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11. 에필로그.
[그 여자를 살리고 싶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수라장이 된 텅 빈 연회장 가운데, 석상이 된 것처럼 검은 머리칼의 남자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무릎을 적시는 붉은 액체.
가 핏방울인지 포도주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줄리엣.
그가 아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무릎에 누워, 세상 무엇보다 평온하게 잠든 여자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거라는 것.
다시는 그를 보고 웃어주지 않을 것이며, 용서를 빌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
[그 계집을 살리고 싶지?]
핏발선 눈으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기분 나쁠 만큼 미끈한 얼굴의 뱀이 이 죽거리고 있었다.
핏발선 눈으로 남자는 악령을 노려보았다.
[꺼져.]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뱀은 그의 연인을 되살릴 능력 따위 없다는 걸.
[그래 맞아, 나는 그 여자를 살리지 못해.]
뱀의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치마가 붉게 물들어 있다는 걸 제외하면 평온하게 잠든 여자는 순백의 신부처럼 보였다.
[대신,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지는 알고 있지.]
간사한 뱀이 귓가에 속삭였다.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다니까?]
“전하.”
레녹스 칼라일은 눈을 떴다.
'꿈인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묘하게 몸이 무거워서 그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두통보다 거슬리는 건 지난밤부터 기억도 나지 않는 불쾌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거였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레녹스는 황궁의 홀로 향했다.
검은 깃발이 여기저기 내걸려 있는 황궁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재판을 앞두고 2황자가 죽은 것이다.
황제는 일부러 장례식을 크게 치렀다. 사흘 동안 열린 장례 미사는 장례식이라기보다는 여느때의 연회와 다를 게 없었다.
“세상에, 뻔뻔하기도 하지.”
“결국 여죄가 밝혀질 게 두려우니 자진한 게 아니겠어요?"
요란한 음악과 춤만 없다뿐이지 귀족들이 모여들어 입방아를 찧는 건 똑같았다.
“쉿, 칼라일 공작이에요.”
열심히 2황자를 성토하던 귀족들은 홀을 가로질러 오는 공작을 발견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수군거렸다.
“사실은 공작이…….”
죽은 2황자가 대놓고 칼라일 공작을 적대시해서 뒤에서 누명을 씌우는 등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렇게 서둘러 와 줘서 고맙네, 공작. 공사가 다망할 할 텐데…."
황제는 굳은 얼굴로 칼라일 공작을 맞이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레녹스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사실 그는 진심으로 짜증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이따위 일 때문에 그는 벨로트에서의 계획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
“그럼 회의장에서 봅세."
황궁 안쪽의 회의장으로 칼라일공작가의 행정관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사실상 커다란 장례식은 명분에 불과했다.
“그럼 엘파사의 광산 대여와 노토의 은광 채권 문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쿵.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으며 공작가의 수석비서인 엘리엇이 우아하게 선언했다.
2황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공작가와 황실은 보상문제를 두고 열심히 입씨름을 했다.
엘리엇이 화려한 언변으로 황궁의 행정관들을 요리하는 동안 레녹스의 신경은 온통 창 밖을 향해 있었다.
그의 컨디션이 저조한 이유는 하나였다.
수도에 온 이래, 바쁜 일정 때문에 지난 사흘간 그는 줄리엣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엊그제 저녁, 황궁 뜰에서 마주쳐 스치듯 잠시 입 맞춘 게 전부.
게다가 엊그제부터는 꿈자리마저 사나웠다.
'뭔가….’
불길한 악몽이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게 다 줄리엣이 없는 탓이다.
레녹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로 장례식이 사흘째로, 잠시 후면 이 지겨운 절차도 끝나고 줄리엣을 데리고 돌아갈 수 있다는 거였다.
그는 오늘 수도를 떠나면 향후 몇 년은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도 그건 볼 만 했지.'
험악한 표정으로 비딱하게 앉아 있던 레녹스가 픽 하고 웃었다.
사흘 동안의 장례 연회 동안 단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은, 장례 이틀째 황궁에 모습을 드러낸 줄리엣 모나드였다.
- 상심이 크시겠어요, 황후 폐하.
우아한 비둘기색 드레스를 입고 사뿐사뿐 홀에 나타난 줄리엣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황후를 위로했다.
물론 가장 볼만했던 건 그녀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전까지 줄리엣 모나드가 죽었다느니 어쨌다느니 헛소문을 지껄이던 인간들은 일제히 할 말을 잃었고, 이어서 그녀와 동행한 리오넬 르바탄을 보고는 경악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줄리엣은 수도의 모나드 백작저에 들러 유모와 하인들을 챙기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단단히 벼른 엘리엇 덕분에 회의실의 합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안녕, 레녹스.”
사흘 만에 보는 줄리엣은 무척이나 생기 넘쳐 보였다.
“누구는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 보네.”
“네, 즐거웠어요.”
누구는 시간이 안 가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레녹스는 싱긋 웃으며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던 줄리엣이 멈칫했다.
“레녹스?"
“왜?”
줄리엣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대뜸 그의 뺨을 붙잡았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뭐가?”
“열이 펄펄 끓잖아요?”
*
“수호열입니다.”
공작성의 주치의는 단호하게 진단을 내렸다.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 게이트를 열어 최대한 빠르게 북부 공작성으로 돌아왔지만 사흘째 그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무슨 열?”
“아니, 그건 어린애들이나 앓는 열감기잖습니까?”
기막히다는 듯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엘리엇의 말대로였다. 수호열은 주로 열 살 이하의 어린 시절에 앓는 가벼운 열감기였다.
