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03화 (200/229)

203화.

*

“.…두 달이요?"

“예.”

푹 자고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줄리엣은 침실을 벗어나 외출준비를 했다.

그래봤자 비몽사몽 침대에 누워 있다가 하녀장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게 전부지만.

“줄리엣 양!”

도톰한 외투까지 걸치고 잠시 응접실에 앉아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익은 공작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지난 이틀 내내 레녹스가 줄리엣을 독점하느라 줄리엣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두 달이나 지났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줄리엣은 시간 감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뱀에게 끌려간 과정에서 잠시 정신을 잃긴 했지만, 그리고 이런저런 일을 당하긴 했지만.

줄리엣이 지하에서 체감한 시간은 고작 사나흘 정도였다. 그런데 두 달이 사라졌다고? 이것도 악령의 농간인가?

당황한 한편으로 줄리엣은 납득이 갔다.

그녀를 발견한 레녹스가 왜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는지,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굴었는지 말이다.

공작가 사람들이 사라진 줄리엣을 죽었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이신지 몰라요.”

하녀장이 눈물을 글썽였다.

"다들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7년 넘게 공작성에 머무르는 동안 공작성 사람들은 줄리엣과 꽤 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도 가신들은 그녀의 귀환을 몹시 반겼다.

“이제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겠군요!”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 역시 그녀.

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그의 눈물은 좀 다른 종류의 것인 듯 했다.

“안 그래도 드디어 전하께서 집 무를 보시지 뭡니까……!"

“......?"

줄리엣은 그게 왜 기뻐할 일인가 의아했다.

잠시 후 외출복 차림의 레녹스가 응접실로 들어오자 가신들은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그럼 잘 다녀오십쇼, 아가씨.”

마지막으로 인사하면서 밀란은 은슬쩍 외조부에게는 자신이 연락했으니 걱정 말라고 귀띔해주었다.

달칵.

하지만 레녹스는 그녀를 데리고 곧장 성 밖으로 나가는 대신, 응접실에 둘만 남자 그녀의 앞에 웬트레이를 내밀었다.

“먹어."

“이게 뭐죠?”

“처방약.”

은쟁반에 곱게 받쳐나온 것은 따끈하게 데운 약이 담긴 잔과 동그란 통이었다.

'아.'

그러자 줄리엣은 간밤에 비몽사몽 했을 때 주치의를 본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피로가 누적된 것뿐 별다른 이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게 꿈이 아니었구나.' 줄리엣은 조심스레 잔을 들여다 보았다.

포도주색 물약은 여러 가지 약초를 달여낸 일종의 보약이었다.

이전에도 먹어본 적 있는 줄리엣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몸에 좋다는 값비싼 약재를 다 넣어 효과는 좋다지만 이 약은 맛이 끔찍했다.

자고로 애나 어른이나 입에 쓴 약은 먹기 싫은 법이다.

줄리엣은 나중에 다녀와서 먹겠다고 하면 안될까 싶어 레녹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레녹스는 절대 그냥 나갈 눈치가 아니었다.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짐짓 다정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먹여줘?"

레녹스 칼라일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말도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줄리엣은 어쩔 수 없이 약이 든 잔을 집어 들었다.

'비싼 거니까 먹는다.'

혀에 닿자마자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한 맛이 느껴졌다. 줄리엣은 눈을 질끈 감고 약을 겨우 삼켰다.

“착하네.”

줄리엣이 빈 잔을 내려놓자 레녹스가 싱긋 웃었다.

“입 벌려.”

"......?" ”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자 그가 입 안에 사탕 하나를 넣어주었다.

그가 약 접시와 같이 가져온 동그란 함이 뭔가 궁금했는데, 사탕통이었던 것이다.

"가자.”

레녹스는 줄리엣이 약을 다 먹은 걸 확인하고서야 밖에 준비해 둔 말에 태워주었다.

그나마도 레녹스는 줄리엣을 혼자 말에 태우지도 않았다.

줄리엣을 옆 안장으로 앉힌 다음 말에 올라 그가 고삐를 쥐었다.

입 안에서 천천히 사탕을 굴리며 줄리엣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완전히 환자 취급이네.'

그들의 목적지인 호수는 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레녹스는 말을 천천히 걷게 했다.

덕분에 걸어가는 것보다 조금 빠른 정도였다.

호수까지 가는 내내 줄리엣은 소중히 챙긴 보석 상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당연히 소중했다. 이걸 처리해야 그녀의 나비들이 뱀을 멀리 쫓아내고 저주를 풀 수 있다고 했으니까.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줄리엣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냥.”

싱겁긴.

줄리엣은 눈썹을 까딱했다.

처음 봤을 때는 다소 안쓰러워 보였던 레녹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져 있었다.

