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오래 전, 줄리엣은 텅 빈 침대에 홀로 남겨진 새벽마다 대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곱씹곤 했다.
세상에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정상적이고 평화롭게 행복을 누리는 연인들이 넘쳤다.
그런데 나는, 왜 당신은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남들처럼 행복해지는 일은 줄리 엣에게 요원한 일이었다. 칼라일공작의 이름뿐인 연인으로 사는 내내 그들은 엇갈리기만 했다.
줄리엣이 오래 전 사랑했던 남자는 대륙을 정복하는 것보다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는 걸 더 어려워하는 남자였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보다, 자신을 죽이고 심장을 바쳐 시간을 을되돌리는 것이 더 쉬운 남자였다.
'제정신이 아닌 거지.'
줄리엣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지쳐 달아난 그녀를 끝내 뒤쫓아 온 남자와 재회했을 때였다.
줄리엣이 그를 원망하면서도 떠나질 못했듯 그는 탐욕스럽게 그녀를 붙잡고 놓지 못했다. 자기 감정 하나 모르는 주제에.
그건 그들이 똑같이 자존심이 세고, 솔직할 줄 몰랐고, 어딘가 단단히 비틀려 있기 때문이었다.
“레녹스.”
줄리엣은 침착하게 망가진 남자를 응시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하지만 당신은 평생 나한테 속죄해야해요."
줄리엣은 오만한 남자의 얼굴이 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안도감으로 물드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아요? 그러다 언젠가, 내가 조금이라도 당신을 용서하게 될지도.”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줄리 엣은 그를 만났던 순간을 어제인 양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줄리엣은 한눈에 그 역시 자신만큼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알겠어요? 그때까지 당신은 내 거야.”
줄리엣은 짐짓 새침하게 읊조렸다.
레녹스 칼라일은 평생 그녀의 의용서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평생 그를 소유할 수 있었다.
“앞으로 꽤 고달파지겠지만, 그 정도 각오는 해야”
줄리엣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레녹스가 줄리엣을 힘주어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래. 평생 용서하지 마."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줄리 엣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레녹스 칼라일은 품 안에 끌어 안은 것을 평생 놓지 않을 터였다.
희미하게 웃던 줄리엣은 문득 조금 전부터 눈이 그쳤다는 걸 깨달았다.
**
바스락.
공작성 뒤쪽의 숲에 진귀한 고대의 마법생물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확.
나무 위에 조용히 앉아있던 검은 용이 날개를 펴고 쏜살같이 활강했다.
“삑!”
새끼 용은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날렵하게 작은 새앙토끼의 목을 누른 오닉스는 득의양양했다. 하지만 오닉스는 토끼의 숨통을 끊기 직전 멈칫했다.
“착하지, 닉스?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막 잡아먹으면 안 돼.”
자신의 앞발을 꼭 쥐고 줄리엣이 그렇게 단단히 타일렀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위험하니까. 배가 고프면 그냥 나한테와. 알겠지?”
“삐이....”
운 좋은 새앙토끼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달아났다.
폴짝폴짝 도망가는 토끼를 멀거니 바라보던 닉스는 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꾸륵.”
줄리엣이 모습을 감춘 뒤로 닉스는 공작가 사람들에게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
다행히 멀리 날아가 버리진 않았지만, 닉스는 대신 줄리엣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공작성근처만 빙빙 헤맸다.
줄리엣은 이곳에서 7년을 살았으니까. 성 근처에는 줄리엣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처음에 닉스는 줄리엣이 지하에 갇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돌을 깨뜨리고 굴을 열었을 때 줄리엣은 거기 없었다.
'줄리엣, 화났나 봐.'
죽음의 개념이 낯선 아기 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엣이 인간들에게 화가 나서 어딘가로 숨어버렸다고 말이다.
그래서 닉스도 인간들에게 화가 났다.
새끼 용은 낮이면 나무열매나 버섯 등을 찾아 먹었고, 밤이면 나무 위에서 잠을 청했다. 줄리 엣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꼬르륵.