주치의인 힐베리 경이 어깨를 를으쓱했다.
“예. 하지만 제가 알기로 공작님은 수호열을 앓은 적 없으시잖습니까.”
“어릴 때 열감기 걸려본 적 없어요?”
“없어.”
“한 번도?”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한쪽에서 주드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하고 중얼거리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갑자기 줄리엣이 눈을 깜박였다.
“엠마랑 샬롯을 만났었는데……
그때 옮았나 봐요.”
줄리엣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때 입 맞추는 게 아니었는 데…….’ 따위의 소리를 하며.
“어흠, 어쨌든 그냥 수호열은 수두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릴 때 앓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통은 몸속의 마력이 충돌하면서 열이 나는 겁니다.”
공작님의 경우는 오러겠지요.
증상은 열감기와 같아서, 다행히 발열과 오한 정도일 거라고 주치의는 설명했다.
“그래도 성인이라도 일주일간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레녹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주일?”
“저, 적어도 앞으로 사흘은 안정을 취하셔야 …….."
주치의는 점점 말꼬리를 흐리더니 은근슬쩍 줄리엣의 뒤쪽으로 숨더니 줄행랑을 쳤다.
“그럼 벨로트로 돌아가면 되겠군.”
방 안에 둘만 남자 옷을 다시 걸치며 레녹스가 주장했다.
어차피 요양은 거기나 성이나 똑같지 않은가.
하지만 줄리엣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요.”
“왜?”
“그냥 열감기이긴 하지만 얌전히 누워서 쉬지 않으면 오러에 이상이 생길지도 모른대요."
그가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수호열로 몸이 망가졌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성가신 주치의 같으니.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레녹스는 품 속에 넣어둔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 놨는데 뭐 하나 뜻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이라.'
레녹스는 언제까지 침대 신세를져야 할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가늠해 보다가 문득 자신이 열감기에 걸린 시점이 뒷맛이 나쁜 꿈을 꾸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는 걸 깨달았다.
“빨리 누워요.”
줄리엣이 엄한 얼굴로 침대를 가리켰다.
레녹스는 그런 줄리엣을 지그시 보다가 말했다.
“옮을 수 있잖아. 나가 있어.”
“힐베리 경이 괜찮댔어요. 누구랑은 다르게 어릴 때 수호열을 앓았거든요. 잘 감시하랬어요."
……… 기특한 주치의 같으니.
레녹스는 주치의의 급여를 올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빙긋 웃다가 눈을 감았다.
* * *
눈 내린 성의 뒤뜰을 가로지르던 남자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안 먹어? 응?]
끼앙?
소곤소곤 여자의 말소리와 짐승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으로 막 귀환한 기사단을 맞으러 공작성의 사람들이 정신없 없이 바쁜 오후였다.
인적 없는 뜰 구석에서, 웬 여자 하나가 흰 솜털을 가진 짐승 두 마리를 열심히 돌보고 있었다.
[......]
레녹스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옅은 헤이즐넛 색 머리칼.
북부의 겨울은 혹독했고, 어미를 잃은 새끼 눈여우들이 먹이를 찾아 성까지 내려오는 일은 흔했다.
여자는 누군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맛없어? 그래서 그래?]
여자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여우 새끼들은 낑낑거리며 그녀의 손에 머리를 부비고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먹였는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귀엽게 생겼지만 마수 새끼라 보통 까탈스러운 게 아닌데, 용케도 길들인 모양이었다.
저벅.
그는 별생각 없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캥!
애교를 부리던 여우 새끼들이 소스라쳤다.
그렇지. 저게 정상이지.
눈여우들은 후다닥 달아났고, 여자 역시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하얗게 질려 있던 여자의 눈이 그를 발견하고는 크게 뜨이더니, 그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생각보다 앳된 얼굴의 여자는 낯이 익었다.
뜻밖에도, 푸른 눈에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환하게 웃는 여자는 누구든 마주 웃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어렴풋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레녹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는 막 원정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녀를 맞닥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레녹스는 자신의 성 안에 이런 여자가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전 그가 충동적으로 남부에서 데려온 포로였다.
그가 찾는 아티팩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금방 흥미를 잃고 잊어버렸지만.
아직 공작성에 머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작 전하.]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그녀가 인사했다.
'순진한 건지 교활한건지 모르겠군.’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저한테 뭘 했다고 저렇게 반기나. 애처로우면서도 우스웠다.
자신을 반기는 모습이 어쩐지 조금 전 여자의 손 아래에서 배를 보이고 뒹굴거리며 애교를 부리던 여우 새끼와 겹쳐 보였다.
저벅.
[주군.]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여자가 소스라쳤다.
[후발대까지 귀환했습니다. 바로 보시겠습니까?]
가까이 온 것은 공작의 부관이었지만, 여자는 왠지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제야 기억났다.
여자의 이름은 줄리엣이었고, 과거에는 제법 이름있던 백작가의 딸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그녀는 패검한 낯선 성인 남자를 왠지 두려워했다.
[저, 그럼…….]
인사라도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던 여자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금방 별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허, 누굽니까?]
못 보던 얼굴인데, 하녀인가요?
부관이 감탄하면서도 의아한 듯 물었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 레녹스는 싱긋 웃더니 목을 죄고 있던 제 복의 여밈을 끌렀다.
그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애처럼 천진하기까지 했다.
[새 취미.]
[예?]
레녹스는 굳이 부연하지 않았다. 그는 부관의 어깨를 한번 두드린 다음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발걸음과는 반대로 붉은 눈이 잔인하게 반짝였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