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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18화 (215/229)

218화.

줄리엣이 가져간 것은 약간의 금화였다.

귀금속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외출했다가 은화가 짤랑이는 주머니를 들고 돌아온 줄리엣이 몹시 행복해 보였다.

[잡화점이나 앤틱 가게 그리고 의상실에 들르셨는데, 드레스를 맞추시진 않으셨답니다.]

[그럼 뭘 샀지?]

[별거 아닙니다. 가제 천? 이건 손수건 만드는 용도 같고…… 그리고 비단 리본이랑, 서랍장도사셨군요.]

잡화점이라도 차릴 생각인가.

그는 줄리엣이 뭘 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확실히, 요즘의 줄리엣은 그가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덕분에 바쁜 시간을 쪼개 줄리 엣을 보러 별채까지 와도 번번이 헛걸음이었다.

레녹스는 복도 끝 작은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방인가?]

[예, 하녀들 말이 요즘은 이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신답니다.]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잠겨 있었다.

[원래 잠겨 있나?]

[아가씨가 잠가 두신 모양입니다.]

레녹스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잠겨 있는 방이래 봤자 저택 구조상 아주 작은 방에 불과했다.

[여기서 뭘 하는데?]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레녹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딱히 짚이는 데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정말로 별거 아닙니다만….]

별채를 나서는 그에게 재빨리 엘리엇이 하나 더 보고했다.

[아가씨가 그 의사 선생과 무슨 공부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

[그러니까…… 의학 공부?]

의사라도 될 생각인가. 레녹스는 조금 전까지 궁금해하던 닫힌 방이며 잡화점 따위에 대한 이야기는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대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치워 버릴 치밀한 계획을 두세 가지 떠올렸다가, 문득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미치겠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치해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쫓아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줄리엣에게 제 유치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는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레녹스가 줄리엣을 발견한 것은 그날 오후였다.

[깜짝이야.]

카우치에 앉아 바느질에 열중하던 줄리엣은 그가 바로 곁의 안락의자에 앉자 화들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녹스는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놓은 반짇고리며 레이스며, 잘린 천 같은 잡동사니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훑었다.

[이게 다 뭐야?]

[예쁘죠? 로렌이 만든 인형 옷이에요.]

줄리엣이 활짝 웃으며 아주 작고 섬세한 드레스 같은 걸 보여주었다.

로렌은 바느질을 잘하는 침방하녀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이대로 옷본을 오리고 꿰매기만 하면 인형 옷도, 아기 옷도…… 동물 인형도 만들 수 있대요.]

줄리엣은 그의 속도 모르고 웃으며 그에게 자랑했다.

레녹스는 별생각 없이 줄리엣이 열심히 바느질하던 동물 인형 비슷한 걸 집어 들었다.

[쥐?]

[토끼잖아요.]

줄리엣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바느질에 재능은 없는 거 같은데.

그는 픽 하고 웃었다.

[갑자기 바느질은 왜?]

[혹시 모르잖아요. 배워 두면 나중에 삯바느질이라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네가 삯바느질을 해서 먹고 살일이 뭐가 있는데.]

[그거야…… 그렇죠.]

줄리엣은 어쩐지 머뭇머뭇 그의 시선을 피했고, 레녹스는 어쩐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앗.]

어쩐지 불안불안하다 싶더니 서툴게 바늘을 쥐던 줄리엣이 손가락을 찔렸다.

흰 손가락 끝에 작은 핏방울이 고이자 그는 무심코 줄리엣의 손끝을 끌어당겨 입 맞췄다.

[......]

손끝을 핥았을 뿐인데 줄리엣의 푸른 눈과 마주쳤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 틈에 테이블을 넘어뜨리고 카우치 위에서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싫-]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줄리엣이었다. 그녀는 그를 밀쳐 내는 대신 조금 과격한 방법을 택했다.

[......]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다.

비릿한 피 맛에 눈살을 찌푸린 레녹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줄리엣은 어쩔 줄 몰라했다.

[미, 미안해요.]

그녀는 제가 물어뜯어 놓고도 스스로가 더 놀란 것처럼 보였다.

[많이 아파요? 어떡해]

[괜찮아.]

줄리엣은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치만 지금은 싫어요. 당분간은…….]

당분간은?

그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눈치 챘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다급히 자리를 뜬 줄리엣이 다시 나타난 것은 그날 밤이었다.

똑똑, 하고 집무실 문을 두드린 줄리엣은 여전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친 데는 괜찮으신가 해서요.]

[......]

[이거요.]

줄리엣이 내민 것은 앙증맞은 크기의 동그란 단지였다.

[상처에 잘 듣는 연고래요.]

연고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 의사 놈이 줬나?]

[아뇨, 약제상에서 샀어요. 왜요?]

[…그럼 됐어.]

레녹스는 줄리엣이 내민 연고를 받아 대충 테이블 구석에 내려놓았다.

[나가 봐.]

[......]

그러나 줄리엣은 나가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먼저 밀어내 놓고 왜 자기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줄리엣.]

레녹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순순히 끌려온 줄리엣은 그조차도 거부하 하진 않았다.

