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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12화 (209/229)

212화.

북부의 겨울은 길었다.

겨울동안 칼라일 공작의 일과는 틀에 박힌 듯 단조로웠다.

공무를 다 처리하면 겨울철에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럴때면 공작은 마수토벌을 핑계로 훌쩍 사냥을 떠나서 며칠이고 성에 돌아오지 않고는 했다.

혹은 그조차도 지겨워지거나 신년 연회가 가까워오면 수도에서 짧은 관계를 즐기다 싫증을 내고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두가지 모두 그의 선택지에 없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전하.]

불도 켜지 않은 침실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흠칫 소스라치다가, 그를 알아보고는 잠에 취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돌아오셔서 기뻐요.]

[......]

매번 질리지도 않는지 그가 돌아오면 웃으며 반기는 게 신기했다. 누군가 밤새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이상한 감각이었다.

여자는 말수가 적고 겁이 많았다. 그러나 묘한 방식으로 그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레녹스 칼라일은 타고난 외모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만큼이나 마음대로 움직이기 쉬운 게 또 없었으니까.

하지만 줄리엣 모나드를 유혹하는 데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애정에 굶주린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레녹스는 잠시 불 꺼진 벽난로에 시선을 주었다.

[언제 돌아오실지 몰라서…….]

여자가 변명하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레녹스는 여자의 일방적인 애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왜 어떤 사람들이 진귀한 동물을 잡아다 길들이는데 열광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이런 표정을 짓나보지.

레녹스는 무감한 눈으로 열에 들뜬 여자의 푸른 눈을 마주보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그는 여자의 존재가 생각보다 성가 시지 않다는 점에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적당히 때를 봐서 수도로 돌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줄리 엣은 공작성에 줄곧 남아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존재가 거슬리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 관계가 어떻게 끝이 날지 알고 있었다.

그는 몹시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맹목적인 애정을 보내던 상대가 그에게 기대를 품기 시작하면 대개 그 관계는 끝장이 났다.

[줄리엣 모나드.]

[네?]

레녹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여자를 잠시 노려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지금의 이 미적 지근하고 온건한 관계를 깨뜨리기 싫었다.

게다가 줄리엣 모나드는 영리하고 뭐든 배우는 게 빨랐고, 그는 아주 조금만 더 감질나는 기분에 취해 있고 싶었다.

[하나만 약속해.]

그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뭘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고.]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푸른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그는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것만 약속하면 뭐든 쥐어주지.]

자신은 별로 의지할만한 상대가 못된다.

제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감정을 강요하다가, 종국에는 멋대로 상처받겠지.

[약속할게요.]

줄리엣은 억지 같은 그의 요구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녹스는 잠시 그녀가 말뜻을 을알아듣기나 한건지 의심스러웠지만 이내 모른 척 했다.

'계절이 긴 탓이지.'

이게 다 올 겨울이 혹독하리만큼 추운 탓이다. 북부 이곳저곳에 출몰하는 마물들조차 얼어죽어 버렸다.

덕분에 그는 성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느샌가 사냥 대신 침실을 벗 벗어나 성의 객식구로 머무는 여자와 소일거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과가 되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그는 애써 어떤 직감을 무시했다.

달칵.

[호수 너머에 온실이 있대요.]

흰 체스말을 옮기며 줄리엣이 재잘거렸다.

겨울동안 북부 공작성에는 달리 유희거리가 없었다.

[제가 이기면 온실에 같이 가주실래요?]

북부에는 그런 게 꽤 남아있었다. 사치스러운 극장이라든지,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이 잔뜩 자라는 유리 온실이라든지.

[마음대로 해.]

줄리엣은 의외로 체스도 카드놀이도 수준급이었다.

이럴 때마다 그는 새삼스레 그녀가 몰락 귀족가 출신이라는 걸 되새겼다.

그녀는 이따금씩 이런저런 내기를 하자고 졸랐다.

그로서는 유리 온실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이라, 줄리 엣이 유리 온실을 가진대도 상관없었다.

[그럼 전하가 이기시면 - ]

[네가 먼저 입 맞추는 걸로 하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던 줄리 엣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그가 내기를 승낙한 건 나른한 오후가 지루해져 장난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체크.]

