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다.
컹!
서슬에 놀란 하인들은 서둘러 사냥개를 풀고 기사들은 행장을 풀기도 전에 말에 올랐다.
[멀리 가진 않으셨을 겁니다.]
산책 나갔다는 하녀의 말대로 줄리엣의 방에는 짐을 챙긴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정말로 잠시 나간 것처럼 망토만 하나 걸친 채 들판 쪽으로 걷는 걸 문지기가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의 행방은 아는 바가 없었다.
[어디 가실 만한 곳은 없을까요?]
짚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이 성을 비울 때 줄리엣이 누구와 뭘 하고 지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그가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뭘 좋아하는지,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 게 너무 없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레녹스는 무작정 호수 부근으로 말을 몰았다.
왠지 낯을 가리는 여자가 마을이나 큰 건물이 있는 쪽으로는 가지 않을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푸르륵.
말이 거친 숨을 몰아쉴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늦췄다.
정신없이 달려온 곳은 호수 근처의 삼나무 숲길이었다.
영영 도망간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 전하?]
거짓말처럼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삼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조그마한 인영이 그를 발견하곤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가느다란 실루엣, 색이 옅은 치렁한 머리칼과 놀란 듯 동그랗게 뜬 푸른 눈.
[너-.]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된다.
는 걸 알게 되었다.
고삐를 놓고 훌쩍 뛰어내려 가까이 간 그는 간신히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이 날씨에.
놀란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온실에 다녀왔어요.]
[......]
얼핏 그녀가 소중히 손에 쥐고 있는 잡초 비슷한 게 보였다.
[호수 너머로 보이길래…… 금방 다녀올 줄 알았어요.]
순간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겨우내 온실 구경을 하고 싶어 했다.
계절에 관계없이 진귀한 꽃이 핀다는 유리 온실 얘기를 들은 이후로, 넌지시 온실을 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한번도 데려가주지 않았지만.
레녹스는 그걸 금방 떠올리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숲으로 오다가, 길을 잃어서…….]
줄리엣이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열어 봤자 험한 말이 튀어 나올 게 뻔해서 그는 침묵한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 빗속에 얼마나 숲을 헤매고 다녔는지 흰 드레스에는 풀물이 들어 있었고 신발과 밑단은 진흙으로 엉망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헝클어지고 파리한 안색은 금방 기절하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입술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달싹였다.
[이거요.]
줄리엣이 불쑥 그에게 내민 것은 다 말라비틀어진 보랏빛 꽃 몇 송이였다.
안 그래도 시들시들한데다 비를 잔뜩 맞아 초라하고 한심해 보였다.
그런데도 줄리엣은 몹시 귀한 거라는 양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꽃,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이따위 잡초를 가지러 비를 뚫고 왔다고?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인내심이 끊어졌다. 안도감이 휘발되자 남은 것은 분노뿐이었다.
[너 말이야.]
레녹스는 성마르게 젖은 뺨을 훔쳤다.
[죽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래?
이따위 귀찮은 일 벌이지 말고.]
[...]
빗속에서 그가 자신을 비웃는 동안, 줄리엣은 표정 없이 담담한 얼굴로 그를 조용히 마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보랏빛 꽃송이를 생명줄이라도 되는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이 꽃이요.]
아, 빌어먹을.
그의 붉은 눈이 사나워졌다.
한 번만 더 꽃 타령을 하면 목을 비틀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줄리엣은 은근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꽃, 이름은 달리아라고 해요.]
그게 뭐 어쨌다고.
어디에서든 어렵지 않게 볼 수흔하디흔한 가을꽃은 북부 들판 있는 꽃이었다.
[그래서, 뭐.]
말하다가 순간 그는 명치가 확막히는 기분이었다.
[달리아가 누구예요?]
그는 왜 줄리엣이 온실에서 오래 머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이따위 초라한 꽃을 꺾어 왔는지도.
[......]
[이거, 찾으시는 거 같아서......]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줄리엣은 어쩐지 낙담한 듯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풀이 죽은 듯 얌전히 눈을 내리 까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줄리엣은 희한한 방식으로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눈앞에 없으면 속이 뒤집히는 데, 막상 붙잡아 놓으면 화가 나고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잔잔한 파문인 줄 알았던 여자가 온통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세찬 빗줄기가 피부를 아프도록 때리고, 눈앞의 여자가 한기에 어깨를 가늘게 떠는 것을 보고 그는 정신을 차렸다.
[따라와.]
장대비를 뚫고 말을 달려 성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숲의 구조 따위는 훤했다. 그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사냥터지기의 오두막을 찾아냈다.
삐걱.
사냥철에 쓰이는 오두막은 안락한 공작성과는 달리 어둡고 텅비어 있었다.
