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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08화 (205/229)

208화.

줄리엣은 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네가 후회하면?”

레녹스는 더없이 진지했다.

“근본 없고 재수 없는 가문의 남자와는 얽히는 게 아니었다고, 섣불리 곁에 남는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고, 네가 후회할 수도 있잖아.”

줄리엣은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레녹스 칼라일은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남자였다.

'그런 생각을 했어?'

세상 누굴 잡고 묻는대도 칼라일 공작가를 '근본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그것도 신기했지만 줄리엣을 놀라게 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이 남자는 방금 자기가 처음으로 ‘우리 아이' 라고 말했다는 걸 알까?'

아무래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배 속에 든 거, 그거 내 애 아닌가?”

항상 '네 아이’, ‘내 것', 심지어 '어떤 놈의 새끼' 등등으로 무례하고 오만하게 지칭하더니.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내어 웃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줄리엣의 표정을 을오해한 건지, 레녹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알아. 네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거."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내가 널 붙잡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라, 줄리엣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반지는 왜 아홉 개나 필요해요?”

“열두 개야.”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줄리엣이 이내 웃음을 터뜨리자 레녹스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네가 어떤 걸 더 마음에 들어할지는 모르는 거잖아.”

그래서 줄리엣은 그냥 조금 더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안하무인으로 굴던 남자가 체면과 예법을 중시하는 고상한 신랑감이 되어주겠다는데, 줄리엣은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결혼식은 무척이나 전통적인 방식의 예식이 되겠네요?"

“네가 원한다면.”

그는 줄리엣과 눈을 맞춘 채 조심스레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결혼식을 구설수 없이 치르겠답시고 사파이어 광산을 통째로 황실에 줬다가 뺏어온 전적까지 있었다.

이쯤 되니 전통과 허례허식에 집착하는 게 어느 쪽인지 궁금했다.

“네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해."

그냥 장난삼아 물은 거였는데 생각보다 대답이 술술 흘러나왔다.

혹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이름 목록을 뽑아놓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줄리엣은 팔을 뻗어 가볍게 그의 목덜미에 얹었다.

“그런데요, 레녹스."

“말해."

말하라고 해놓고 행동과 말이 따로 놀았다. 그는 이미 줄리엣의 목덜미에 잘게 입 맞추는 중이었다.

풀썩. 푹신한 침구 위로 어느 틈에 완전히 풀린 줄리엣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줄리엣은 일부러 웃음을 참으며 자신에게 열중한 남자에게 새침하게 속삭였다.

“전통적 예법에 따르면요."

“응.”

“결혼식 일주일 전부터는 예비신랑 신부는 만나면 안 돼요. 그건 알고 있죠?”

순간 그가 멈칫했다.

서늘하게 잘 뻗은 눈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교활하고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그런 악습이 예법이라고?

그걸 누가 정했는데?"

줄리엣은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

………아무래도 그게 패착이었던 거 같다.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눈을 뜬 줄리엣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은 걸까?

'아, 맞아. 여름 휴가였지.'

하지만 곧 그들의 여름은 원래 이랬다는 걸 깨달았다.

장소가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달칵.

"드디어 일어나셨군.”

줄리엣은 흰 침대 시트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으로 트레이를 들고 오는 남자를 곱게 흘겨보았다.

'얄미워라.'

똑같이 뒹구는데 왜 나만?

며칠 밤을 샌 건 똑같은데 그는 피곤해 보이기는커녕 쌩쌩했다.

심지어 이 별장에는 정말로 단둘뿐이었다.

그 말인즉, 하인들이 없으니 목욕물을 데우고 깨끗한 시트를 교체하는 것부터 자잘한 뒤치다꺼리가 모두 그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마셔."

레녹스는 진하게 우린 차부터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줄리엣은 얌전히 찻잔을 홀짝이며 느긋한 남자를 힐끔거렸다.

이런 게 체력의 차이인걸까?

엊그제부터 줄리엣이 욕조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잠시 나갔다 .

가 들어오더니 커다란 사슴 비슷한 짐승을 잡아 왔다.

“잘 거면 먹고 자."

그러더니 어제부터는 식당까지 일일이 가는 것도 귀찮다는 듯 아침마다 접시를 들고 왔다.

“아무 짓도 안 하니까 먹어.”

담백하게 말하며 그가 작게 자른 고기를 입에 넣어주었다.

무슨 짐승의 고기인지는 모르지만 깔끔하게 손질된 데다 향신료까지 적절히 뿌려진 고기는 꽤 맛이 좋았다.

얌전히 받아먹던 줄리엣은 문득 지난 며칠간 자신이 불 근처는커녕 부엌에도 간 적이 없다는 걸 걸 깨닫고는 의아해졌다.

그렇다고 집 안에 다른 하인이 있지도 않으니까.

“레녹스.”

이 신선한 음식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요리를 할 줄 알아요?”

