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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13화 (210/229)

213화.

[우르슬라 부인이 전하의 평판을 걱정하더군요.]

우르슬라는 그가 수도에 심어둔 첩자 중 하나였다.

[별 참견을 다 하는군.]

[예, 하지만 신년 무도회에 불참하셨잖습니까. 수도에 칼라일 공작이 애첩에게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

레녹스는 잠시 의아해졌다. 애첩?

[뭐, 그건 그렇고.]

조카를 놀리듯 빙글거리던 테아르는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기네스 후작의 수집품 중에는 '달리아'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레녹스는 어떤 물건을 찾고 있었다.

[그 아티팩트 말이지요.]

‘달리아'는 공작가의 보물이자 희귀한 보라색 사파이어가 세공된 보석관의 이름이었다.

공작가 내에서도 달리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그리고 그 보관에 얽힌 비밀을 전부 아는 것은 칼라일 공작 본인과 오랫동안 가문에 충성해 온 테아르, 두 사람뿐이었다.

[아티팩트에 환장한 기네스 후작이라면 분명 사들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악령이 깃든 고대 유물은 적절한 재능을 가진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들 중 하나인 기네스후작은 쓰지도 못할 아티팩트를 광적으로 수집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인위적으로 계약자를 만들어 낼 실험을 한 모양이지만요.]

세상에는 몇 개나 되는 아티팩트가 존재했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달리아 하나뿐이었다.

오랜 추적 끝에 테아르는 달리 아의 소재지를 남부의 기네스 후작과 동부의 루체른, 이렇게 두가지로 좁혔다.

기네스 후작가와 공작가 사이에 벌어진 영지전은 오랜 이권 다툼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이 때문이었다.

[그 뱀이 남부에 없다면 루체른에 있을 겁니다.]

테아르는 자신했다.

공작가의 보물에 깃든 뱀 악령은 다른 아티팩트의 악령들과는 격이 달랐다.

미혹과 기만의 능력을 가진 그 뱀은 사람을 홀리고 기억을 세뇌할 뿐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괴물이었다.

보관 안에 갇힌 뱀은 수십 년주기로 혼란을 틈타 달아났다가 다시 공작가로 붙잡혀 오곤 했다.

[몇 세대 전에는 퍼스트본의 저주라고 불렸습니다.]

오만한 칼라일 가문의 가주들이 뱀이 도망칠 때마다 끈질기게 추적을 반복해 온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다.

가문에는 초대 가주 이후로 뱀이 걸었다는 장자의 저주가 존재했다.

한 세대에 처음 태어나는 아이는 몹시 강한 자질을 타고나는 데, 모체의 마력을 빼앗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첫 아이를 죽이든지, 혹은 아내를 잃든지. 선택을 강요당한 칼라일가의 사람들은 적의를 품고 뱀을 쫓았던 모양이다.

물론 레녹스 칼라일은 저주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결혼할 생각도 자식을 낳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공작가에 적의를 품은 존재가 멀쩡히 활개치고 세상에 돌아다니는 사실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다.

[남부에 없었다면 남은 건-.]

[루체른이군.]

[예.]

오래 전, 루체른에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소녀가 있었다.

법황청은 끝까지 ‘치유의 권능’이라고 우겼지만 실상은 신의 능력이 아니라, 일개 사제 후보생이었던 '제노비아' 라는 소녀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제노비아는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고, 악마적인 힘을 발휘하다가, 어느 순간 의도적으로 살해당한 것처럼 사라졌다.

그 뱀이 신의 영토라는 루체른에 있다고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모나드 백작가에도 아티팩트가 존재했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테아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달리아'는아니겠지만…… 기네스 후작이 그 아가씨를 정령사라고 확신했던 건 그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레녹스는 멈칫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는 고인이 된 모나드 백작부부를 만난 적 있습니다. 소탈하지만 진짜 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테아르는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추측이지만 그 집안의 의비극이 아티팩트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말입니다.]

레녹스는 조금 전부터 들리던 문 밖의 인기척을 의식하고 있었다.

복도를 서성거리던 익숙한 작은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춘 게 신경 쓰였다.

[…… 달리아나 찾아내.]

힘주어 말한 다음 그는 벌컥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차 쟁반을 든 채 막 노크하려던 줄리엣이 서 있었다.

[예, 반드시 찾아오지요.]

테아르는 놀란 줄리엣에게 눈인사하며 씩 웃었다.

* * *

다음 날 저녁, 어쩐지 그의 눈치를 살피던 줄리엣이 조심스레 물었다.

[달리아가 누구예요?]

역시 엿들었군.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나마 전부 들은 건 아닌 듯싶었다.

달리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티팩트의 이름이었으므로,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려면 아티팩트니, 퍼스트본의 저주니 하는 얘기를 설명해야 했다.

[무척, 간절히 찾으시는 것 같아서…….]

[그래서 대신 찾아 주려고?]

레녹스는 빙긋 웃었다.

습관대로 빈정거리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줄리엣은 흠칫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주제넘었다면 미안해요.]

줄리엣은 습관처럼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침실 안은 더울 정도였지만 줄리엣은 항상 옷깃이 목 끝까지 올라오고 소매를 덮는 옷을 고집했다.

줄리엣은 조명을 밝게 하는 것도 싫어했고,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도, 그가 벗은 어깨에 입맞추는 것도 싫어했다.

그녀는 싫어하는 게 아주 많았다.

패검한 성인 남자도, 좁은 방안에 혼자 있을 때 문을 닫는 것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 하는 거였어.’

그게 몸에 남아 있는 상처 때문임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새삼스레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아니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말입니다.]