하지만 눈 덮인 북부의 숲에는 이제 닉스가 먹을만한 꽃이나 나무열매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갈등하던 닉스는 터덜터덜성 가까이의 커다란 녹나무로 향했다.
'사과!'
굶주린 아기 용의 눈이 번쩍 뜨였다.
녹나무 아래에는 성에 사는 인간들이 가져다 놓은 약간의 물과 과일이 놓여있었다.
인간들은 닉스가 가까이 오지 않자 용을 포획하는 걸 포기하고 주기적으로 먹을만한 걸 거기에 가져다 두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닉스는 조심스레 음식에 접근했다. 하지만.
텁.
“잡았다!”
“삐약!”
새끼 용이 발을 내딛는 순간 발밑이 훅 꺼졌다. 놀란 오닉스는 자신이 옴짝달싹 못하게 그물에 에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함정에 걸린 닉스는 혼비백산했다. 풀숲에 숨어있던 시커먼 인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역시 인간을 믿는 게 아닌데!
닉스는 화가 나서 마구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그물에 걸려 움직임이 둔해질 뿐이었다.
평소라면 속지 않았겠지만 며칠째 굶은 닉스는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닉스, 나야!”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거세게 몸부림치던 닉스는 흠칫 놀랐다.
아기용은 잠시 반항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맑?”
“착하지? 이제 괜찮아.”
다급한 인간 여자의 목소리가 몹시 편안하고 낯익었던 것이다.
“그동안 말 잘 듣고 착하게 있었어?”
눈이 마주치자 줄리엣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물을 풀어주었다.
오닉스의 호박색 동그란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삐약!”
새끼 용은 서럽게 울먹이며 줄리엣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 *
카우치에서 잠들었던 줄리엣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레녹…?"
“좀 더 자.”
그녀를 침대 위로 옮겨다 주며 레녹스가 입버릇처럼 속삭였다.
줄리엣은 요즘은 정신만 차리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두 달여를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는 사람처럼.
주치의는 몸이 회복되는 과정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줄리 엣은 아무 데서나 잠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자다가 눈만 뜨면 레녹스가 곁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꼭 감시하는 것 같네.”
“감시 맞아.”
줄리엣이 항의하듯 작게 투덜거리자, 그가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최근 들어 레녹스는 입 안의 혀처럼 굴었을 뿐 아니라 부쩍 상냥해졌다.
"대신 사람들한테 조금만 상냥하게 굴어요. 화내는 것도, 거짓말도, 나쁜 말도 안 돼요."
줄리엣이 억지를 쓰듯 아무렇게나 단 조건을 생각보다 성실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사고를 치고서도 공작이 화를 내지 않자 되려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다는 듯 수상하게 보았다.
온화한 레녹스의 태도가 한결 편하면서도 줄리엣은 과연 저 태도가 얼마나 갈까 고대하는 중이었다.
"......?"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그의 옷차림을 본 줄리엣은 순식간에 잠이 싹 달아났다.
레녹스는 평소의 간소한 옷차림대신 그에게 익숙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줄리엣은 곧장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영지를 살피러 가세요?”
“그래.”
레녹스는 순순히 긍정했지만 줄리엣은 살짝 인상을 썼다.
엘리엇이 고스란히 상황을 일러바쳤기 때문에 줄리엣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서 북부의 영주들 사이에서 내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영지경계가 좀 많이 시끄럽습니다.”
엘리엇은 내분이라고 표현했지만 상황은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북부 인근의 귀족들이 크게 둘로 갈린 것이다.
공작가가 흔들리는 틈을 나서 칼라일 가를 치겠다는 귀족들과 좀 더 신중하게 시기를 보겠다는 귀족들로, 어쨌든 이놈이나 저놈이나, 주변의 모든 귀족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공작가를 야금야금 뜯어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더니.
