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겨우내 줄리엣이 정성을 쏟던 새끼 눈여우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게 눈에 보이더니, 훌쩍 자란 눈여우들은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먹이를 먹으러 오지 않게 되었다.
줄리엣은 내심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다시 돌아올까요?]
안 와.
[안 와.]
무심코 평소처럼 대답했던 레녹스는 실망하는 줄리엣의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다.
그는 재빨리 수습했다.
[…… 대신 내년 겨울이면 다른 새끼 눈여우가 찾아오겠지.]
[다른 눈여우요?]
[겨울에 얼어 죽는 눈여우는 언제나 있으니까. 어미 잃은 새끼들은 배가 고플 테고.]
[......]
잠시 밝아졌던 줄리엣의 푸른 눈이 충격을 받은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한 건지 몰라 당황했다.
[안 와도 되니까 엄마랑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어요.]
진지하게 말한 줄리엣은 자리에서 일어나 뜰을 걷기 시작했다.
레녹스는 보폭을 맞춰 느리게 걸으며 줄리엣을 슬쩍 곁눈질했다.
아직 차가운 바람 탓에 발그레한 흰 뺨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겁에 질려 있던 여자는 온 데간데없었다.
만족감에 그는 몰래 슬쩍 웃었다.
레녹스는 수도에 사들인 저택일을 깔끔하게 함구시켰다. 대신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없어진 백작저를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서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긴 겨울이 끝나고 북부의 언 땅도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공작성의 일상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봄이 오자 그는 점점 더 성을 비울 일이 많아졌다.
그러자 그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뭘 ?]
[평소에는 뭘 하지?]
[네?]
[내가 없을 때 주로 뭘 하고 지내냐고.]
그는 자신이 없는 사이 줄리엣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북부에서 나고 자란 그가 보기에 공작성에는 젊은 아가씨가 흥미를 보일 만한 여가가 별로 없었다.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산책을 하거나 서재에서 책 읽어요.]
'서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줄리엣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서재의 테이블 위에 수도에서 온 청혼서가 놓여 있었다는 걸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줄리엣은 뭔가 캐묻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냥 정붙일 구석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지.'
그는 망아지라도 사야 하나 궁리했다.
공작성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도착한 건 그날 오후였다.
[정말 무심하시네요, 전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중년 귀부인의 이름은 우르슬라 모트였다.
[세상에, 어떻게 겨우내 수도에 걸음 한 번도 하지 않으실 수 있으신가요?]
레녹스 칼라일은 가장 가까운 피붙이조차 믿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국 여기저기에 눈과 귀를 심어 놓았는데, 우르슬라는 그런 첩자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황제가 공작님의 동태를 수상해하기 시작했답니다.]
우르슬라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본인부터 실력 좋은 의사인데다 제국을 유람하며 재능 있는 전쟁고아들을 데려다가 키우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우르슬라는 인망 높은 유명 인사였다.
덕분에 평민 출신임에도 황후의 살롱부터 콧대 높은 공작가까지 못 드나드는 데가 없는 우르슬라는 훌륭한 정보원이었다.
[저 아가씨가 소문의 밤꾀꼬리 인가요?]
[뭐?]
[수도까지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북부의 공작께서 신분 낮은 애첩에게 홀리셨다고.]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가 막히는군.]
[평판 관리를 소홀히 하셨잖아요. 그 정도는 각오하셨어야죠.]
우르슬라가 눈을 흘겼다.
사람들의 특성상 입맛에 맞는 물어뜯을 거리를 던져 주면 입방아를 찧을지언정 한편으로는 우습게 보면서 만족하는 법이다.
[그런데 올해는 무도회에 참석도 안 하시고, 물어뜯을 만한 스캔들도 던져 주지 않으셨잖아요.]
일부러 대극장 무대에 서는 프리마돈나를 골라 사귀라고 조언한 것은 대극장에 큰 지분을 가진 우르슬라의 계책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빴어.]
더 이상의 평판 관리에 흥미를 잃은 레녹스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는 단지 사람들의 구설수에 줄리엣이 오른다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마음에 드셨나 봐요?]
무슨 소린가 해서 고개를 든 레녹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의 우르슬라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전하, 밤꾀꼬리는 호기심이 많고 성격이 급해서 쉽게 죽는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예쁜 짓을 하다가도 조롱에 가두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리니, 길들이기 여간 고약한 새가 아니죠.]
우르슬라는 의미심장하게 충고 했다.
[그러니 주의하세요. 상냥하게 대하지 않으면 후회하실 거예요.]
**
당초 레녹스는 우르슬라를 적당히 쫓아 버릴 생각이었다.
[세상에, 외출복도 제대로 없는 옷장이라니요?]
하지만 재단사를 불러온다, 옷본을 맞춘다고 며칠 동안 수선을 떨더니 우르슬라는 줄리엣을 살살 구슬려 옷을 잔뜩 맞추게 했다.
[요즘 수도에는 이런 게 유행이 랍니다.]
[......]
겨우내 그가 본 줄리엣의 차림새라고는 잠옷 혹은 잠옷이나 다름없는 밋밋한 무늬의 드레스가 전부였다.