잠시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보던 레녹스가 싱긋 웃었다.

“그게 이제야 궁금해?”

줄리엣은 좀 억울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지 않았으면 좀 더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기사단도 야외 훈련 정도는 하니까.”

아, 그렇지.

공작가의 기사단은 며칠이고 야영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가 요리를 할 줄 아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착하네.”

접시를 다 비우자 목욕물을 데 워놨다고 알려주었다.

식사시중에 목욕시중에.

인력의 가치를 환산한다면 분명 칼라일 공작의 몸값을 천정부지.

로 치솟을 테니, 이건 대단히 사치스러운 휴가인 셈이었다.

그가 아무도 없다고 했을 때 줄리엣은 설마, 그렇게까지? 싶었지만 별장에서 지내는 내내 다른 사람의 그림자도 본 적 없었다.

“…아무래도 그게 문제 같아요.”

“뭐가?”

줄리엣은 느긋하게 웃는 남자를 보곤 한숨을 삼켰다.

주변에 눈치 볼 다른 사람이 없어서, 정신을 차리면 어느 틈에 그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다는거.

줄리엣이 다른 사람을 처음으로 본 건 별장에 단둘이 틀어박힌지 닷새째 되던 아침이었다.

“어머. 드디어 뵙네요."

그녀는 레녹스가 숲에 나간 사이 새벽 산책을 하러 잠시 주변을 가볍게 걷던 참이었다.

줄리엣은 덜컹, 하고 문 앞에 커다란 우유통을 내려놓는 인심좋게 생긴 부부를 마주치고는 잠시 의아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님. 세네카부인이시죠?”

…무슨 부인?

나이 지긋한 부부는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별장 관리인이라고 했다.

하기야, 돌보는 사람이 없으면 별장이 이렇게 깔끔하게 관리될 수 없긴 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잔디와 마당의 근사한 나무집 등등.

“저희는 일주일에 한 번 들르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별장 관리인 부부는 일주일에 한 번 신선한 식재료를 가지고 들른다고 했다.

신선한 버터와 갓 짠 우유 등은 이 부부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급하게 저택을 고치라고 하셔서 저희도 많이 놀랐답니다.”

레녹스는 정말로 급하게 별장을 사들인 모양이었다.

"아마 부친께서 아드님 부부를 를많이 사랑하시는 모양이죠?"

다만 그가 벨로트 영지를 사들일 때 사용한 가짜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 상인 가문의 이름이었다.

“이런 큰 별장을 다 사주시고 말이에요.”

덕분에 별장 관리인 부부는 그를 를 괴팍한 취미를 가진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공작성에 앉아 있지 않은 레녹스 칼라일은 딱 그 나이 또래 청년으로 보였으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조용한 것도 좋았지만, 줄리엣은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별장 관리인은 돌아가기 전 물고기가 잘 잡힌다는 지점을 귀띔해주었을 뿐 아니라, 별장 뒤쪽에서 고기 잡는 도구까지 꺼내주었다.

“이 계곡의 송어도 맛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덕분에 오후 내내 침실에서 빈 둥거리는 대신 물가로 놀러 나갔지만 계곡에 사는 고기들은 몹시 재빨랐다.

마음과 달리 번번이 허탕을 치자 레녹스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진지해졌다.

“보기보다 쉽지 않네.”

첨벙.

계곡물에 발목을 담그고 물에 젖은 남자를 감상하던 줄리엣은 그를 보곤 후후 웃었다.

레녹스가 의아한 얼굴로 생글거리는 줄리엣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해서 과연 오늘 저녁을먹을 수 있을까 해서요."

“뭐, 하루 저녁쯤 굶는다고 큰 일이야 나겠어요?”

드디어 레녹스가 못하는 걸 발견한 줄리엣은 몹시 신이 났다.

운동신경이 좋아 뭐든 시켜도 잘 해내는 남자를 놀릴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줄리엣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후.

“…… 진짜 얄밉네."

줄리엣은 어이가 없었다.

덜컹.

그녀 앞에 내려놓은 커다란 대야 안에는 비늘 색마저 영롱한 물고기 두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대야가 묵직할 정도로 커다랬다.

"어떻게 잡았어요?”

“이걸로.”

레녹스가 겸손하게 가리킨 것은 사냥용 활이었다. 뭘 어떻게 했다는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애초에 저녁 식사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고, 민물고기는 손질이 까다로웠으므로 정말로 과시용으로 잡은 거였다.

“어떻게 할까?"

“풀어줘요, 얼른. 불쌍하니까.”

그 말에 레녹스는 순순히 커다란 물고기 두 마리를 다시 풀어주었다.

놓아주자마자 긴 꼬리를 끌며 재빠르게 도망치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던 줄리엣은 투덜거렸다.

“틀림없이 눈먼 물고기였을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짐짓 겸손한 척 그렇게 말한 레녹스는 충동적으로 줄리엣의 허리를 끌어당겨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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