벌써부터 은근슬쩍 군대를 데리고 공작가의 경계를 넘어와서 영지의 숲을 무단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잇달아 전해졌다.
줄리엣은 눈살을 찌푸렸다.
“꼭 상어 떼 같네요."
“상어?”
“음…… 바다에 사는 이빨이 많고 커다란 물고기요. 늑대 같죠.”
“늑대보다는 승냥이에 가깝지.”
레녹스는 빙긋이 웃었다.
“내 시체를 뜯어먹겠다고 덤벼드는 거니까.”
레녹스의 말투는 여전히 온화했다.
줄리엣은 그런 말을 저런 얼굴로 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두 달이나 흘렀을까.”
줄리엣이 사라졌던 그 기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레녹스는 잠시 말없이 침대 헤드를 짚고 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색이 연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천장을 노려보는 줄리엣은 꽤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실은 최근 들어 아주 자주. 레녹스는 줄리엣이 대체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자주 불안해졌다.
어쩌면 앞으로 전전긍긍하며 살겠지. 그럼에도 그는 그것으로 족했다.
레녹스는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채 빙긋 웃었다.
“가지 말까?”
“으응?”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줄리엣은 피식 웃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줄리엣의 아랫입술을 살살쓸고 있었다.
“가지 말라면 안 가요?”
“네가 원하면.”
'진짜……?' 아니, 뭐라는 거야. 댁이 안 가면 어떡해?
"미쳤나 봐.”
줄리엣은 기겁해서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를 떠밀었다.
“다치지 말고 다녀와요."
* *
레녹스가 영지 시찰을 떠난 이후 줄리엣은 조금 더 한가해졌다.
때마침 줄리엣을 보러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의 외조부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데려온 참이라, 공작성 사람들은 성의 보수에 몰두했다.
공짜로 부려먹을 고급 인력이 생겼다고 엘리엇이 매우 좋아하고 있었다.
“해자는 상태가 괜찮습니다. 다만 마법사들 말이 유리온실은 외벽을 교체해야 한다고…….”
하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줄리 엣의 시선은 어쩐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밀란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아, 네.”
“왜 그러십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괜찮을까요?”
줄리엣은 주어를 생략했지만 밀란은 곧장 알아들었다.
“……주군 말씀이십니까?"
“네.”
평소라면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만 줄리엣은 순순해진 레녹스가 신기하면서도 약간 걱정스러웠다.
'상냥하게 굴라고 당부한 당사자가 줄리엣이긴 했지만.'
“요즘 레녹- 전하의 태도가 온 화해진 건 나쁘지 않지만, 어쨌든 공작이시잖아요."
그러자 곁에 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들은 줄리엣몰래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온화? 요즘은 온화하다의 뜻이 바뀌었나?’
'무자비하고 악랄하다는 뜻의 신조어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줄리엣은 정말로 걱정하는 눈치였다.
“혹시 영주들을 다루는 데 문제가 있으면 어쩌죠?"
밀란은 줄리엣이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차렸다.
지난 몇 개월간 칼라일 공작은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행방을 쫓는 일에 몰두했었다. 덕분에 공작이 미쳤다는 둥, 공작가가 무너질거라는 둥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거고, 물론 그게 줄리엣의 탓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3자가 봐도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고 있었다. 줄리엣의 불안은 거기에서 파생됐다.
줄리엣은 행여나 강경책으로 일관하던 칼라일 공작이 온건하게 태도를 바꿨다가 공작가나 그에게 피해가 올까 봐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온건한 칼라일 공작이라니. 무슨 뜨거운 얼음 같은 소리인가.'
밀란은 줄리엣에게 진실을 알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밀란은 양심보다는 하얀 거짓말을 택했다.
“정말 영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피를 보는 일 없이 현명하게 대화로 해결될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밀란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칼라일 공작이 극성맞은 어미새처럼 구는 것은 어디까지나 줄리 엣 한정이며, 그 지랄맞은 성질 머리는 여전하단 것을.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