[너 요즘 이상해. 알아?]

레녹스는 불만스레 타박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줄리엣이 품 안에서 고집스럽게 웅얼거렸다.

[자연스러운 거랬어요.]

[누가?]

[이상한 거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랬는데.]

[책에서….]

무슨 책?

하지만 줄리엣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침묵이 길어지고 규칙적인 호흡 소리만 들려와 잠이 들었나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줄리엣은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

'이게 몇 주째더라.'

레녹스는 날짜를 헤아렸다.

걸핏하면 눈물을 글썽이고 툭하면 토라지고, 그러면서 조금만 입 맞출라치면 소스라치면서 밀어내질 않나.

[……이상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잠든 줄 알았더니. 줄리엣이 풀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는 슬쩍 웃어 버리고 말았다.

[괜찮아. 그냥 네가 가끔 기억했으면 좋겠어.]

[뭘요?]

[……내가 별로 참을성이 없다는 거.]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는 줄리 엣을 다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다.

‘너는 어차피 누구든 상관없었던 거잖아. 그 지옥에서 꺼내 줄사람이면.’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는 줄리엣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모처럼 만의 긴 휴일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줄리엣을 데리고 멀리 나갈 계획을 세웠다. 겸사겸사 눈엣가시 같은 란델이란 의사 놈도 시야에서 치워 버릴 겸.

그러나 그가 별채에 도착했을 때 줄리엣은 잠시 외출한 차였다.

[곧 돌아오실 거예요.]

침실 안을 정리하던 하녀장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면서 하녀장은 재빨리 침실 안에 있던 그릇을 치웠다. 라벤더 꽃이 담겨 있던 향 그릇이었다.

[뭘 하는 거지?]

[아…… 요즘 아가씨가 음식을 잘 못 드세요.]

[그건 알아.]

기껏 잘 먹이고 재워서 사람 꼴을 만들어 놨더니 다시 살이 내려서 이만저만 거슬리던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냄새가 거슬려서 그러신 거 같다고, 젊은 의사 양반이 향 나는 건 모두 치우는 게 좋다고 조언해서요.]

그런가.

빈 침실 창가에 걸터앉아 그는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줄리엣이 이상하게 굴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 주째 되었다 싶었다.

가까이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쉽게 피로해 하고, 잠도 늘었고, 그런 주제에 의사의 진료도 거부하고.

'아무래도 주치의를 부르는 게 낫겠는데.’

줄리엣이 정말 어디 아픈 거라면, 정말로 이상한 병이 분명했다.

[......]

창틀을 가볍게 두드리던 그의 손이 멎었다.

좋아하는 음식조차 못 먹으면서, 입에 대는 거라곤 따뜻한 차나 과일 조금이 전부.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런 병이 있었다.

세상에 그런 이상한 병이 있다.

면 하나뿐이다.

[하지만 전하를 닮은 아이면 무척 귀여울 거예요.]

[주군?]

이성적인 추론을 하기 전에, 그는 이미 침실을 나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에 지나쳤던 복도 끝의 작은 방 앞에 멈춰섰다.

철컥.

복도 끝 방은 여전히 굳게 잠긴 채였다.

[당장 열어.]

[예?]

[이 안을 봐야겠으니까.]

[하, 하지만 아가씨가 곧 돌아오실 텐데요.]

[두 번 말해야 하나?]

서슬 퍼런 기세에 기사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우지끈.

굳게 잠겨 있던 문은 도끼질 몇 번에 간단히 부서졌다.

아래층이 시끄러워지고, 마차가 돌아온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레녹스는 아랑곳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잘 드는 아늑한 방이었다.

작은 방에는 가구가 별로 없었지만 누군가의 애정 어린 손길이 곳곳에 묻어났다.

고심해서 고른 듯한 파스텔 톤의 벽지와 고상한 취향의 서랍장과 옷장.

그리고 방 안 정중앙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

[주, 주군.]

뒤따라온 하인들은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고 숨을 죽였다.

레녹스는 지나치게 작은 침대처럼 생긴 그것을 차디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공작성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뭐 하는 물건이더라.

그의 손이 느릿하게 요람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전하?]

가느다란 목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여기에…….]

막 외출에서 돌아온 듯한 줄리 엣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제가 목숨처럼 걸어 잠그고 지키던 방이 열린 것을 보고는 하얗게 질렸다.

마치, 오랫동안 숨기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푸 푸른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는 이미 확신했다.

[네가 말해 봐, 줄리엣.]

레녹스의 담담한 시선이 고풍스러운 서랍장을 향했다.

[저 안에 뭐가 들었지?]

그는 저 안에 든 게 뭔지 확인해야 했다. 그 생각뿐이었다.

어째서 더 일찍 눈치채지 못했을까.

[레녹스, 제발요.]

겁에 질린 줄리엣이 애걸하며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놀란 하녀와 하인들이 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렸다.

[제가, 제가 다 설명할 수 있-.]

그는 자신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방 안으로 황급히 뛰어든 줄리엣의 표정이 악귀라도 본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줄리엣의 양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그는 차가운 무표정으로 명령했다.

[전부 꺼내.]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방 안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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