테아르가 다녀간 뒤로, 그는 줄리엣 모나드가 얼마나 끔찍한 지옥을 겪었는지 곱씹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었는지, 스스로에게 넌더리가 났다.

기댈 데 없는 여자가 그에게만 경계를 허물고, 첫눈에 반한 듯 구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녹스는 마른 눈으로 새근거리는 여자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는 겨우내 몰두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줄리엣 모나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족도 가문도 잃고, 갈 데 없어진 신세. 그 지옥에서 꺼내 줄사람이면 누구든 좋았던 거겠지.

'……누구든지 상관없었겠지.'

간사하게도, 속이 뒤틀렸다.

그가 지루한 겨울을 보낼 흥밋거리가 필요했듯, 줄리엣도 필요에 따라 그에게 웃어주었을 뿐이다.

전혀 화가 날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배알이 뒤틀렸다.

줄리엣이 잠들기를 기다린 그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곧장 서재로 향해 비서에게 지시했다.

[엘리엇.]

[예?]

[수도에 저택을 알아봐.]

* *

매서운 추위도 정점을 지나자 한풀 꺾였다.

그와 동시에 레녹스 칼라일은 한량 노릇을 그만두고 성실한 영주로 복귀했다.

달칵.

카우치에 길게 누워 예산안을 검토하던 레녹스는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뭔데.]

테이블 위에 차 쟁반을 내려놓은 부기사단장이 공손히 대꾸했다.

[이건 찻잔이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전하.]

[그건 나도 알아.]

그의 표정이 싸늘해지자 밀란이 고개를 으쓱했다.

[모나드 양이 오후에는 차를 같이 마실 시간이 되시냐 물으셨습니다.]

[바쁘다고 전해.]

그는 성의 없이 대꾸하곤 다시 예산안으로 관심을 돌렸다.

[일주일째 똑같은 핑계는 식상하지 않을까요?]

[그럼 없다고 하든지. 적당히 둘 러대.]

일주일째, 그는 노골적으로 줄리엣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침실로 끌어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연히 마주치는 일조차 피했다.

[모나드 양은 본인이 뭔가 잘못한 줄 아십니다.]

줄리엣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한동안 그의 동선 주변을 기웃거리더니, 이제는 별관에 틀어 박혀서 가끔씩 그의 소식을 묻는 모양이었다.

매몰찬 주인을 지그시 노려보던 밀란이 불쑥 말했다.

[아쉽군요. 주군께서 제 동생이었다면 흠씬 두들겨 줄 수 있을 텐데요.]

온화한 부단장은 정말 애석하다는 얼굴이었다.

[……기가 막히는군.]

레녹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 줄리엣 모나드를 남부에서 데려왔을 때 공작가의 가신들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불길한 여자입니다.]

[기네스 후작에게 무슨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렇게 말했던 게 누군데?

그런데 고작 몇 달 사이에 표정을 싹 바꿔서는 그녀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굴고 있지 않은가.

줄리엣 모나드가 거만한 북부 기사들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신통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성 안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그녀를 피해 다니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옷을 갈아입으며 그는 짧게 지시했다.

[사냥개나 준비시켜.]

그러곤 그 길로 기사들을 대동하고 그는 숲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전보다는 날이 풀려 슬슬 마수가 활동할 계절이었다.

한동안 마물을 쫓다 보니 훌쩍시간이 지나 있었고, 그들이 다시 성으로 돌아온 건 닷새 뒤였다.

오전 나절부터 부슬비가 내렸기에 성 사람들은 기사들이 도착하자마자 비를 피할 도구를 들고 도개교까지 마중을 나왔다.

흥분한 사냥개와 말들을 도로 마구간으로 데려가느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성으로 걸음을 옮기던 레녹스는 잠시 사람들을 훑었다.

[......]

[주군?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지난 몇 달간 익숙해진 여자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았다.

반색하며 달려올 때는 언제고.

몇 주째 넘게 노골적으로 피해 다닌 데다가 말 한마디 없이 성을 떠나기까지 했으니 성인이라도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못내 아쉬운 시선을 거뒀다.

[주군, 지난번 말씀하신 수도의 저택 말입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온 비서가 재빨리 고했다.

건국 황제가 직접 하사했다는 유서 깊은 모나드 백작가의 저택은 모나드 백작부부가 죽은 직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헐리고 조각나 팔렸다.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저택을 매입했습니다. 생각보다 출혈이 컸지만요.]

엘리엇은 급히 저택을 사들이느라 힘들었다고 생색을 냈다.

레녹스는 문득 차라리 줄리엣이 자신에게 화가 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봄까지 남은 기간 내내 그녀를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봄이 오면 수도에 마련한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그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터였다.

……다시는.

끼잉.

새끼 짐승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린 레녹스는 아차 싶었다. 그는 무심코 성의 뒤뜰에 와 있었다.

미치겠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몇 달 만에 습관이 된 게 무서웠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거기에는 그가 마주치리라 예상했던 여자는 없었다.

캥!

풀숲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새끼 마수 두 마리가 인기척에 반갑다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가, 그를 보고는 놀라 도망쳤다.

[......]

뭔가 이상하다.

불현듯 그런 직감이 관통했다.

그는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 성큼성큼 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침실이나 서재, 응접실.

그가 찾는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성 안에 줄리엣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춥고 흐린 날씨에 을씨년스럽게 부슬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저, 그게…….]

하녀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침에 산책을 가신다고 나가셨는데…….]

그 이후로는 본 사람도 없고, 찾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고작 며칠 성을 비웠다고 여자 하나를 놓쳐?]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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