은 인형처럼 주는 대로 힘겹게 식사를 하고, 그가 건네는 약을 마시고 푹 잠들었다.

대신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게 된 것은 그였다.

그는 매일 밤 잠든 줄리엣의 곁을 뜬눈으로 지키며 되뇌었다.

무엇을 포기하든, 그녀를 영영잃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주군.]

그러기를 며칠째.

이른 새벽,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이 조심스레 침실 문을 두드려 그를 복도로 불러냈다.

[마수?]

[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듯하여…….]

정체불명의 대형 마수 무리가 숲 근처의 민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마수는 마수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피곤한 눈가를 매만지던 레녹스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런 특성을 가진 마물은 하나 뿐이다.

[그림자 늑대인가.]

[그것밖에 없지요.]

그림자 늑대의 까다로운 특징 두 가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왕성한 식욕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수가 늘어난다는 거였다.

그런 마물이 하필이면 성 근처 숲에서도 목격되었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난폭한 대형 마수임에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해가 떠 있는 동안 그림자를 보고서 사냥해야 했다.

레녹스는 복도 끝 창문을 힐끔거렸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두운 새벽이었다.

[서두르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밀란이 재빨리 고했다.

글쎄.

평소라면 결코 주저하지 않았겠지만 성을 비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는 잠시 망설였다.

동쪽 탑에 보관과 함께 가둬 버린 악령도 힘을 잃어 쥐 죽은 듯 잠잠하긴 했다.

하지만 약제사가 약속한 날짜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슬쩍 침실 문틈으로 시선을 주었다.

넓은 침대 위에는 진정제를 먹고 잠든 줄리엣이 평화롭게 새근거리고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걸 없앨 계획이지만, 어쨌든 줄리엣은 제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아이를 가진 여자가 성에 있는데 바로 지척에 정체 모를 마물이 출몰했다는 게 그의 본능적인 불안을 부채질했다.

잠시 갈등하던 그는 결국 마구 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을 준비시켜.]

**

키르르르!

어이없게도 성을 나와 근처 숲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그들은 마수와 맞닥뜨렸다.

서걱.

그림자 늑대는 커다란 주제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게 좀 성가시긴 했지만 파훼법을 알면 처리가 까다롭진 않았다.

잘 훈련된 기사들은 능숙하게 마수의 숫자를 줄여 나갔다.

키아아!

무리 생활을 하는 마수답게 어린 새끼도 있었다. 레녹스는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작은 그림자 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키륵!

그러나 부모인 듯한 커다란 개체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그는 몸에 익은 동작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림자 늑대는 마수답지 않게 부모가 어린 개체를 끔찍이 위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그 틈을 타서 어린 새끼인 듯한 마지막 한 마리는 달아나 버렸다.

레녹스는 잠시 멈칫하고 검을 내렸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밀란이 재촉했지만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보이지 않는 마수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피가 땅을 천천히 적셨다.

[......]

어쩐지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어떤 위화감을 눈치챘다. 그림자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는 습성 때문에, 개체 수가 빠르게 줄어 근 백여 년간은 출몰하지 않았던 마수였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본능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기분 나쁠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설마.

[주군?]

뒤에서 당황한 기사들이 붙잡을 새도 없이, 그는 곧장 말에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내달렸다.

[전하!]

조금이라도 빨리, 서둘러 성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혹할 정도로 말을 몰아붙인 끝에 그는 놀라운 속도로 먼 거리를 단시간에 주파했다.

그러나 막 성의 첨탑이 보일 무렵, 그는 성의 앞마당에서 허둥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

[… 서둘러…!]

하인들이 허겁지겁 말을 가져오고, 기사들은 추격대를 꾸리듯 다급히 말에 오르고 있었다.

성의 주인인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가신들이 당황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줄리엣.

[고, 공작님?]

[어디 있나.]

[안 그래도 연락을…….]

[어디로 갔냐고!]

그의 노성은 망루를 다급히 기어오르던 하인을 향한 것이었다.

높은 망루에 올라서 급히 주변을 살피던 하인이 성 뒤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 저쪽입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깨닫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는 뭔가 물을 새도 없이 하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을 내달렸다.

줄리엣이 망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곤 하던 쭉 뻗은 외딴 오솔길.

미친 듯 말을 달리기를 5분 여, 그는 단숨에 자신이 찾던 뒷모습을 발견했다.

[줄리엣!]

[... ... !]

헤이즐넛 색 말 등에 매달려 있던 여자의 겁먹은 푸른 눈이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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