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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20화 (217/229)

220화.

*

와드득.

정신없이 말을 달려 루체른에 도착한 기사들이 목격한 것은 기괴한 장면이었다.

[… 저런 건 처음 봅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들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하의 마법진 안에 갇힌 것은 어린 소녀의 모습을 훔친 뱀 악령이었다.

주홍빛 도는 금발과 청보랏빛 눈.

수년간의 추적 끝에 레녹스는 마침내 가문에서 도망친 악령을 찾아냈다.

칼라일 가문에서 뱀 악령은 그냥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을 미혹하고 모습을 훔치고, 인간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실체를 가진 괴물이었다.

우드득.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악령은 썩지 않는 성녀의 시신을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공작.]

루체른의 고위 사제들은 오랜 원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뱀을 붙잡아 북부로 데려가는 칼라일 공작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저것은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는악마요.]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칼라일 가문의 가주들이었다.

뱀을 산 채로 잡아 온 기사단은 그 악령을 동쪽 탑에 가두고 삼엄하게 감시했다.

아는 사람은 극히 적지만, 공작성의 동쪽 탑은 그 자체로도 악령의 힘을 억제하는 결계가 깔려있었다.

[이런, 이게 누구야.]

수십 년 만에 붙잡혀 돌아온 악령은 잔뜩 약이 올라 있었다.

[어린 칼라일아, 이번에는 네가 나를 잡아 온 거구나?]

사제들이 말하기를, 뱀이 먹어 치운 시신은 수십 년 전 요절한 '제노비아'라는 소녀의 것이라고 했다.

[내가 맞춰 볼까? 너도 네 새끼를 밴 인간 계집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려는 거지?]

독이 잔뜩 오른 뱀은 탑의 결계에 갇혀 손발이 잘렸음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놀랄 거 없단다. 네가 처음도 아니거든. 네 조상들도 내게 빌러 오곤 했으니, 전혀 부끄러운 일이….]

[닥치고 저주나 풀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가 좋다고 입을 놀리는구나. 아직까진 살 만한가 - 어라.]

번들거리던 청보랏빛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이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좀 가 .]

뱀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금방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듯 격렬히 적의를 드러내던 뱀은 생각을 바꿨는지 말로 그의 화를 돋우려 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니까.

아내가 죽으면 새로 들이면 그만 이고, 자식이 죽으면 새로 낳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저주를 풀려고 해?]

결계에 갇혀 비명을 지르면서도 뱀은 그에게서 어떤 반응을 유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쉿쉿거리는 듯 들렸다.

[갖은 잘난 척은 다 하더니, 다른 인간들처럼 제 핏줄만은 귀한 모양이지?]

레녹스는 실소했다.

핏줄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걸 모르다니. 하기야 그걸 모르니 악령인 거겠지만.

붙잡아 온 뱀과 씨름하는 내내 레녹스는 되도록 줄리엣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요즘은 울기만 하세요.]

하지만 하루 종일 뱀이 퍼붓는 저주를 듣고 있다 보면 어떻게든 줄리엣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고, 아주 늦은 시간 몰래 그녀를 보러 가고는 했다.

[…… 안녕, 아가야.]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줄리엣은 수척해진 얼굴로 창가에 앉아있 있었다. 방에만 틀어박혀있는 줄리 엣은 더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일과라곤 아무도 없는 성 주변을 산책하거나,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차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먼 복도에서 그녀를 지켜보거나, 지쳐 잠든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뿐이었다.

그는 차라리 줄리엣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뱀은 보관 안에 갇히는 것을 격렬히 거부했다.

[키킥.]

성녀의 유해를 삼킨 탓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삼엄한 결계 덕분에 뱀은 날로 쇠약해져갔다. 이대로라면 다시 봉인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뱀은 물리적인 힘을 봉인당하고서도 이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주를 풀어 줄 일은 없을 테니까, 네 새끼를 죽이는 인간 여자를 죽이는 어서 결정하라고.]

그 역시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 뱀은 저주를 풀어 줄 생각 따위 없으며, 단순히 그가 괴로워하는 꼴을 보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너도, 네 핏줄도, 내 저주에서 벗어나진 못할 거다.]

이죽거리는 뱀의 얼굴은, 정확히는 뱀에게 잡아먹힌 '제노비아’라는 소녀의 얼굴은 묘하게도 둥근 눈매가 아주 조금 줄리엣과 닮아 있었다.

*

[주군!]

가문의 기사가 급히 그에게 달려온 것은 다음날의 일이었다.

[..… 결계를 어떻게 뚫었는데.]

[그, 그걸 모르겠습니다.]

동쪽 탑 근처를 산책하곤 하던 줄리엣이 뱀과 마주친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저녁마다 줄리엣이 성 안을 산책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심했던 것이 실수였다.

동쪽 탑의 경계는 표식을 가진 기사들이나 강력한 마력을 가진 고위 사제나 마법사 외에는 드나들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한 일이었다.

[한 번만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하셔서 탑 근처에 오시는 건 알았는데….]

그 뱀이 줄리엣에게 뭐라고 속살거렸을지가 문제였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그를 보좌관이 붙잡았다.

[전하, 줄리엣 양이 지금 만나뵙기를 청하십니다.]

[나중에 간다고 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겠답니다.]

[......]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도리가 없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별채로 향했지만 줄리엣은 거기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전하.]

