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레녹스 칼라일은 지독한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거기에는 당연히 그 자신도 포함이었다.
그는 제 외모가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았다.
레녹스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제 몸이며 얼굴을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으응…….”
내리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줄리 엣의 속눈썹에 그림같은 음영을 드리웠다.
레녹스는 그 눈꺼풀 너머의 푸른 눈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턱을 그러쥔 채 입술을 탐닉하느라 정신없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른 치열을 훑고, 작고 부드러운 혀를 건드리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줄리엣이 숨을 할딱이며 그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숨 막혀요.”
레녹스 칼라일은 '정말 얼굴이며 몸 따위가 효과가 있었던가?'
하고 자신의 반평생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그는 가진 게 많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반한 여자는 뭘 준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는 여전히 줄리엣을 대하는 게 어렵고 서툴렀다.
또 겁을 먹고 도망치면 곤란하니까, 이번에는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정신만 차리면 매달리고 있으니.
스스로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줄리엣이 돌아온 직후, 그녀를 진찰한 주치의는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으니 잘먹고 잘 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는 그 충고를 잘 새겨들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틈틈이 운동도 시키고, 지루해하지 않도록 잘 어르고 달래서.
본디 그가 남의 비위를 맞춰본적 없다는 걸 생각하면, 지난 며칠간은 눈물겨운 수준이었다.
그가 간과한 것은 체력이란 게 말처럼 쉽게 회복되지 않는단 거였다.
레녹스가 낮게 신음했다.
"매번 이런 식이지.”
“뭐가요?”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줄리엣은 그를 구속하려 들지 않았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한 한번도 집착이나 질투를 내비친 적없이 매사에 초연하게 굴었다.
한때 그는 줄리엣의 담백한 태도를 흥미로워했지만, 그건 전혀 신기하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애정과 집착은 자연히 따라오는 거니까. 적어도 그의 세계관에서는 그랬다.
"……아무것도 아니야."
언젠가 줄리엣은 그의 얼굴을 을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지만 레녹스는 차마 자존심상 그게 아직도 유효하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아?”
그의 품 안에서 기진맥진해 늘어져 있던 줄리엣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뻗었다.
“포도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은그릇. 그 안에 그림처럼 알록달록한 포도 송이가 탐스럽게 담겨있었다.
저거 봐.
레녹스의 서늘한 눈매가 못마땅하게 가늘어졌다.
몸 달아하는 건 매번 그쪽이고, 이제는 고작 포도 따위에 밀리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게 나오나 봐요.”
몸을 일으킨 줄리엣은 신기해하며 은그릇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곧 늦여름인데.”
그깟 포도가 뭐라고.
레녹스는 지그시 은그릇을 노려보았다. 하다하다 과일 따위에 관심을 빼앗길 줄은 몰랐다.
별장 관리인이 '중서부의 특산품이랍니다.' 하고 자랑하던 과일이었다. 중서부에서 나는 석류며 포도 중 개량종으로 '보석포도'라는 명칭에 걸맞았다.
진짜 보석처럼 알알이 반질반질 크고 예쁜 포도송이는 연녹색, 자주색, 검은색, 각각 포도알 색이 달라서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전에는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레녹스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줄리엣은 반가운 마음에 포도한 알을 톡 따서 껍질째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줄리엣은 신맛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이 이 포도에 얽힌 남다른 기억이 있었다.
그녀가 북부에 머무르던 시절의 일이었다.
좀처럼 먹질 못하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하녀장이 어디서 이 품종의 포도를 얻어다 주었던 적이 있었다.
전에는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을 그리워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냄새 때문에 물도 못 먹는데, 이게 그렇게 먹고 싶은 거예요.”
다시 먹으니 역시 그렇게까지 그리워할 맛은 아닌데. 사람 입맛이란 게 이상하지.
줄리엣은 평소 포도보다는 귤이나 딸기를 더 좋아하는데 말이다.
“옛날에는 이게 왜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몰라.”
“옛날?”
고개를 들자 턱을 괸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예리한 눈매가 자신을 향하자 줄리엣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이번 생의 일이 아니었다.
줄리엣은 생긋 미소로 얼버무리면서 그에게 붉은 포도알을 하나 내밀었다.
“달아요.”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레녹스는 포도알을 얌전히 받아먹는가 싶더니 줄리엣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단물로 끈적해진 손가락을 슬쩍 핥더니, 손바닥 안쪽에 입 맞췄다.