하지만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어색한 듯, 반만 틀어 올린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힐끔거리는 줄리엣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마음을 바꿨다.
[어떠세요?]
[……마음대로 해.]
그렇게 해서 우르슬라는 공작성의 손님이 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줄리엣은 우르슬라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부인이 오래오래 머무셨으면 좋겠어요.]
그가 없는 동안에도 줄리엣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슬그머니 서운한 마음이 들 만큼.
그러기를 2주쯤.
문득 그는 저녁이 되도록 우르슬라와 함께 외출한 줄리엣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줄리엣은?]
[우르슬라 부인과 함께 도버의 대극장에 가셨습니다.]
[후원의 '밤'에 참석하셨으니, 아홉 시 전에는 돌아오실 거라고…….]
레녹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줄리엣이 그 없이 여가를 보내는 것도 그녀가 즐거워하니 되었다 싶었지만 이런 건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후원의 밤'이라니.
우르슬라처럼 순수하게 연극을 을즐기는 인사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자리에는 꼭 허영에 젖어 주제 모르고 설치는 인간들이 있는 법이었다.
레녹스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텃세를 부리고 남일 떠들기 좋아하는 북부의 귀족들 틈에 줄리엣을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귀족이란 것들이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상대에게 얼마나 천박하게 구는지 아는 그로서는, 술에 취한 인간들에게 그녀가 둘러싸인 장면을 상상하는 게 썩내키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모셔올까요?]
[됐어. 직접 가지.]
그는 서둘러 도버로 향했다.
대극장 근처에는 마차가 즐비했다. 연극이 끝난 뒤의 후원 행사 때문에 야외 정원에 불빛과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야외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가 보기를 기대했던 장면은 아니었다.
쨍그랑!
[너, 너 이 천박한……!]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작은 비명이 연달아 들렸다.
술에 취한 듯한 젊은 남자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머리가 덜 깨진 모양인지, 남자는 하인들의 부축을 뿌리치며 악을 썼다.
산산조각이 난 바닥의 유리 조각과 하인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기세에 눌려, 주변 사람들은 좀처럼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가 욕설을 퍼붓는 대상은 은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서 있는 여자였다.
[출신도 모를 천한 것이! 공작눈에 들었다고 뭐가 된 거 같은 모양인데-.]
오도카니 서서 그 폭언을 가만히 듣는 여자는 무표정했다.
줄리엣의 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레녹스는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래로 떨군 그녀의 오른손에서 포도주와는 확연히 다른,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더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아악!]
[줄리엣.]
걷어차인 남자가 머리를 감싸쥐며 뭐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얗게 질린 채 바닥만 보고 있던 여자가 눈을 들어 그를 봤다.
줄리엣은 그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자초지종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치워.]
그는 줄리엣의 어깨를 감싸 쥔 뒤 수군거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정원을 빠져나왔다.
[전하!]
뒤늦게 얼굴이 창백해진 우르슬라 부인이 바깥까지 쫓아 나왔지만 레녹스의 사나운 시선에 입을 다물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뒤늦게야 소식을 들은 극장주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고, 공작 전하! 뭔가 필요하신 것은…….]
[의사나 불러와.]
그는 당장 성으로 돌아가는 대신 의사를 불러오라 지시한 다음 극장 안의 빈 대기실을 찾아 줄리엣을 앉혔다.
손을 베인 줄리엣을 살피는 게 먼저였다.
[손 줘.]
[괜찮아요.]
줄리엣이 소매를 걷고 상처를 살피는 그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잔은 제가 깼거든요.]
[뭐?]
줄리엣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희미한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줄리엣은 손바닥을 조금 베었을 뿐 상처도 얕았다. 다행히 별다른 상처도 없어 다보였다.
[잔은 왜 깼는데?]
[그냥, 깨고 싶어서요.]
[......]
레녹스는 멍청한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조금 전의 얼간이가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걸 보지 않았던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바닥을 뒹굴고 있던 건 줄리엣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애써 침착하며 물었다.
[뭐라고 지껄였지?]
[뭐가요?]
[그 새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그는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의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우르슬라가 평판 관리 운운했을 때부터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그게 뭐 어떤가 싶었지만 그는 줄리엣이 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치 않았다.
줄리엣이 과연 그에 대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가 문제였다.
[별 얘기 안 했어요.]
[줄리엣.]
내내 무표정이던 줄리엣이 그를 빤히 보다가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제가 예쁘대요.]
레녹스는 그녀가 왜 불현듯 웃는지 이유를 몰랐다. 줄리엣이 다음 말을 내놓기 전까지는.
[반반하고 말 잘 듣게 생긴 게, 저보고 전하의 취향에 꼭 맞는 머리 빈 장난감이래요.]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레녹스는 차가워진 것이 제 손인지 조용히 그를 보는 줄리엣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금방 질려서 버림받기 싫으면, 조금이라도 똑똑하게 구는 게 좋을 거랬어요.]
시종일관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줄리엣이 생긋 웃자 뺨에 보조개가 작게 했다.
[공작님은 싫증을 잘 내시니까요.]
차라리 울거나 따져 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