대신 그의 응접실에 우아하게 앉아서 그를 맞았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

줄리엣은 약식이지만 흠 잡을데 없는 예법으로 그에게 인사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차 드시겠어요?]

조르륵.

대답을 듣기도 전에 차를 따르던 줄리엣이 그를 보고는 웃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레녹스는 생경한 눈으로 줄리엣을 훑으며 자리에 앉았다.

울지 않거나 깨어 있는 줄리엣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잘 차려입은 줄리엣은 굉장히 낯설었다.

늘 밋밋한 잠옷이나 수수한 실내용 드레스 대신에 그녀는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짙은 푸른색의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연한 갈색 머리칼은 조금 땋아단정히 틀어 올리고, 복숭앗빛 화장으로 파리한 뺨을 가린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어쩐지 이유 모를 불안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달리아를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는 움찔했다. 그는 줄리엣에게 달리아가 무엇인지 결국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줄리엣은 공작가의 저주나 달리아의 정체에 대해 알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불안을 감지했다.

[저, 어제 동쪽 탑에 갔다가 누굴 만났거든요.]

줄리엣이 동쪽 탑에 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참이었다.

[거기서 어떤 아가씨를 마주쳐서, 대화를 했어요.]

[…… 대화를 했다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줄리엣이 봤다는 여자는 뱀이 분명했다.

손발이 묶이고 마력을 봉인당한 뱀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물리적으로 줄리엣을 해치지는 못하겠지만, 그 뱀의 정말 무서운 점은 사람의 정신을 파고든다는 점이었다.

건강한 상태의 인간이라면 뱀에게 홀리지 않지만 줄리엣은 누가 봐도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그는 더럭 겁이 났다. 그 뱀이 줄리엣에게 뭔가 해코지를 했을 까봐.

[뭐라고 했는데.]

대화까지 나눴어?

사납게 묻는 그를 보고 줄리엣은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잖아.]

[……그냥, 인사만 했어요.]

성급하게 다그쳐 묻자 줄리엣이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전하에 대해 나쁜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

거짓말.

그럴 리 없다.

고위 사제조차 간단히 현혹하고 기억을 조작하는 악령인데. 그 뱀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속살거렸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줄리엣은 놀랍도록 침착하고 차분했다.

[20년 만에 찾으셨다면서요.]

[…… 그렇게 말하던가?]

그 뱀이?

[아뇨, 이건 하녀들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다들 요즘은 늘 그 이야기 뿐이거든요.]

줄리엣은 남 이야기를 하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20년 전에, 하인 부부가 달리아와 함께 도망갔고 칼라일 공작이 드디어 찾아내서 돌아온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성이 어수선한 건 그 때문이었나.

레녹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단 속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릴 말이 있어요, 전하.]

[……말해.]

[저, 약속은 꼭 지켜요. 입이 가볍지도 않고요.]

[그런데?]

[그러니까 떠나게 해 주세요.]

레녹스는 귀를 의심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그냥 멀리 떠나서, 조용히 숨어 살게요. 그냥…….]

[어딜 가겠다고?]

숨이 턱 막혔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게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죽은 듯이 살게요. 다시는 제 소식을 들으실 일 없도록요.]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는 차라리 이게 협박이었으면 했다.

제 고집을 받아 주지 않으면 너를 버리고 아주 멀리 영영 떠나 버릴 거라고, 줄리엣이 괜히 떼를 쓰는 것이기를.

[줄리엣.]

하지만 애석하게도 줄리엣은 그렇게 약아빠지지 못했다.

저건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떠나 버리겠다고.

핏기 없는 줄리엣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요.]

약지에 끼고 있던 작은 금반지를 빼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별로 값어치는 없어도 받아 주셨으면 해요.]

아무 무늬 없이 가느다란 실반지였다.

고작해야 금화 열 개의 값어치나 될까 싶은.

[기분 나쁘면 버리셔도 되지만…… 되도록 팔아서 처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

[금화 다섯 깊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줄리엣이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는 얼른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이런 걸 왜 준단 말인가. 부귀한 공작가의 주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이런 푼돈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물론 그동안 돌봐 주신 금액에는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지금 제가 가진 건 이것뿐이라서요.]

그제야 그는 간신히 줄리엣의 의도를 이해했다.

[……대체.]

그리고 깊이 절망했다.

줄리엣의 말은 그동안 먹이고 재우고 돌봐 줬으니, 그 값을 치르겠다는 거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당장 빚을 갚을 방법이 -.]

[그러니까 빚도 갚고, 기어코 떠나겠다고.]

[……네.]

[내 애를 가지고?]

잠시 담담한 눈으로 그를 빤히 보던 줄리엣이 조용히 정정했다.

[제 아기예요.]

[......]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전하에 대해서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그냥, 떠나게만 해 주세요.]

[…… 떠나게만 해 달라?]

그러다 네가 죽어도?

그럼 나는 대체 뭐였는데.

[어림없는 소리.]

그녀는 대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계산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줄리엣.]

입가를 매만지며 그는 차갑게 비웃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제멋대로 반하고, 멋대로 기대하고.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네 목숨은 내 건데, 네가 가긴 대체 어딜 가.]

[?]

[…… 전하?]

[죽으려거든 내 앞에서 죽어.]

달칵.

문을 걸어 잠그며 그는 기어코 모질게 내뱉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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