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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16화 (213/229)

216화.

줄리엣이 말갛게 웃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제가 장난감이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다급히 부정하면서도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줄리 엣이 방을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쩐지 웃고 있는 줄리엣이 낯설었다. 무슨 생각으로 웃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 몇 개월간 그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줄리엣 모나드는 알기 쉬운 상대였다.

감정을 숨길 줄도 모르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게 신기해서.

그래서 눈으로 계속 자신을 좇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내버려 두었다.

사람의 온기와 애정에 굶주려서, 버림받기를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고 손끝만 스쳐도 쉽게 얼굴을 붉히고. 애정을 확인하는 건 쉬웠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두고 자신은 뭐라고 했더라.

새 취미.

[그렇구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그의 죄책감과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줄리 엣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차라리 칼을 맞는 게 덜 아플것이다.

레녹스는 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네게 싫증낼 일은 없을 거라고?

[줄리엣.]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똑똑해질 수 있을까 생각 중이에요.]

[그럴 일 없어.]

자기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고 있는 것과 그녀의 입으로 듣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는 어떻게든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네가 뭘 하든,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알아들어?]

레녹스는 자신이 거의 협박조로 매달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줄리엣은 드물게도 동요하는 남자를 잠시 물끄러미 마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는 상냥한 분이세요.]

[......]

레녹스는 순간 움찔했다.

아무래도 여자의 상냥함'의 기준치는 터무니없이 낮은 모양이었다.

마치 그렇게 믿고 싶은 것처럼, 줄리엣은 되뇌었다.

[그러니까 믿을게요.]

**

우르슬라는 대극장 사건 이후로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절절맸다.

레녹스는 그녀를 당장 쫓아내지는 않았다. 덕분에 우르슬라는 운 좋게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 갔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굳이 우르슬라의 착각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부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줄리엣은 그녀를 두둔했다.

그가 우르슬라를 내버려 둔 이유는 단순히 줄리엣에게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원의 밤’ 이후 줄리엣은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가 승마를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데리고 나간 게 몇 번, 고급 상점과 온실에 몇 번 들렀을뿐.

대신 줄리엣은 부쩍 침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

봄이라도 타는 건지, 뭘 하든 쉽게 피곤해하고, 같이 있다가도 조용해서 돌아보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의사를 부르겠다는 말조차 단칼에 거절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줄리엣은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레녹스는 초조해졌다.

스스로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지만, 봄이 되면서 줄리엣은 좀처럼 예전 같이 그를 보고 환히 웃어 주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옆에 붙어서 무슨 생각인지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잘 보살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반협박조로 줄리엣을 부탁한 다음 최대한 빨리 밀린 일을 처리하고 성으로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달리아'를 찾으러 동부로 간 테아르 남작은 소식이 끊겼고, 지난겨울 수도에 들르지 않은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수도까지 한 번은 걸음 해야 했다.

물론 칼라일 공작이 수도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제는 곧장 그를 불러들였다.

[다들 공작이 신년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했지 뭔가.]

그가 새해 무도회에 불참한 이유는 간단하다.

줄리엣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빴습니다.]

레녹스는 간단히 일축했다.

[공작이 올해 스물아홉인가?]

[그렇습니다.]

[허.]

늙은 너구리 같은 황제는 [그러고 보니 둘째 녀석과 동갑이었지, 2황자는 곧 아이가 태어나는 데-.] 따위의 흰소리를 중얼중얼하며 그를 떠봤다.

[공작은 아직도 결혼 생각이 없나?]

내용과는 달리 시선이 영 불순 했다.

황제가 딸처럼 귀여워하는 조카 딸과의 혼사를 여러 번 거절한 일로 황실이 공작가에 앙심을 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없습니다.]

제국에 공작은 총 다섯이었지만 그중에서 황실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것은 칼라일이 유일했다.

황실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제국 유일의 공작가.

극단적으로 긴 가문의 역사에 비해 공작 부인으로 기록된 이름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칼라일가는 여러모로 독특한 가풍을 자랑해서, 가문에 안주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은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가 결혼을 하게 되면 황제는 누가 공작 부인이 되든 귀찮게 굴 게 틀림없었다.

[......]

아주 잠시, 황제의 말을 다른 귀로 흘리며 그는 흰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잠시뿐이었고, 그는 자신이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수도의 일을 처리하고 북부로 돌아오는 데는 엿새가 더 걸렸다.

[웬 말입니까?]

성문 앞까지 마중 나온 보좌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작이 순해 보이는 헤이즐넛색 어린 망아지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샀어.]

레녹스는 귀찮다는 듯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성을 떠나 있는 내내 그는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보석도 드레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줄리 엣의 우울함을 풀고 흥미를 끌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고, 기사들을 수없이 봐 온 그가 보기에도 줄리엣은 승마에 재능이 있었고, 게다가 어린 동물을 좋아했다.

그래서 간신히 생각해 낸 게 좋은 말이었다.

