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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06화 (203/229)

206화.

헬레나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줄리엣은 성의 입구까지 가볍게 걷기로 했다.

커다란 녹나무가 그늘을 드리워서 걷기 좋은 서늘한 날씨였다.

그러나 얼마쯤 걷던 줄리엣은 멈춰섰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큰 키의 남녀를 발견한 것이다.

"아…… 안녕, 줄리엣?"

먼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 여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훤칠한 장신의 미인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대단히 아름다운 큰 키의 여자와, 역시 커다란 체격의 남자.

"엘자.”

로이의 동료이자 숲의 일족인 인엘자와 나단이었다.

“무사했구나, 줄리엣.”

엘자는 반가워하면서도 어쩐지 줄리엣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 건강해 보여서 기뻐. 이젠 괜찮은 거지?”

"응. 나는 괜찮아.”

미소지으며 대답하는 줄리엣의 시선이 엘자의 뒤에 서 있는 남자, 나단에게 머물렀다.

줄리엣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하던 엘자와는 달리 나단은 그녀를 싫어했다.

게다가 나단은 로이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으니까.

줄리엣은 나단이 그녀를 노골적으로 원망하거나 비난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단은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묵례만 했을 뿐, 이렇다 할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있잖아. 장로들이 로이의 처벌을 결정했어. 그래서 줄리엣한테 알려주려고…..….”

줄리엣은 그제야 마지막으로 로이를 본 게 몇 달 전이었단 걸 기억해냈다.

숲의 일족은 황제의 법으로 처벌할 수 없어서, 로이는 그들 일족이 숲으로 데려갔다고 전해들었다.

엘자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철장형이래.”

“철장형?”

그게 얼마나 무거운 형벌인지 몰라서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로이는 어딘가 갇혀있는 걸까?

줄리엣이 어리둥절해 하는 걸 눈치챘는지 나단이 불쑥 끼어들어 설명해주었다.

“9각…… 인간의 시간으로 10년 간 감옥에 갇히는 처벌입니다.”

“응, 로이는 전에도 자주 갇혀 봤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야.”

10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게?

그게 어떻게 가벼운 처벌일 수 있나 싶어 줄리엣은 의아해졌다.

하지만 엘자와 나단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종족도 수명도 다르니까.'

그들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아, 물론 저지른 일에 비하면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로 들도 있긴 했지만.…."

엘자는 줄리엣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로이가 저지른 일의 파급효과로 줄리엣이 죽을 뻔했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던 모양이다.

칼라일 공작은 줄리엣이 돌아온 이후로는 극도로 그녀의 신변을 을노출하지 않았다. 모나드 백작이 죽었거나, 혹은 끔찍한 일을 당해 실종됐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았다.

'실제로 죽을 뻔했으니까.'

엘자는 아마 로이가 뱀을 풀어준 것에 비해 처벌이 가볍다고 줄리엣이 화를 낼까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개의치 않았다.

“힘들겠다.”

그녀는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줄리엣의 관점에서는 10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로이가 뱀을 풀어준 건 뱀의 농간에 놀아난 거였다.

본인은 자신의 의지였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줄리엣은 그 뱀이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을 조종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불가항력이다.

“그런데 있지, 줄리엣. 부탁이 있어.”

"응. 말해.”

“로이가 좀…… 안 좋아."

줄리엣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안 좋다니? 어디가?"

“그냥 많이 우울해해. 말도 거의 안 하고……. 그리고 줄리엣을 만나고 싶은 거 같아."

줄리엣은 그제야 왜 두 사람이 기별도 없이, 하필 칼라일 공작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불쑥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줄리엣이 우리랑 같이 가서 로이를 만나주면….”

“엘자.”

"으응?”

줄리엣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못가.”

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엘자와 나단 두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줄리엣이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줄리엣에게 강요하진 못했다.

엘자의 뒤에 서 있던 나단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노려보았을 뿐.

"미안.”

“아냐! 이해해. 줄리엣은 로이 때문에 죽을 뻔했고……….”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로이를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줄리엣은 희미하게 웃었다.

“로이를 위해서라도."

