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오겠습니다.]
며칠 뒤, 우르슬라는 황자비가 아이를 낳는다는 연락을 받고 수도로 돌아갔다.
[줄리엣 양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실력이 좋은 의사를 이미 성으로 불렀으니까요.]
우르슬라는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봄이 오자 그는 정원의 가제보를 손보게 했고, 덕분에 줄리엣은 봄의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그날도 습관적으로 정원으로 걸음을 옮기던 레녹스는 먼 발치에서 줄리엣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줄리엣은 혼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보는 젊은 남자와 마주앉아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건 뭐지?]
[아, 저 의사 말입니까?]
뒤따르던 엘리엇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우르슬라 부인이 부른 임시 대타입니다. 부인의 제자라더군요.]
'그 능구렁이가.' 레녹스는 어이가 없었다.
우르슬라의 제자라고 해서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다니.
실력 좋은 주치의 라면 공작가에도 많다.
그런데도 그가 굳이 우르슬라에게 줄리엣을 돌보게 했던 건 귀부인들을 전담하는 부인과 의사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우르슬라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그뿐인 듯했다.
[아!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줄리엣과 대화를 나누던 청년이 그를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럼 아가씨, 또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네, 고마워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의사는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금방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원에 둘만 남자 레녹스는 일부러 모른 척 불쑥 말했다.
[우르슬라의 제자라던데.]
[란델이요?]
남의 속도 모르고, 줄리엣은 활짝 웃었다.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근한 모양이었다.
[맞아요. 친절하고 아는 게 많아요.]
[뭘 물었는데?]
[그…… 그냥 이것 저것이요. 좀 걷지 않으실래요?]
줄리엣은 양산을 쓴 채로 그와 정원을 한 바퀴 가볍게 산책했다.
산책하는 내내 줄리엣은 그가 없는 사이 뭘 했는지 들려주었다. 그가 선물한 망아지 이름을 애플로 지었다거나, 보석 포도란걸 처음 먹어 봤다거나.
시시하고 즐거운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보고받는 그에게는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로서는 오히려 줄리엣이 조금 전의 남자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한 바퀴 정원을 돌고 가제보로 돌아오자 테이블 위에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흰 도자기 그릇 가득 담긴 딸기가 탐스러웠다.
[먹어.]
그가 그릇을 밀어 주자 줄리엣은 소복이 담긴 봄 딸기가 반가운 눈치였다.
봄을 타는지 줄리엣은 입맛이 없어 했는데, 딸기나 석류 같은 새콤한 과일만은 예외였는지 그것만은 곧잘 먹는다고 했었다.
[황자비가 오늘 오후에 아이를 낳았대요.]
줄리엣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우르슬라 부인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실 수도 있다고 란델이 말해 줬어요.]
그 역시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남 얘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조금 전 봤던 장면에 쏠려 있었다.
극도로 낯을 가리던 줄리엣이 처음 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어른거렸다.
[전하,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말해.]
[아이가 정말 아주 싫으신 건 아니죠……?]
[......]
[그냥, 결혼은 아니라도 아이는 생길 수 있잖아요.]
레녹스는 뭐라 대답할 말을 몰랐다.
그는 줄리엣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줄리엣이 기대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 가문의 핏줄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상당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웬만큼 상성이 맞지 않고서야 아이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즉 운이 아주 좋거나 나쁘지 않는 한은, 줄리엣은 괜한 기대를 하는 게 분명했다.
[줄리엣.]
자신도 모르게 냉랭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네게 아이를 바랄 일은 없어.]
[하지만 만약에…….]
[생긴다 해도 낳게 할 일은 더 더욱 없을 테고.]
삑!
갑자기 등 뒤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더니,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정원사가 근처 녹나무 가지를 손질하다가 새 둥지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별일이 아닌 걸 확인하고 무심코 줄리엣을 돌아본 레녹스는 드물게 당황하고 말았다.
[왜 울어?]
[그냥…….]
줄리엣이 별안간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좀 놀라서요.]
그는 기가 막혔다.
이게 울기까지 할 일인가?
놀란 정원사들이 달려와 새 둥지를 다시 나무 위로 올려 줬다.
[이제 됐나?]
둥지 속의 새끼들이 부모 새의 품으로 돌아간 걸 확인하고도 줄리엣은 어쩐지 계속 우울해하는 눈치였다.
[집에 갈래요.]
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붉어진 눈을 한 줄리엣은 생각에 잠긴 채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줄리엣이 비밀스럽게 굴기 시작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 얼마간 줄리엣은 조용히 잘 지내는 듯 보였다.
정원을 산책하거나, 하녀들과 가끔 상점가에 다녀오거나, 망아지를 데리고 성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피하고 있군.]
레녹스는 텅 빈 침실을 보곤 확신했다.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줄리엣은 그날 이후로 그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망아지와 놀다가도 그가 보이면 급히 성으로 들어가고, 일찍 잠들었다거나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는 등.
