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칼라일 공작가의 이상기류는 온 북부가 알고 있었다.
단순히 뜬소문이 아니었다. 북부에서는 동부 마탑 엘라임의 마법사들이 목격되었고, 칼라일 공작가는 막대한 돈과 기사들을 투입해 광산과 얼은 강을 뒤지고 있었다.
공작이 미쳐서 죽은 연인의 시체를 찾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누구 하나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알지 못했지만 북부의 영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건방진 공작 녀석이 검을 잡을 상태가 아니렷다?”
칼라일 공작가는 오랜 세월 북부를 통치해 왔지만 주변 지역의 영주들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공작가의 북부 영지는 매우 광활했고, 덕분에 칼라일 가문은 많은 가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역대 칼라일가문의 가주들이 그래왔듯 주변 영주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강경책으로 다스렸고, 북부의 영주들은 점점 세가 커지는 공작가를 못마땅해하면서도 고개를 조아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때마침 공작의 상태가 이상하다니, 기회를 엿보던 북부의 영주들은 슬금슬금 공작가의 영지를 넘보기 시작했다.
하물며 레녹스 칼라일은 제 손으로 가문의 직계혈족을 끝장내놨으니, 가까운 친인척도 먼 방계를 제외하면 없었다.
인근의 귀족들은 살판이 났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레이모어, 칼훈, 갈로웰.
북부 공작가 영지의 경계선을 을가장 먼저 넘은 것은 세 가문의 연합이었다.
칼라일 공작가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세 가문이 연합하면 그럭저럭 못 할 것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명분도 있지요. 그레이모어 백작가는 공작가의 먼 친척이 아닙니까?”
정말로 까마득히 먼 방계 혈족이지만.
“그리고 갈로웰 자작도 있지요.”
갈로웰 자작은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적 있는 유명한 무장이었다.
오랫동안 공작가를 섬겨온 그레이모어 백작과 칼훈 자작은 은근히 젊은 갈로웰 자작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레이모어가 명분과 군사, 칼훈 자작이 군자금을 제공한다면 갈로웰 자작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쌓은 무력과 전략적인 병법 부분이었다.
사실 서로의 군대를 이끌고 싸워서 땅을 빼앗는다는 고리타분한 영지전이 실제로 이루어질 일은 없겠지만, 레녹스 칼라일이 검을 잡을 상황이 아니라도 공작가의 기사단에 대비를 해야 하니까.
“그래도 기사단이 직접 전투에 에나올 일은 없을 겁니다.”
“듣자 하니 그 쟁쟁한 기사들도 강 하류를 뒤지고 다닌다더군요.”
“시체라도 찾는 모양이지요? 저런, 그 대단한 기사들이 주인을 잘못 만나 안됐군요."
그들은 완전히 근거 없는 낙관에 젖어있었다.
물론 감히 공작성으로 직접 쳐들어간다거나 칼라일 공작가를 친다는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흠, 그런데 갈로웰 자작이 늦는군요.”
"아, 저기 오는군요!"
“!”
“하하! 이 사람. 꾸물거리기는!"
멀리서 다가오는 갈로웰 자작가의 깃발을 본 그레이모어 백작과 칼훈 자작이 껄껄 웃었다.
갈로웰 자작가의 흰 깃발이 나 부꼈다.
맨 앞에는 검은 말을 탄 남자가 빠르게 말을 달려 그들에게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는 평이한 속도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아, 이 사람아! 우리는 자네가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뺀 줄 알았지 뭔가!”
“하하!”
그레이모어 백작과 칼훈 자작은 갈로웰 가의 깃발을 보자마자 안도해 농담을 나눴다.
"자네가 없으면 누가 그 시건방진 공작 놈의 머리를 자르나 상의 중이었네!”
그런데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갈로웰 자작이 가까이오기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
갈로웰 자작가의 깃발은 흰 바탕에 검은 사슴뿔을 형상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올수록 흰 깃발에 붉은 피같은 얼룩이 묻어있는 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게다가 맨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남자가 속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가까이 오자 그레이모어 백작과 칼훈 자작은 더욱 의아해졌다.
"누구……?"
“전령인가?"
선두의 남자는 갈로웰 자작이 아니었다.
갑옷 대신 가벼운 무장을 한 남자는 빠르게 말을 달려야 하는 전령이라면 적절한 옷차림이었지만 지휘관 치고는 지나치게 간소했다.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게다가 새파랗게 젊기까지 했다.
갈로웰 자작이 전령을 대신 보낸건가?
그레이모어 백작과 칼훈 자작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니, 갈로웰 자작은 어디 있나? 자네는 누구고……?"
“이걸 찾나?”
절그럭.
검은 머리의 청년이 왼손에 쥐고있던 은빛 투구를 그들의 앞에 내던졌다.
순간적으로 칼훈 자작은 그게 갈로웰 자작이 애용하는 투구와 모양이 흡사하단 걸 깨달았다.
"......?"
데굴데굴 풀밭을 구르던 투구가 두 사람의 발밑에 멈춰 섰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그냥 단순한 투구가 아니었다.
