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쿠당탕.
햇살이 잘 드는 작은 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말없는 하인들은 충실히 명령을 수행했다.
정갈한 가구들이 뒤집어지고 서 랍장 안에서 정성껏 숨겨 둔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레녹스, 제발.]
레녹스는 열없는 시선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물건들을 훑었다.
대체, 언제부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장난감, 얇고 보드라운 손수건이며 곱게 접힌 아기 옷가지 같은 것.
그런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줄리엣은 그를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잔뜩 겁에 질린 여자가 그의 발치에 매달려 애원했다.
[그러니까 제발, 저것 좀 그만하라고 해 주세요……. 네?]
소박하고 조잡한 잡동사니가 무슨 귀한 보물이라도 된다는 양, 절박하게 매달렸다.
레녹스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저 눈을 잃는 게 두려웠다.
그녀는 정에 굶주렸고, 아무것도 아닌 마수 새끼에게조차 정성을 쏟을 정도로 다정했다.
다람쥐처럼 작은 방 안을 꾸미고 부지런히 빈 서랍장을 채우면서 얼마나 들떴을지.
곳곳에 묻어나는 애정에 그는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하지만 줄리엣이 모르는 게 있다.
빌어먹을 가문의 저주가 그녀를 앗아갈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결론부터 내렸다.
그는 줄리엣을 잃을 수 없었다.
쏟아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은 채, 줄리엣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약속했잖아요. 화내지 않는다고…….]
[화나지 않았어.]
머릿속이 새하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대답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줄리엣과 눈높이를 맞췄다.
눈물로 엉망이 된 줄리엣의 뺨을 문질렀다.
[줄리엣.]
그는 자신이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너는 날 못 떠나.]
그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를 잃을 수 없었다.
* * *
[안정제를 처방했습니다.]
급히 불려 온 것은 공작가의 주치의인 힐베리 경이었다.
[겨우 잠드셨습니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줄리엣은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울음을 그쳤다.
겁에 질린 줄리엣은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레녹스는 주치의의 지시에 따라 침실 밖으로 쫓겨났다.
[얼마나 심각하지.]
[전하.]
주치의는 단둘뿐인 서재 안을 확인하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혹시 줄리엣 양은…….]
[아무것도 몰라.]
나이 지긋한 주치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전형적입니다.]
칼라일 가문의 내력, 그것도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의 공범자가 된 주치의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선대 공작 시절 주치의의 조수였던 그는 스승의 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입덧이라고 알고 계십니다.]
[......]
[아직까지는 입덧이 좀 유난스럽다고 느끼겠지만, 실상은 마력과 영양분을 빼앗기는 겁니다.]
레녹스는 찻물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던 줄리엣을 떠올렸다.
입덧과 유사한 증상이지만 다르다. 조금씩 마력과 영양분을 아먹다가, 모체가 필요 없게 되면 죽이는 빌어먹을 핏줄.
[…… 방법이 있긴 합니다.]
주치의가 조심스레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첫 아이만 포기하면 되는 거니까요.]
[.......]
첫 아이만 포기하면.
레녹스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첫 아이를 앗아가는, 장자의 저주.
그들 가문의 가주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첫아이를 잃을 것인지, 아내를 잃을 것인지.
하지만 그에게 그건 고려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실피움 꽃을 구해 보겠습니다.]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바로잡으면 돼.’
불운한 사고였다지만 아직까지는 바로잡을 수 있었다.
줄리엣을 설득해서, 아이를 포기시키면.
[......]
하지만 대체 무슨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대로 털어놓는다 해도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그를 경멸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달칵.
그는 조심스레 침실 문을 열었다. 줄리엣은 침대 대신 카우치에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
뭔가 덮어 줄 게 없나 싶어 돌아보던 그는 아쉬운 대로 침대 위의 얇은 시트라도 집어 들었다.
달그락.