레녹스는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에 기가 막혔지만 그는 그 외에 줄리엣이 뭘 좋아할지 알지 못했다.

유순하지만 튼튼한, 두 살배기 말은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가 마중을 나왔으리라 기대하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 아가씨는 정원에 계십니다!]

그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본 엘리 엇이 재빨리 알려 주었다.

보좌관의 말대로 정원으로 향하자 재잘거리며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슬라 부인의 제자들이 찾아와서요.]

엘리엇이 슬쩍 알려 주었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정원 한가운데, 우르슬라와 몇몇 여자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모여 있는 귀부인들 틈에서 줄리엣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옅은 헤이즐넛 색 머리칼을 검은 머리끈으로 장식한 채, 목과 손등을 덮는 우아한 레이스가 달린 진초록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은 계절에 어울리게 생기 넘쳐 보였다.

하지만 줄리엣은 그가 가까이 온 것은 알아채지 못한 채,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줄리엣이 부러운 눈으로 홀딱빠져 있는 대상은 어떤 여자의 품에 안긴 어린 아기였다.

[흠흠. 아가씨?]

엘리엇이 헛기침해 부르자 줄리 엣은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아, 전하.]

줄리엣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를 보고 활짝 웃으며 반겨 주었다.

낯선 손님들이 후다닥 물러간 다음에야 줄리엣은 그가 끌고 온 어린 망아지를 발견했다.

[웬 말이에요?]

얌전한 망아지를 발견한 줄리엣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거야.]

[예쁘다…….]

두 살배기 망아지를 쓰다듬으며 황홀해하는 줄리엣을 보고 레녹스는 내심 안도했다.

[이렇게 예쁜 말은 열다섯 살 이후로 처음이에요.]

안장을 얹고 길들이기보다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데에 가까웠지만,

[이름은 뭘로 하죠?]

줄리엣은 그가 없는 사이 기운을 차린 듯 보였고 예전처럼 그를 보고 환히 웃어 주었다.

하지만 깨끗한 마구간에 망아지를 넣어 주고 성까지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화제가 바뀌어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며 줄리엣은 그가 없는 동안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들려주었다.

[무척 귀여웠어요.]

조금 전 줄리엣과 담소하던 무리는 우르슬라 부인의 제자들이라고 했다.

우르슬라를 만나러 들른 제자 중 하나가 어린 아기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아기가 얼마나 예쁜 짓을 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손이 그렇게 작은데 손톱이 있는 게 너무 신기한 거예요.]

신기한가?

레녹스는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애도 아닌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치가 빠른 줄리엣은 그를 힐끔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아기, 싫어하세요?]

지금 아이가 왜 싫으냐고 묻는 건가?

[싫어하지 않아. 별생각 없는 거지.]

[하지만 언젠가 전하도 결혼을 하실 거고, 아이도…….]

[그럴 일 없어.]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말에 줄리 엣의 푸른 눈이 동그래졌다.

[..…왜요?]

레녹스는 문득 넌지시 떠보던 황제가 떠올라 신경이 부쩍 날카로워졌다.

[귀찮아. 성가시고.]

[......]

줄리엣은 어쩐지 움찔했다.

그는 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돌아가지.]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잘 손질된 장미 덤불 산책로를 나란히 걸었다.

올해의 봄은 꽤 따뜻해서 색색의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 있었지만, 걷는 내내 줄리엣은 어쩐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곁눈질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빌어먹을.

분명 그의 대답이 줄리엣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진짜로 애를 좋아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거짓말이라도 좋아한다고 했었어야지.

레녹스는 지금이라도 차분하게 고쳐 설명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말은.]

그러나 그가 뭐라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하지만 전하를 닮은 아이면 무척 귀여울 거예요.]

그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진심인가?

차라리 그녀를 닮은 어린애면 면모르겠다. 흰 뺨과 옅은 색의 머리칼, 동글동글한 푸른 눈을 가진 아이라면 분명 사랑스러울 것이다.

그의 핏줄은 아니겠지만,

[......]

하지만 공작가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불길한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난다.

게다가 세대의 첫 아이는 어미를 배 속에서부터 잡아먹고 태어 그는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깨달았다.

[버러지 같은 것.]

[왜요?]

그는 입모양으로만 싱긋 미소했다.

[내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줄리엣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는 삭막한 가정사를 고백해 해그녀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도,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 같은 이야기를 해서 줄리엣이 질겁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도, 공작님은 좋은 아빠가 되실 거예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줄리엣은 조금 고집스럽게 말했다.

[전하는 상냥하시니까요.]

[......]

[그렇죠?]

그렇게 믿고 싶은 것처럼.

레녹스는 잠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믿고 싶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사실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그는 상냥하지도 않고, 줄리엣에게 아이를 안겨 줄 생각도 없었으며, 좋은 아빠가 되리라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뢰와 애정이 담긴 푸른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슨 대가를 치르든, 어떤 거짓말을 하든지 그걸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끌어 당겼다.

[그럴지도 모르지.]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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