“줄리엣.”
“응?”
“결혼할까.”
줄리엣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청혼을 자주 하면 희소성 떨어지는 거 몰라요?"
줄리엣은 조금 웃다가 장난스레 그의 뺨을 건드렸다.
"나는 당신이 내가 없더라도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불가능하지.”
즉답이었다.
레녹스는 마주 웃으면서도 속이 뒤틀렸다.
줄리엣이 이런 말을 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시간을 되돌린 거였어.”
그의 곁으로 돌아온 이래로, 줄리엣은 꾸준히 그에게 요구했다.
"그러니까 약속해주세요. 내가 죽어도, 다시는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겠다고요.”
울면서 말하는 줄리엣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줄리엣은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당신이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몹시 고통스럽고 끔찍한 거였다고.
레녹스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인과율을 거스르는 대가라면 끔찍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네가 곁에 있는다고 했잖아."
“그랬죠.”
“그럼 안 괜찮을 리 없으니까 된 거 아닌가?”
줄리엣이 어이없단 듯 픽 웃었다.
“순 억지야.”
레녹스는 조급증을 억누르고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는 눈치챘다. 줄리엣이 조금 전 말한 '옛날'은 그가 영영 기억해내지 못할 과거의 일이 분명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줄리엣이 키득거렸다.
줄리엣을 불안하게 만들기 싫어서 입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모든 자초지종을 알게 된 후, 그에게는 작은 의문이 하나 남았다.
그가 대가를 바쳐서 시간을 되돌렸더라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레녹스 자신뿐이어야 했다.
줄리엣이 아니라.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과거를 깨끗이 잊었다. 목숨을 걸 만큼 소중히 여겼던 여자에 에대한 기억까지도 모두.
(그건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야.)
강대한 악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줄리엣 모나드는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그녀를 죽음으로 영영 잃어버리기까지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레녹스는 확신했다.
그였다면 결코 줄리엣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이 아쉽고 뼈아팠다.
알지 못하는 먼 과거의 기억을 혼자 곱씹었을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뻐근해졌다.
“줄리엣.”
“왜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던가?"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레녹스는 절대 손 안에 되찾은 것을 다시는 놓치지 않을 터였다.
*
새벽, 줄리엣은 침대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푹 자고 일어난 줄리엣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또다시 한나절을 침실에서만 허비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다.
여름 별장에서의 휴가는 지나치게 즐거웠다.
레녹스는 생긴 것답지 않게 능치고 어르는 데 능해 조금만 방심하면 말려들기 십상이었다.
'수준급이라니까.'
줄리엣은 투덜거리면서 대충 숄을 집어 들었다.
침실 밖으로 나왔지만 인기척이 조심스레 맨발로 내려왔다.
없기에 줄리엣은 대리석 계단을 1층으로 내려온 줄리엣은 거실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말라고 했을텐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서 열린 문 틈을 몰래 들여다보니 레녹스가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칼라일 공작의 맞은편 남자는…….
‘하딘이네..'
“수도에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검은 피부의 남자는 줄리엣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딘은 칼라일 공작의 심복이었다.
"2황자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레녹스는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물론 줄리엣 역시 놀라지 않았다.
'2황자가 죽었구나.'
어차피 죄가 밝혀진 이상 2황자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재판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잠자코 듣던 레녹스가 픽 웃으며 되물었다.
“그랬을 것 같나?”
"아무래도 황제가 뒤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지요."
장례식, 황태자, 승계식.
“그래서 장례식에…….”
잠시 두 남자의 대화를 엿듣던 줄리엣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줄리엣은 살짝 별장을 빠져나와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산책하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치맛단이 이슬을 머금은 풀들을 스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치마에 분명 풀물이 들테지만 새벽 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줄리 엣은 신경쓰지 않았다.
한참 걷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줄리엣은 물가 앞에서 멈춰섰다.
목걸이 끝에 펜던트처럼 달린 은열쇠를 만지작거리던 줄리엣이 말했다.
“나와.”
풀숲에서 아롱아롱 반딧불처럼 푸른 빛을 내는 나비들이 나타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린아이 대신 확실히 이전처럼 익숙한 나비 모습이었다.
(우리, 약속 지켰어!)
나비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허겁지겁 말을 쏟아냈다.
(나쁜 뱀, 이제 없어. 멀리 쫓아냈어!)
(다시는 못 와!)
(저주도 없어!)
(이제 진짜로 안전해!)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응. 알고 있어.”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