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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10화 (207/229)

210화.

북부의 호수에 악령이 깃든 티아라를 빠뜨린 그 날, 뱀이 몰고 왔던 긴 겨울도 끝났다.

하지만 신기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라졌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은 줄리엣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직접적으로 뱀의 정체를 알고 있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뱀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봄에 내린 폭설은 단순한 이상기후였고, 뱀이 뒤에서 꾸민 일들은 모두 2황자의 단독범행이었다는 식으로, 아예 처음부터 뱀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기억에서 잊혀지면 존재도 사라지는 거야.)

그래서 줄리엣은 그녀의 나비들이 성공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고마워. 정말로.”

(……으흠.)

진심으로 한 감사 인사였는데 나비들은 괜히 딴청을 부리며 줄리엣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비들이 뱀을 쫓아줬으니 줄리엣도 약속을 이행해야 했다.

별장까지 젖은 채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줄리엣은 신발을 벗어두고 맨발로 물가의 자갈을 밟았다.

벨로트의 숲속.

이 작고 인적 없는 계곡이 나비들이 말하는 ‘부드러운 물'이라고 했다.

"물은 그 자체로 강력한 소환진이니까요.”

줄리엣이 자문을 구하자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런 가설을 들려주었다.

"'부드러운 물'이란 고대의 악령들이 소환될 때 사용됐던 물이 존재하는 특정한 장소일 겁니다.”

악령들이 이곳에 불려올 때 각각 특정한 지역의 물이 매개로 로쓰였는데, 나비들의 경우는 이 작은 계곡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북부 호수에 비하면 좀 작지 않나?'

똑같이 악령이 소환된 '물'인데, 눈앞에 보이는 벨로트의 계곡은 작고 평범했다.

정말일까 의심스러웠지만 나비들은 분명히 말했었다.

(우리, 여기를 통해서 왔어.)

소환진이란 건 정말 물이기만 하면 아무거나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새벽에 이러고 있는 거지.’

악령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티팩트만 먼저 처리하면, 보라색 보관을 호수에 던져 처리했던 것처럼, 나비들의 속박을 풀려면 은열쇠를 이 계곡에 담가야 했다.

치마가 젖지 않게 옷자락을 잘 정리한 다음, 줄리엣은 야트막한 계곡 안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계곡물은 줄리엣의 종아리 정도 밖에 오지 않았지만 여름인데도 몹시 차가웠다.

이쯤이면 됐겠지 싶어 멈춰서 얕은 물을 보곤 잠시 갈등했다.

열쇠를 떨어뜨리려던 줄리엣은 좀 더 깊이 가야할까?

뱀을 가뒀던 아티팩트, 보라색 보관을 없앨 때 줄리엣은 나비들이 가르쳐준 대로 그걸 호수에 던져 넣었다.

북부의 호수는 수심이 매우 깊었다.

줄리엣은 검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보관이 어떻게 됐는지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최소한 누구도 다시 저 보관을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기는 계곡이라 수심도 얕은데.

'그냥 물에 담그면 되는건가?'

줄리엣은 손에 쥔 열쇠와 얕은 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계곡은 은아무래도 검은 호수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했다. 줄리엣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수백년 동안 강대한 악령을 노예처럼 묶어두던 물건이다.

평범하게 물에 열쇠를 빠뜨린다고 강력한 속박이 뿅하고 풀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머뭇거리던 줄리엣은 문득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한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이제 네 차례이니 어서 약속을 이행하라고 닦달하며 법석을 떨줄 알았는데?

“왜 그래?”

나비들은 어쩐지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계약자, 진짜 약속 지켜?)

(정말 풀어줄거야?)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풀려나기 싫어?"

(아니…….)

그럼 뭐가 문제일까? 줄리엣은 어리둥절해졌다.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줄리엣을 위협했던 건 나비들이었다.

(그치만 우리…… 엄청 똑똑하고 쓸모 있는데?)

(이제 뱀보다 강하니까! 계약자, 도와줄 수 있는데…….)

(우리, 필요 없어?)

마지막 말에 줄리엣은 픽 웃고 말았다.

"알아. 똑똑하고 쓸모 있는 거."

줄리엣은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이미 많이 도와줬어, 정말로, 너희가 아니었으면 나는 오래 전에 죽었을 거야."

(.......)

“고마웠어. 그러니까 이제 너희가고 싶은 데로 가도 돼.”

(……맞아!)

똑똑해, 우리!)

(도움 됐어!)

단순한 나비들은 금방 득의양양해져서는, 자화자찬하며 다시 수다스러워졌다.

줄리엣이 은열쇠를 수면에 떨어뜨리려던 찰나, 나비 한 마리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탄탈로스!)

“응?”

(우리 이름, 탄탈로스의 나비야.)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악령에게 이름은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줄리엣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를끄덕였다.

“잘 가, 탄탈로스의 나비야.”

그리고 줄리엣의 손을 떠나, 정교하게 세공된 은제 열쇠가 차운 물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근두근하며 투명한 물속을 열심히 들여다.

보던 줄리엣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스르륵.

단단한 은열쇠는 계곡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물에 녹아버린 것처럼.

“이거 괜찮은 거야……?”

나비들에게 물으려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줄리엣은 눈을 의심했다.

'문?’

어둑한 새벽하늘, 휘영청 커다란 보름달 바로 옆에 눈부시게 흰 빛이 나타났다. 작은 문 모양의 빛이었다.

그리고 나비들이 줄리엣의 곁을 스쳐 춤추듯 나풀거리며 차례로 높이 날아올랐다.

푸른 빛 나비들이 아롱아롱 줄지어 공중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그녀는 나비들이 허공에 나타난 문을 통해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줄리엣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계약녕!)