“그래. 그렇구나……."

엘자의 어깨가 축 처졌다.

두 사람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줄리엣이 굳이 말하지 않은 속뜻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미안해."

“아냐, 줄리엣이 미안할 일이 아닌걸.”

작별인사를 하고 몇 발짝 가던 엘자가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저기, 줄리엣.”

“응.”

“나…… 줄리엣 만나러 나중에 다시 와도 될까?”

그 말에 줄리엣은 활짝 웃어 보였다.

“물론이지. 엘자는 내 친구인걸.

언제든 환영이야.

"응!”

엘자는 그제야 주눅 든 표정을 풀고 활짝 웃었다.

줄리엣은 두 사람이 떠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실타래도 있는 법이다.

“아가씨.”

홀로 서 있는 줄리엣에게 밀란 경이 다가와 권했다.

“마차가 준비되었으니 먼저 출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별궁으로 떠날 채비가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먼저 별궁으로 출발하라는 이야기였다.

줄리엣은 별 의심 없이 순순히 혼자 마차에 올랐다.

'그 열차에서 로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철장 안에 갇혀있던 늑대를 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달리는 창으로 여름 햇살이 들이쳤다. 줄리엣은 눈을 감고 지난 일을 곱씹었다.

반년 전의 일이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 같았다.

***

똑똑.

“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줄리엣은 눈을 떴다.

낮은 천장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줄리엣은 자신이 마차로 이동중이었으며, 지금은 마차가 멈춰있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또 하루를 꼬박 잤나?'

줄리엣은 어리둥절해졌다.

여름 별궁까지의 여정은 게이트를 하나 통과해서 반나절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 분명 오후에 출발했으니 지금은 달이 뜬 한밤중이어야 맞았다.

그런데 창가의 커튼을 걷어보니 밖은 해가 뜨기 직전 같았고, 그녀는 마차로 밤새 꼬박 달려온 것처럼 피곤했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바깥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재촉하자 줄리엣은 멈칫했다.

하지만 여긴 공작가의 여름 별궁이 아닌데?

“여기가 어디.."

“내리시죠.”

"......?"

수상한 점을 하나하나 꼽던 줄리엣은 어쩐지 마차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몹시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달칵.

“……여기서 뭐해요?”

아니나 다를까.

마차 문이 열리자 느긋하게 문을 짚고 선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 아가씨를 모시러 왔지.”

린넨 셔츠에 검은 바지. 검소한 복장의 칼라일 공작은 무수한 북부 영주들에게 최근 악몽을 선사하고 다니는 남자와는 영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상황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줄리엣은 그를 훑어보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점에 안도했다.

레녹스는 정말로 시종이라도 된 듯 공손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벨로트.”

벨로트?

줄리엣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벨로트는 중서부의 한가한 휴양도시였다. 덧붙여 공작가의 여름 별궁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와 보고 싶다며?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 이다. 좀 이상한 방식으로.

“와야 한다고 했지 별장이 필요 하단 얘기는 아니었는데요."

게다가 줄리엣이 벨로트에 오고 싶어 했던 이유는 휴양지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다음에는 참고할게.”

다음이란 게 있을까?

기막혀하는 줄리엣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줄리엣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일단 마차 밖으로 나왔다.

“...…와.”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지붕이었다.

새로 지붕을 얹은 근사한 아치들로 이루어진 석조저택은 주변의 숲과 어우러져서 그림 같았다.

여름 궁전과 비슷한 분위기로 지어진 게, 누구 솜씨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근사하긴 해도 별궁에 에비하면 조금 작은데……. 공작성사람들이 모두 머물기엔 조금 비좁지 않을까?

그렇게 물으려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분명 뒤따라 오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탄 마차 외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넓은 허허벌판에 마부를 제외하면 사람이라곤 그들이 전부였다.

“레녹스.”

이 남자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줄리엣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와요?"

“안 와.”

“안 오다뇨?”

잔뜩 경계하는 줄리엣을 보고 레녹스가 배부른 맹수처럼 느긋하게 웃었다.

“목적지를 알려주는 납치범도 도있나?”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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