가구라고는 커다란 벽난로와 바닥의 곰 가죽 깔개, 간이 침상과 모포 몇 장이 전부.
오두막 안은 어둡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사냥철을 대비해 언제든 불을 피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점화장치를 당기자 손쉽게 마른 장작에 불이 붙었다.
화륵.
불을 피운 다음 돌아선 그는 자신이 끌고 온 그대로 문 근처에 가만히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전히 젖은 망토를 입고 있는 줄리엣의 옷깃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이리 와.]
줄리엣은 순순히 불길 가까이 왔다.
이 날씨에 저런 홑겹 망토라니.
얼어 죽기 십상이었을 뿐더러 젖은 망토는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했다.
급히 성에서 나오느라 그 자신의 옷차림조차 엉망이었지만 그런 걸 인지할 새가 없었다.
그는 급한 대로 자신의 사냥용 로브를 벗어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러는 내내 줄리엣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거 좀 버려.]
그는 다 시든 꽃을 그녀에게서 빼앗고 억지로 불 앞에 끌어 앉혔다.
오두막 내부의 냉기가 가시면서 몸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곰 가죽 깔개 위에 앉아서 검은 외투를 걸친 줄리엣은 담요에 푹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가 둘러 준 외투를 가만가만 매만지던 줄리엣이 불쑥 물었다.
[화났어요?]
화가 났냐고?
레녹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는 화가 나 있었지만, 지금은 좀 더 복잡했다.
그는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돌아서서 젖은 셔츠를 벗고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두막 안에는 깨끗한 셔츠가 몇 벌 있었지만 사냥복뿐이라 줄리엣이 입을 만한 건 별로 없었다.
잠시 벽난로의 불빛을 받아 잘짜인 근육이 조각처럼 빛났다.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줄리엣이 뜬금없이 말했다.
[쫓아내지 마세요.]
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가, 이 내 픽 웃어 버렸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전하.]
줄리엣이 목 끝까지 덮고 있던 모포를 내려놓고 그를 향해 돌아 섰다. 덜 마른 머리칼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저는 아둔하고 쓸모도 없지만.
그래도 눈치가 없진 않아요.]
[......]
그는 무슨 말인지 눈치챘다.
줄리엣은 엘리엇이 수도에 저택을 수배하는 것까지는 몰랐겠지만, 사용인들의 수다스러운 입에서 뭔가 들었던 모양이었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고, 그리고 또…….]
머뭇머뭇하던 줄리엣의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좋아해요.]
그는 순간 하려던 말을 잊었다.
그건 그가 들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고백이었다.
비를 흠뻑 맞은 여자가 꺾어 온 말라비틀어진 두 송이 꽃처럼.
[전하가 좋아요.]
하지만 심장이 내려앉는 데는 두 마디면 충분했다.
[......]
그의 침묵을 뭐라고 해석 했는지 툭, 하고 줄리엣이 갑자기 눈물을 떨궜다.
우는 소리도 없이 황급히 뺨을 훔쳐 낸 줄리엣이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전하가 싫다고 하시면, 좋아하지 않을게요.]
[……내가 싫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다고?]
[네.]
그는 조금 웃을까 말까 한 기분이 되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가? 그렇게 마음먹는 대로 접을 수 있는 건가?
아니잖아.
그는 어쩐지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아주 잠시나마 동요했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단순한 이해관계를 좋아해서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갈 곳이 없고, 의지할 친구나 가족도 없고, 사람들도 친절하니까. 고작 그런 이유와 호감을 혼동하는 거다.
그건 그가 길고 지루한 겨울을 보낼 핑계가 필요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배알이 뒤틀리는 걸 애써 무시했다. 그러면 뭐가 어떻단 단말인가. 비록 착각일지라도 줄리 엣은 그를 좋아한다고 했다.
줄리엣은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시는 주제넘게 좋아하지 않을게요. 그냥, 그냥….….]
서툰 말 한마디로 눈앞의 남자를 띄웠다가, 나락으로 처박아놓고,
[여기 있게 해 주세요.]
레녹스는 자각 없이 무방비한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정말로 순순히 줄리엣 모나 드를 놓아주려고 했다.
그건 그에게 있어서 드물게 양심적이고 고귀한 행동이었다.
그는 꽤 괜찮은 도피처를 준비해 두었다.
수도에 저택 한 채와 작은 땅.
화려하진 않더라도 안락하고 평온한 미래라는 선택지가 그녀에게는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뭘 놓쳤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줄리엣.]
그녀는 물기 어린 눈을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녹스는 이렇게 유쾌해진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즐거워졌다.
그는 느긋하게 젖은 뺨에 입 맞췄다.
[네가 자초한 거야.]
벗은 어깨 위로 더운 숨이 내려앉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