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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07화 (204/229)

207화.

줄리엣은 공작가 사람들이 모두 한패였다는 것에 아주 잠시 충격을 받았다.

“배신자들. 날 넘기고 잠이 올까 몰라?”

줄리엣이 투덜거리자 레녹스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지금쯤 진짜 휴가를 즐기고 있겠지.”

진짜 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줄리엣은 그의 말이 맞다는 는걸 깨달았다.

칼라일 공작도 없겠다, 커다란 여름 별궁에는 사용인들 뿐일테니까. 공작성 사람들은 지금쯤 축제를 벌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줄리엣은 속으로 경악했다.

'그래서 협력한 거구나?'

그러나 배신감도 잠시, 줄리엣은 금방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팔렸다.

펑. 퍼.

화려한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푸르륵.

“나한테 집중해.”

줄리엣이 넋을 잃자 그녀의 뒤에 타 있던 레녹스가 고삐를 당기며 싱긋 웃었다.

그들은 말을 탄 채 별장에서 조금 떨어진 밤거리를 구경하러 나왔다. 휴양도시답게 벨로트 시가지는 붐볐다.

복고풍의 가로수등과 돌담과 예쁜 자갈길.

오래된 성벽을 따라 중앙 분수대까지 조성된 거리는 동화 속풍경처럼 아기자기했고, 휴양지 답게 가면을 쓴 각양각색 옷차림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관광도시라 그런지 카니발이 한 창이었다. 줄리엣은 겨울에 잠시 들렀던 동부의 새해맞이 축제를 떠올렸다.

카니발이 한창이라 거리에는 온통 처음보는 노점상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로 넘쳐났다.

줄리엣은 말에서 내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사람들 시선따위 신경쓰지 않고 평복을 한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줄리엣은 문득 커다란 풍선을 파는 노점상앞에 멈춰섰다.

'닉스?'

검은 드래곤 모양의 풍선을 보고 줄리엣은 잠시 떼어놓고 온 아기 용을 떠올렸다.

“마력석으로 만든 거랍니다. 예쁜 아가씨. 하나 줄까요?”

노련한 상인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줄리엣에게 접근했다.

“아뇨, 괜찮…..….”

관광지답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확인한 줄리엣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마력석을 썼다고 한들 하루면 바람이 빠지는 장난감이다.

"자.”

하지만 줄리엣의 거절이 무색하게도 어느 틈에 값을 치른 남자가 줄리엣의 손에 끈을 쥐여주었다.

줄리엣은 살짝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아기 용을 닮은 풍선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걸 산 적은 아홉 살 이후로 처음 같은데.

“어머, 내가 실수한 모양이네.”

대신 값을 치르는 레녹스를 놀란 얼굴로 힐끔거리며 노점상 주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이 지긋한 부인이 줄리엣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새댁 남편이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남편 아니에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차림을 했다지만 무심코 지나치던 사람들조차도 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남자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줄리엣은 잠시 쉴 겸 끈적해진 손도 닦을 겸 분수대 근처로 갔다.

분수대에 대충 걸터앉은 줄리엣의 손에는 길거리에서 파는 먹거리가 들려있었다.

얇은 과자 사이에 과일을 넣고 연유를 뿌린 간식.

성에서는 요리장이 기겁해 쫓아 다니며 절대 못 먹게 잔소리할 불량식품이었지만 과일에 연유를 듬뿍 얹은 과자는 놀랍게도 입맛에 맞았다.

"......?"

문득 시선을 느낀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옆에서 잡아먹을 듯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먹고 싶은걸까?'

단 거 싫어하는 사람이…….

줄리엣은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먹고 있던 과자를 덜 단 부분으로 반 쪼개서 그에게 건넸다.

“자요.”

레녹스는 제 손에 들려진 반듯하게 잘린 과자 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충동적으로 불쑥 말했다.

“줄리엣.”

“네?”

“결혼할까.”

잠시 눈을 깜빡이던 줄리엣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과자예요. 너무 감격하지 말아요.”

“.…알아.”

레녹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 이상으로 즐거워하며 뺨이 발그레해진 줄리엣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지만, 당연하게도 타이밍이 나빴다.

"배고파요?”

"아니.”

"아가씨가 결혼하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면서 일러바친 엘리엇의 말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내, 장식 하나 없이 밋밋한 옷을 입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줄리엣에게 쏟아지던 시선들을 보고 있자니 그는 몇 번이나 조바심이 났다.

'상냥하게 굴어요.'

줄리엣이 그렇게 당부하긴 했지만 그는 몇 번이고 발작적으로 검을 뽑아 들뻔 했다.

“손 줘."

레녹스는 한숨을 삼키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한편 줄리엣은 조금 전부터 그의 표정을 힐끔거리며 재밌어하는 중이었다.

아까 '남편 아니에요.'라고 했던게 그의 심기를 거슬렀던 게 틀림없다.

“뭐든 원하는 걸 말해. 단, 결혼만 빼고.”

'하지만 당신, 그렇게 말했었잖아?' 줄리엣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놀리는 건 이쯤하고, 줄리엣은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레녹스.”