[아……?]

레녹스는 여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오르는 걸 즐거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줄리엣은 체스에 능하지만, 지나치게 우아한 방식으로 이기려고 들었다.

[내가 이긴 것 같은데.]

레녹스는 장난스레 요구했다.

[내기 대가를 받기로 했잖아.]

[……그,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은 줄리엣은 잠시 발끈했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에게 부탁했다.

[눈을 안 보면, 좀 쉬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러니까 잠시만 전하가 눈을 감아주시면……….]

[싫은데.]

매몰찬 거절에 여자는 잠시 울상이 되었다.

[웃지 마세요.]

레녹스는 소리없이 웃다가 바로 들켰다.

하지만 바로 저 난처한 표정을 보고싶어 승낙한 내기인데, 눈을 감아버리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됐어요.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한다'더니. 줄리엣은 손차양 하듯 왼손으로 자기 눈가를 가렸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여자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딴에는 눈을 마주치지 않겠다고 한 행동이겠지만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이 더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손바닥 아래로 붉은 입술이 달싹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벌어진 입술 새로 흰 치아와 작은 혀도.

줄리엣은 정말로 눈을 마주치기가 죽기보다 싫었는지 손등으로 눈을 가리곤 조심스레 입맞춰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느릿하고 신중하게 맞닿았다.

[......]

레녹스는 인내심을 발휘해 그 느릿한 동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입술이 떨어지기 직전, 작은 혀가 슬쩍 그의 아랫입술을 감질나게 건드리고는 급히 멀어졌다.

하지만 그의 기준에서 이건 입맞춤 축에도 못들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그는 인지하기도 전에 가는 허리를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제 됐-]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노골적인 입맞춤에 놀란 줄리엣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줄리엣 모나드라는 여자를 아직까지도 완전히 신용하지 않았다.

별별 희한한 암살 위협에 시달려 온 그는 줄리엣 모나드가 기네스 후작 또는 그의 정적들 중 하나가 보낸 살수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연기라면 천부적인 수준이다.

그정도 천재라면 까짓거 모른 척 한 번 찔려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눈이 마주치거나 손끝이 스치기만해도 얼굴을 붉히는 주제에.

이렇게까지 감정을 못 숨기고, 속을 알기 쉬운 상대가 어디 있을까.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알기 쉽고, 속내를 못숨기고, 유치하다고 레녹스는 생각했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똑똑.

[전하, 테아르 남작입니다.]

순간 정신을 차린 줄리엣이 후다닥 그에게서 멀어졌다.

레녹스는 불만스럽게 문 쪽을 한 번 노려보고는 대꾸했다.

[들어와.]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군.]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안개처럼 흐리고 온화한 인상의 중년남자였다.

[… 저는 가 볼게요.]

뺨이 붉어진 줄리엣은 테아르남작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다급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휘익.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테아르남작이 야유하듯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새 취미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전하.]

남작의 목소리에는 비난의 어조가 섞여있었다.

[나한테 취미를 찾으라고 충고 한 건 남작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하긴 했군요.]

테아르는 기억을 더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테아르 남작은 공작가의 오랜 충신 가문 출신의 기사였다.

레녹스는 공작위를 탈환하면서 제 자리를 무단점거하고 있던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 대의 가신들까지 모조리 숙청했지만 테아르의 가문은 살아남았다.

남작은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의 숙부이기도 했다.

조카에게 부단장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 유람하며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남작은 지금도 공작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제가 취미를 찾으라고 말씀드렸던 건 사냥 외에 다른 건전한 취미를 말씀드린 겁니다.]

밀란이 줄리엣에 대해 제 숙부에게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남부에서 기네스 후작의 실험 체를 주워오시는 게 아니라요.]

레녹스는 저도 모르게 여자를 를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볼품없이마른 몸과 텅 빈 눈.

기네스 후작은 아티팩트를 광적.

으로 수집하고 그걸 사용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정령사의 재능을 을보이는 어린 남녀를 데려다 혹독하게 학대했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몰라.]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단언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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