(또, 만나러…….)

(…… 거야! 기억……!)

팟.

허공의 문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뚝뚝 끊기던 나비들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줄리엣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 정말 가버렸네."

그녀의 나비들은 시도때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나 귀찮게 굴곤 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번에야말로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

어쩐지 홀가분하기도 하고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줄리엣은 한숨을 쉬며 자신도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차가운 물 속에 맨발로 서 있었더니 오소소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물 밖으로 나가려던 줄리엣은 문득, 계곡 바닥의 자갈들 틈에서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호기심에 꺼내드니 그건 은열쇠에 세공되어있던 보석과 같은 색의 돌멩이였다.

열쇠에서 떨어져 나온 건가?

(그건 사령석이야.)

고개를 든 줄리엣은 커다란 바위 위에 반쯤 누워있던 검은 표범과 눈이 마주쳤다.

줄리엣은 부드럽게 웃었다.

"안녕, 야옹아.”

언제부터 지켜본 걸까?

저 검은 표범이 나타났다는 건 주변에 레녹스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뭔데?”

(평범한 원석이라도 악령의 힘을 흡수하면 무시무시한 마력이 축적된단다. 마력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거지.)

마력을 무한정으로……?

그냥 은열쇠를 만들 때 쓰였던 원석이 떨어져 나온 것 같은데, 줄리엣은 별 흥미 없이 물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는데?”

(원하면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수백년 전의 인간들은 주로 미래를 엿보는 데 사용하더군.)

요컨대, 예언의 돌이라나.

줄리엣은 잠시 반질반질 예쁜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대가가 있겠지? 늘 그렇듯이 말이야.”

(맞아. 제법 영리해졌네, 인간치고는.)

검은 표범이 흡족한 얼굴로 꼬리를 살랑거렸다.

하지만 줄리엣은 예언 어쩌고 하는 돌멩이 보다는 검은 표범에게 주의를 빼앗겼다.

'저 야옹이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악령들은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처지를 싫어한다고 했었다.

놓아달라고 하면 레녹스는 순순히 풀어줄 것 같은데. 아닌가?

하지만 뱀도 나비도 사라져서 그런지, 검은 표범은 줄리엣이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느긋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쓸 거지?)

“응?”

(그 돌 말이야.)

아, 이거.

“글쎄….”

(고대의 인간들은 서로 그걸 갖겠다고 전쟁까지 벌였단다. 미래를 보여주는 아주 진귀한 물건이라고?)

검은 표범이 놀리듯 줄리엣을 살살 구슬렸다.

오랜만에 악령다운 대사라고 생각한 줄리엣은 속으로 웃었다.

때마침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줄리엣.”

줄리엣은 뒤를 돌아보았다.

푸르륵.

달 아래, 검은 말을 탄 남자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급히 달려온 듯 반듯한 이마 위로 머리칼이 흐트러져있었다. 줄리엣이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그 역시 간소한 옷차림이었다.

아마 빈 침대를 발견하고 그녀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거기서 뭐 해."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남자가 물었다.

그는 바위에 누워있는 검은 표범을 힐끔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레녹스는 물 속에 서 있는 줄리엣을 보곤 조금 어이없어하는 눈치였다.

“아, 레녹”

첨벙.

그를 보고 다가가려던 줄리엣은 물 속에서 발을 헛디뎌 순간 넘어질 뻔했다.

비틀거리는 줄리엣을 보고 움찔한 레녹스가 재빨리 만류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가지.”

고삐를 놓은 남자는 젖는 것도 아랑곳않고 성큼성큼 물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멋쩍어진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응.”

깊은 숲 속. 하늘에는 휘영청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고, 줄리 엣은 차가운 물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줄리엣은 세상에서 가장 무모하고 어리석은 도박을 한 남자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바쳐서 과거의 그녀를 구해내다니.

'세상에 그런 도박이 어디 있어.’

줄리엣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해 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돌려보낸 게 누구였는지. 정말 신의 안배라는 게 있다면, 자신은 왜 또다시 제 남자의 곁으로 돌아왔는지 말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제 그 답을 그 답을 알았다.

'처음부터 당신이었던 거야.'

“이리와."

내밀어진 손을 잡는 대신 줄리 엣은 물에 흠뻑 젖은 그를 보고 잠시 말없이 웃었다.

“왜?”

내 선택이 옳았어.

“그냥, 그냥요.”

“싱겁긴.”

레녹스는 대수롭지 않게 한 번 씩 웃더니 줄리엣의 치마가 젖지 않게 신중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정작 본인은 흠뻑 젖은 주제에.

줄리엣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잔잔한 만족감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가 손을 내민 순간, 줄리엣은 처음으로 미래를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낳고 어린 용을 함께 기를 것이다.

성의 창문에서는 항상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올 테고 정원에는 계절마다 다른 빛의 꽃이 피겠지.

“레녹스.”

"말해.”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침대는 비어있고, 뒷문은 열려있는데 뻔하지.”

“그래서 빈 침대를 보자마자 말로 달려서 쫓아온 거예요?"

“……걸어왔어.”

“너무하네. 그렇게 믿음이 없다니.”

줄리엣이 새침하게 불평하자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연하지. 네가 나한테서 도망친 전적이 몇 번인데. 넌 신용이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줄리엣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물론 그들은 지나치게 서로를 잘 알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싸우다 화해하기를 지겹도록 반복하겠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결코 서로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으리란 것.

그런 당연한 미래를 깨닫는 데 악령이나 불가해한 힘은 필요 없었다.

안겨서 물 밖으로 나오는 동안 줄리엣은 푸른 돌을 멀리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멀리서 검은 표범이 슬쩍 웃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줄리엣은 다시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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