조금 긴 것 같았던 머리를 자르고 온 건지, 아니면 옷차림이 달라진 덕인지. 유난히 반짝반짝한 인상인데 뭐가 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날이 선 턱선이나 뺨이 그녀의 기억보다 조금 마른 것 같긴 했지만,불과 이틀 전 밤만 해도 그녀를 죽일 듯 흉흉하게 노려보던 시선은 조금 다른 종류의 집요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지?’

줄리엣이 의아해하는 사이 그들은 어느덧 호숫가에 도착했다.

레녹스는 말없이 줄리엣을 내려 주었다.

“이걸 호수에 던지랬어요."

줄리엣은 장갑을 벗고 칼라일 가의 가보였던 보관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레녹스는 잠시 줄리엣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해.”

“내가요?"

“그래.”

머뭇거리던 줄리엣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호수의 데크끝까지 걸어간 다음, 보랏빛 보석이 박힌 티아라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퐁당 소리조차 없이 수면 아래로 보관이 가라앉았다.

줄리엣은 보관이 어떻게 되었나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특유의 검은 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관을 떨어뜨린 자리에서는 잠시 보글보글 작은 물방울이 올라 오는가 싶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녹아든 것처럼.

정말 이걸로 된 걸까?

줄리엣은 설렘 반 의심 반으로 조금 들떴다. 당장이라도 나비들을 불러내 묻고 싶었지만 나비들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혹시나 방해가 될까 봐 무서웠다.

“줄리엣.”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끝난건가.”

“아마도요.”

줄리엣은 오랜만에 편안해져서 싱긋 웃었다.

“곧 봄이 오겠죠.”

줄리엣은 정말로 기쁜 것처럼 보였다.

레녹스는 눈을 빛내며 웃는 줄리 엣을 신중하게 망막에 담았다.

“그럼 돌아가자.”

레녹스는 괜히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줄리엣의 망토를 여며주었다.

줄리엣은 꽤 기분이 좋은 듯 답지 않게 재잘거렸다.

"겨울옷도, 벽난로도 안녕이네요.”

“봄이 오는 게 그렇게 기쁠 일인가?”

다소 날이 선 레녹스의 기색에 줄리엣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요. 겨울이 길어져서 당장 지금도 농작물도 야생동물도 얼어 죽고 있잖아요.”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그건 북부의 영주인 그가 더 걱정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레녹스는 서늘하고 담담한 눈으로 그녀에게 거듭 캐물었다.

“그리고 나면?"

“뭐가요?”

“그 다음에도 곁에 있을 건가?”

“네?”

“줄리엣.”

레녹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나는 네가 매일 죽는 꿈을 꿨어."

눈만 감으면 그는 반복해서 악몽에 시달렸다.

피투성이가 된 줄리엣이 죽어가 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꿈이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건 더욱 끔찍했다.

줄리엣은 그동안 그가 자신을 죽였다고 생각해왔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묻는 거야. 봄이 끝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내 옆에 있을 건가?"

줄리엣은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레녹스는 속이 타는 것 같았다.

“내가 떠나고 싶다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약 제가 더는 전하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아서, 혹은 다른 사람이 좋아졌으니 떠날 거라고 하면요?”

줄리엣의 푸른 눈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투명했다.

“그땐 저를 순순히 보내주실 거라고 맹세할 수 있으세요?”

당연하게도, 줄리엣은 그를 떠날 생각인 것이다.

레녹스는 자신이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으려면 네 뜻을 존중하겠다고 이야기해야겠지만, 그는 그러기 싫었다.

“…아니.”

레녹스는 자신의 뻔뻔함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짓으로라도 놓아주겠다고 약속하기 싫었다.

“너는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알아.”

지난 몇 개월은 그에게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살아있는 줄리엣을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누구에게 비는지도 모르고 애원했다.

그를 미워해도 좋고 그를 떠나도 좋으니 어떻게든 살아만 있어 달라고, 그리고 기적처럼 줄리엣이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애정을 요구하거나 웃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설령 그녀가 자신을 지긋지긋 해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레녹스는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동정하기를 바랐다. 최소한 그러면 그에게 한 조각 관심이라도 있다는 뜻일 테니까.

“제발 그냥 옆에만 있어."

“킥.”

줄리엣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우습네…… 당신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과거의 누가 알았을까?”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줄리엣의 뺨은 차가운 바람 때문에 발그레했다.

줄리엣은 잠시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녹스.”

줄리엣은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나는 평생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아."

레녹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네가 날 증오하는 거. 그러니까, 평생 나를 미워해도 돼.”

레녹스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줄리엣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들어요.”

줄리엣이 갑자기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의 옷깃을 꽉움켜쥐었다.

“나는 아무 데도 안 가요.”

평생 겸손을 모르고 살아온 남자의 붉은 눈이 잘게 흔들렸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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