며칠째 레녹스는 줄리엣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더욱이 부아가 치미는 건 줄리 엣이 다른 가신들이나 그 젊은 의사 놈과는 여전히 스스럼없이 웃고 잘 지내더라는 것이었다.
레녹스는 오늘에야말로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주군께서 잘못하셨겠죠.]
[향수병 아닐까요?]
[집이 그리우신 걸지도요.]
번번이 바람맞는 주군을 보던 보좌관들은 이런저런 의견을 내놨지만 이렇다 할 추측은 없었다.
[아, 혹시 그거 아닙니까?]
그나마 그럴듯한 추측은 내놓은 건 엘리엇이었다.
[아가씨 생일이요.]
[생일?]
[예, 새해 직후였잖습니까.]
[......]
그래 봐야 성 안이었기 때문에 줄리엣이 아무리 그를 피해 다닌다고 해도 그녀를 찾아내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성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그 그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의 빽빽한 서가 사이에서 줄리엣을 발견했다.
줄리엣은 커다란 창문 아래, 푹신한 쿠션을 깔아 놓은 자리(window seat)에 올라가, 다리를 모으고 등을 기댄 채 얌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단정하게 반만 묶어 늘어뜨린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줄리엣의 표정은 몹시 진지해 보여서, 무슨 책을 저렇게 열심히 읽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줄리엣.]
[아?]
고개를 든 줄리엣은 그와 눈이 마주치곤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전하? 여긴 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는 통에 책 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그녀가 보고 있던 페이지가 펼쳐졌다.
펼쳐진 페이지에 풀과 별자리 같은 삽화가 보이는 게, 아무래도 오래된 약초학 서적 같았다.
약초학은 왜?
[여기서 뭐 하는데.]
그는 책을 주워 건네주었다. 그러자 줄리엣은 낡은 책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냥, 책 읽고 있었어요.]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자연스레 창가에 걸터앉는 그를 따라 옆에 앉았다.
그는 조금쯤 심술궂은 기분이 되어 빙긋 웃었다.
[그래? 마주치기 싫어서 숨어 있던 건 아니고?]
[숨긴 누가 숨었다고…….]
줄리엣이 발끈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는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재빨리 입 맞췄다.
익숙한 듯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줄리엣이 그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지금은 싫어요.]
[왜?]
[그게, 그러니까.….….]
줄리엣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말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옮기고 싶지 않아요.]
그는 품 안에 끌어안은 줄리엣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자 줄리엣이 잠시 움찔했다.
과연.
몸이 따끈따끈하다 싶더니, 묘하게 체온이 높은 게 미열이 있는 것 같았다.
감기 기운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아쉬움을 숨긴 채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럼 의사를 부르지.]
[안 돼요!]
소스라치게 놀라며 줄리엣이 일어나려는 그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냥 쉬면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럼 나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대로 있어라?]
[네.]
줄리엣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대는 것도 싫다, 의사를 부르는 것도 싫다.
레녹스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좋아.]
그는 줄리엣을 끌어안은 채로 빙긋 웃으며 자세를 바꿨다.
그는 조금 전 줄리엣이 그랬던 것처럼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창가 자리에 다리를 올리고 반쯤 누웠다.
창가의 윈도우 시트는 그가 다리를 올리고 앉기에는 비좁았다.
줄리엣이 앉았을 때는 꽤 넓어 보였지만 그에게는 다리를 다 펴지도 못할 만큼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불편을 감수했다. 줄리엣이 옴짝달싹 못한 채 제 품 안에 끌어 안겨 있는 게 좋았다.
[대신 얘기를 해.]
[무슨 얘기요?]
[네 생일 선물 얘기라든지.]
[아…….]
줄리엣은 생일 얘기에 별로 놀라거나 서운해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알고 계셨어요?]
사실은 까맣게 몰랐지만. 굳이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
[받고 싶은 거 없어?]
[딱히 없는데….….]
그가 계속해서 채근하자 줄리엣은 머뭇거렸다.
[그럼 돈이요.]
[뭐?]
[정말 조금이면 돼요. 금화 몇 개면….]
줄리엣은 어쩐지 뺨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의아해졌다. 큰 돈도 아니고, 고작 금화 몇 개?
[상점가에서 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하녀들과 외출하면 가끔 상점가에 들른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생일 선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엘리엇한테 말해 두지.]
상점가에서 물건을 살 돈이라고 해 봐야 푼돈일 게 뻔했다.
레녹스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로채근했다.
[그런 거 말고, 생일 선물로 원하는 건 없나?]
[원하는 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줄리엣이 입술을 깨물더니 그를 힐끔거렸다.
아주 잠시, 줄리엣의 푸른 눈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그러면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부탁?]
[그냥, 대단한 건 아니에요.]
[......]
그는 잠시 조금 불안해 보이는 줄리엣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간절히 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눈빛이 마음이 끌려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뭐든 말해.]
[제 부탁은 이거예요.]
그러자 줄리엣이 안도와 서글픔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나중에 제가 뭔가 말했을 때요, 전하가 너무 화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