"말해.”

“아까 그게 청혼이었으면, 저는 싫어요.”

움찔.

줄리엣의 손을 닦아주던 남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왜?"

“음…… 귀찮잖아요?"

“번거롭고,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 굳이 이 관계를 깨뜨릴 필요는 없잖아요.”

어쩐지 낯설지 않은 핑계였다.

귀찮고, 번거롭고,

'젠장.’

그건 그가 지난 수년간 그의 연인에게 했던 말이었다.

레녹스는 속으로 수백 번째 곱씹는 중이었다.

자업자득이지.

*

외출에서 돌아와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내려와.”

레녹스는 푹신한 쿠션이 깔린 창틀 자리에 줄리엣을 그대로 내려놓고 구두와 겉옷을 벗겨주었다.

기분 좋게 배도 부르고, 다리도 아프고, 그리고 도수가 낮은 젤리술을 두 잔이나 마신 탓인지 줄리엣은 조금 너그러워져 있었다.

문득 지금이면 그가 뭐든 대답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말해.”

줄리엣은 발끝을 까닥이다가 불쑥 말했다.

“반지를 몇 개나 사 모으는 거예요?"

구두를 벗겨주던 레녹스의 손이 멈칫했다.

그들은 잠시 눈싸움하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빤히 쳐다보던 침묵을 먼저 깨뜨린건 줄리엣이었다.

“화났어요?”

줄리엣이 상냥하게 묻자 레녹스역시 그녀의 말투를 흉내내어 상냥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생각 중이야."

“무슨 생각?”

“누구 입부터 족쳐야 할까 하고.”

“풋.”

"… 돌겠군.”

레녹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줄리엣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많은 보석들은 정말로 비밀리에 사들인 게 맞는 모양이었다.

웃는 줄리엣을 보던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픽 웃고는 천천히 그녀의 겉옷에 달린 리본을 마저 풀어주었다.

“재밌다니 다행이네."

“입단속 해도 소용없어요. 칼라일 공작님은 워낙 유명인이시거든요.”

줄리엣이 놀리듯 말했다.

“그런데 그분도 못하는 게 있네요.”

비밀 청혼은 북부의 공작에게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주 예전의 줄리엣이라면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요즘그녀에게는 발 빠르게 소식을 물어다 줄 친구들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고명하신 북부의 공작이었다.

온 대륙의 경매장에서 값비싼 원석이며 귀금속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유명한 세공사들을 수배하면서 소문이 나지 않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적당히 모른 척해주는 게 품위있는 연인의 태도겠지만 줄리엣은 별로 참을성이 없었다.

그리고 몹시 궁금했다.

“쓰지도 않을 반지 산 건 왜 숨겼어요?”

“… 신전에서 빌어먹을 파문을 무효로 하는 데 시일이 걸린다잖아.”

레녹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앞뒤로 잠시 생략된 말은 욕설일 게 뻔했다.

줄리엣은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신전을 닦달하는 동안 반지를 그렇게 사들였어요?"

"말하자면, 그래.”

거기까지는 줄리엣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칼라일 공작가와 신전의 반목은 유명했다. 신전은 공작을 파문했고, 그건 공작가가 신전의 사제가 축복하는 성사-결혼, 장례, 세례식 - 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최근 레녹스 칼라일이 신전을 쥐 잡듯 압박하고 있다는 것도 꽤 알려진 사실이었다.

레녹스는 하루빨리 공작가를 복위시키라고 다각적으로 압력을 을넣었고, 버티다 못한 신전이 두 손 두 발 다 든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절차상 파문당한 공작가를 복적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었다.

“신전이 왜 중요해요?"

줄리엣은 그가 그렇게 절차에 에집착하는 바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허례허식만큼 레녹스 칼라일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었다.

그는 명쾌하고 빠른 처리를 종아했고, 전혀 격식 따위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답지 않게 주저하던 레녹스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너한텐 중요하잖아."

줄리엣은 자신을 똑바로 보는 담담한 붉은 눈을 마주했다.

“전통이니 격식이니 하는 거."

'아하?’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줄리엣은 조금 놀랐다.

"음, 별로 그렇진 않아요."

물론 전통을 소중히 하는 게 모나드 가의 가풍이긴 했지만.

“결혼식에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사제의 축복 따위는 아무도 신경 안 쓸걸요."

줄리엣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건 정말이었다. 줄리엣은 모르는 사람의 축복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레녹스는 줄리엣의 손가락 끝에 차례로 천천히 입 맞췄다.

유혹이라기보다는 건조하고 담백한, 무의식적인 행동 같았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내리깔았던 그의 서늘한 눈매가 다시 줄리엣을 향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너도 생각이 바뀔걸.”

“아이……?"

“그래. 지금은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다 네가 후회하면?”

입술을 뗀 레녹스가 웃음기 없이 담백하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세례를 받지 못하게 되면 너는 분명 속상해할 텐데.”

레녹스는 열없이 웃으며 줄리엣의 뺨을 조심스레 쥐었다.

“그럼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봐.”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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