“……아아악!”
갈로웰 자작의 머리를 보고 비명을 지르던 두 사람은 눈앞의 젊은 전령이 누군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몹시 온화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내 것에 눈독을 들였을 때는 여분의 목숨 정도는 준비해 뒀겠지?"
*
칼라일 공작이 영지 시찰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북부를 돌고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호시탐탐 공작가의 영지를 넘보며 야심차게 출병했던 각 가문의 영주들은 그 기세가 무색하게 허둥지둥 영지로 돌아갔다.
영지 시찰은 핑계에 불과했고 레녹스 칼라일은 무자비하게 북부 영주 가문 세 개를 날려버리면서 공작가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건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그러는 동안 줄리엣은 방문객들을 맞느라 북적이는 늦봄을 보냈다.
사촌인 그레이와 테오, 그리고 이제는 자유로운 신분이 된 리오넬 르바탄은 하루가 멀다하고 공작성을 드나들었다.
'동부와 북부가 손을 잡은 건가?'
‘적왕과 칼라일 공작가에 무슨 접점이 있기에?’
세간에는 대체 무슨 조합인가 의아해하는 시선이 많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줄리엣은 사람들이 그냥 계속 궁금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줄리엣은 바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계절은 빠르게 지나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줄리엣은 북부의 여름을 좋아했다. 쾌활하고 모든 것이 살아있는 듯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매해 이 무렵이 되면 공작성 사람들은 여름 별궁으로 떠날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런데 줄리엣.”
“네?”
시끌시끌하던 손님들도 거의 다 돌아가고 공작성 사람들은 별궁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어느 한 가로운 오후.
줄리엣은 햇살이 들어오는 응접실에 앉아 외숙모인 헬레나와 함께 차를 들고 있었다.
“칼라일 가에서 며칠 전에 반지를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반지요?”
“그래. 렉슬러 상단에서 중개한 경매인데…… 무척 근사한 물건이라지?”
그렇게 묻는 헬레나의 목소리는 빛나고 있었다.
평온했지만, 눈이 의미심장하게
“사파이어에 컷팅한 다이아몬드를 함께 세공한 물건인데, 세트를 이루는 목걸이와 귀걸이도 있다던 걸?"
달칵.
줄리엣은 그림 같은 미소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섯 번째예요.”
“응?”
“그 질문 하신 거요. 숙모님께 다섯 번째로 들었어요.”
줄리엣의 대답은 언뜻 동문서답처럼 엉뚱하게 들렸다.
그러나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한 헬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나.”
“네, ‘어머나' 지요.”
줄리엣은 그림같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간 공작이 결혼 예물로나 쓰일법한 반지나 목걸이 등을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줄리엣에게 사정을 캐물은 건 헬레나가 처음이 아니었다.
아마 상단주인 헬레나의 귀에는 훨씬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의 외종사촌이자 성질 급한 테오가 '야, 너 결혼하냐?!' 하고 다짜고짜 헐레벌떡 쳐들어와 물었던 것에 비하면, 헬레나는 충분히 고상하게 예의를 차려준 셈이었다.
“저는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하지만 맹세코, 줄리엣은 그 대단하다는 반지의 그림자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어리둥절하고 말았지만 이런 일이 슬슬 몇 번째 반복되다 보니 줄리엣은 슬그머니 심통이 났다.
“사람들이 ‘칼라일 공작이 어디.
의 대단한 보석을 사들였다던데요?' 혹은, ‘유명한 보석 세공사를 고용하셨다지요?'라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줄리엣이 헬레나에게 살짝 어리 광을 부리듯 투덜거렸다.
“구경도 못 해본 반지를 '네, 대단히 예쁘고 눈 튀어나오게 비싸고 근사하답니다.'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후후.”
줄리엣이 한숨을 폭 쉬자 헬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종류도 다채로워서 줄리엣은 칼라일 공작이 사들였다는 예물의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줄리엣은 하루 종일 공작가 사람들과 지내는데도 정작 그 이야기를 귀띔해준 건 모두 외부 사람들이었다.
“이것도 드셔보시죠,상단주님.”
절묘한 타이밍으로, 공작가의 비서관인 엘리엇이 티푸드를 직접 들고 응접실에 등장했다.
“이 계절에만 나는 과일로 만든 거랍니다. 아가씨도 좋아하시죠.”
엘리엇은 거대 상단의 주인인 헬레나에게 몹시 친절하게 굴었다.
“고마워요, 엘리엇.”
하지만 헬레나는 몹시 흥미롭다.
는 표정으로 엘리엇과 줄리엣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그리고 저는 그냥 지금이 좋아요.”
덜그럭.
줄리엣의 말에 엘리엇이 움찔하며 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의 상태가 좋아서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숙모님께 말씀드리는 중이었어요.”
엘리엇이 허를 찔린 얼굴로 돌아봤지만 뭐 어떤가. 줄리엣은 생긋 웃었다.
“저, 저는 잠시…….”
줄리엣은 엘리엇이 허둥지둥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그날 줄리엣을 방문한 손님은 헬레나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