그러나 그가 흰 시트를 쥐고 돌아섰을 때, 그는 겁먹은 얼굴로 잠에서 깨어난 줄리엣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싫어요.]
줄리엣은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고집이 이렇게 센 줄 몰랐다.
[아기가…….]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오라고.]
왈칵 화가 치밀었다. 누굴 발정난 개새끼로 아는 것도 아니고.
[......]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줄리엣이 머뭇머뭇 침대로 다가왔다.
그는 재빨리 가느다란 어깨를 낚아채 시트로 둘둘 감싸 끌어안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안긴 자세가 불편한 듯 줄리엣은 잠시 뒤척이긴 했지만 그녀는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다.
뒤에서 끌어안고 있으니 따끈한 체온과 두근거리는 맥박이 그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가느다란 어깨선과 앙상해진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본인은 입덧이라고 알고 계십니다.]
[......]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그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가 애처로웠다.
[언제부터 알았는데.]
[얼마 안 됐어요….….]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고백했다.
[자꾸 졸리고 나른해서, 우르슬라 부인에게 상의하려고 했는데 부인이 안 계시잖아요. 그래서 대신…….]
그의 눈매가 못마땅하게 가늘어졌다.
[그 의사를 찾아갔나?]
[아뇨, 낯선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책을 찾아 봤어요.]
열심히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고, 란델이라는 의사 놈을 쫓아 다니며 부지런히 묻던 건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레녹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사실대로 털어놓았을 때 줄리엣이 겁에 질리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그를 경멸하게 되는 게 더 먼저일지.
[아.]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였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무것도 아니-.]
줄리엣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그가 빨랐다.
[……아기 신발이에요.]
불안한 얼굴로 줄리엣이 실토했다.
그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조그만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귀여워서 …… 제가 몰래 주운 거예요.]
급히 둘러대는 걸 보니, 필시그녀를 가엾게 여긴 하녀들 중 누군가 몰래 주워 준 모양이었다.
[제발 화내지 마세요.]
[……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지만, 화나지 않았어.]
그가 화가 났다면 대상은 하나 뿐이었다.
줄리엣을 하루하루 말라가게 하는 제 저주스러운 핏줄.
호두알보다도 작은 주제에,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그녀의 배 속에서 자라는 존재에 대해 그는 한 톨의 애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를 줄리엣은 그의 눈치만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를 닮으면 분명 귀여울 거예요.]
[낳지 마.]
[......]
불쑥 튀어나온 본심에 줄리엣의 몸이 흠칫 굳었다.
크게 뜨인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그는 간절히 애원했다.
[낳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진실을 알려 줄 수도 없고 영원히 속일 수도 없다.
겁이 난 그는 적당한 타협을 선택했다.
[주치의가 말했어. 아이를 가질만큼 네 건강이 좋지 않다고.]
[…… 거짓말.]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포기해.]
그는 무릎을 꿇고 난생처음으로 애걸했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테니까.]
그건 정말이었다.
줄리엣이 말만 한다면, 고개만 끄덕인다면 그는 왕좌라도 가져 다 줄 작정이었다.
배 속의 아이를 포기하고 나를 선택해.
이번 단 한 번만 포기하면 그 다음에는 아이든 뭐든 들어줄 수 있다.
[이번 한 번만 포기하면 -.]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상처 입은 눈으로 줄리엣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흥정하듯이…… 말하지마.]
그녀는 제대로 울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비칠 비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기에 바빴다.
그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억지로 고개를 붙드니 줄리엣은 고집스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미워 죽겠어…….]
[줄리엣.]
[나가요.]
완전히 겁먹은 푸른 눈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힘없는 축객령에 침실을 나오면서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면,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설득하면…….
[주군.]
뒤를 돌아보자 다급한 기색으로 뒤쫓아 온 밀란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테아르 남작에게서 급한 연락입니다.]
[......]
기사가 건넨 봉투 안에는 급하게 휘갈긴 글씨로 단 한 문장만 쓰여 있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