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02화 (199/229)

202화.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또 꿈이지.”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되뇌었다.

레녹스는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어차피 뻔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 게 분명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을 예쁜 입술로 지껄이다가,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수면향을 끊은 부작용인 걸까, 아니면 드디어 미쳐서 환각제 없이도 악몽을 꾸는 건지도 모르겠다.

"......?"

한편 줄리엣은 이 상황을 도통이해할 수 없었다.

경멸과 분노를 담은 붉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레녹스를 알아 온 줄리 엣조차 움찔할 정도로 싸늘한 시선이었다.

분명 방금 전 꺼지라고 말한 주제에 레녹스는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그는 줄리엣을 붙잡고 도통 놓아주질 않았다.

줄리엣을 노려보던 남자가 내뱉었다.

"너한테 놀아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레 다른 손으로 줄리엣의 뺨과 눈두덩을 손끝으로 쓸었다. 눈송이의 표면을 만지듯, 몹시 신중한 손길이었다.

“줄리엣.”

턱을 강하게 틀어쥐는 손길에도 줄리엣은 겁에 질리진 않았다.

“내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잖아.”

“뭘…?”

"너를 찾고 나면, 그때 죽어주겠다고 했지.”

'……뭐라고요?'

줄리엣은 귀를 의심했다.

누가 죽어?

거기서 줄리엣은 어렴풋이 눈치 챘다.

"계약자, 서둘러야 해.”

나비들이 서두르라고 한 것은 보관을 빨리 처리하라는 재촉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로 위험한 것은 제정신이 아닌 레녹스 칼라일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테니까…… 네 시신만 찾으면, 그때 죽어준다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레녹스는 반쯤 꿇어앉은 자세였다.

왜 진즉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무리 뱀이 부추겼다고 한들 애초에 정상이면 시간을 되돌릴 생각을 못했겠지.

경악한 줄리엣은 놀란 나머지 손에 꼭 쥐고 있던 상자를 툭 떨어뜨렸다.

"너"

그러자 어쩐지 당황한 듯한 레녹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왜 울어?”

환각이 울기도 하던가?

순간 레녹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줄리엣은 그가지적하기 전까지 자신이 우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줄리엣은 레녹스가 당황하건 말건 관심 없었다.

“……흐윽.”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데!

그녀는 순간 서러움과 안도감이 뒤섞여서 감정이 북받쳤다.

‘당신이 나를 죽인 게 아니래..'

그랬으면서. 왜 다 잊었어?

“전부 나만 기억하고, 왜 나만…”

처음에는 그냥 놀라서 눈물이 났던 것뿐인데, 줄리엣은 슬슬 진심으로 화가 났다.

“사람이 기껏 고생하고 돌아왔는 데….”

대뜸 꺼지라질 않나, 죽는다는 소리나 하고!

“.....…줄리엣?”

화를 내는 줄리엣을 보던 레녹스는 문득 깨달았다.

움켜쥔 손목 아래에서 작은 새의 심장처럼 팔딱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꼭 살아있는 줄리엣처럼.

그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눈을 맞추고 줄리엣을 달래려고 애썼다.

"아냐, 미안해. 가지 마.”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남자는 정신없이 사과의 말만 주워섬겼다.

“젠장.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레녹스는 숫제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자기를 허깨비 취급하고 폭언을 퍼부은 걸 잊지 않았다.

“제발, 좀, 울지 말고 뭐든 원하는 걸 말을 해.”

하지만 줄리엣은 고상한 대화로 이 울분을 풀 생각이 없었다.

짜악.

그래서 줄리엣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공작성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틀림없이 들었습니다, 부단장님!”

채 동이 트지도 않은 어스름한 시각부터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것은 기사단 부단장인 밀란 경과 그의 수하인 주드, 그리고 수석비서인 엘리엇이었다.

"분명 여자 울음소리였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겁에 질린 눈치로 성의 경비병들이 기사단 숙소로 꼭두새벽부터 쫓아온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간밤에 칼라일 공작 외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할 동관에서 여자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어이구. 하다 하다 이제는 귀신입니까?”

주드가 탄식했다.

안 그래도 최근 칼라일 공작가의 소문은 최악이었다.

공작이 미쳤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이제는 성에 귀신이 나온단 소문까지 더해지게 생겼다.

“영지 한번 잘 돌아가는군요."

엘리엇이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밀란 경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확인은 해야지.”

그들은 조심스레 동관의 2층 침실로 향했다.

침실의 주인이 실종된 이후로 칼라일 공작은 이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마치 스스로를 감금한 것처럼,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저번처럼 누군가 닮은 여자를 의도적으로 들여보낸 걸 수도 있잖은가.”

밀란 경의 말에 주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칼라일 공작은 적을 많이 만드는 성격이었다.

지난 한 달간, 어떻게 알았는지 칼라일 공작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경쟁 가문들에서 첩자나 자객을 몇 번이나 보낸 일이 있었다.

다행히 실패했지만, 어쩌면 간밤의 울음소리는 비슷한 일일지도 몰랐다.

똑똑.

“주,"

문을 아주 살짝 노크했을 뿐인데, 갑자기 침실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밖에서 시립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움찔했다.

“주군…?"

“소리 낮춰.”

그는 밖의 가신들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입단속부터 했다.

더 이상한 건 밖으로 나온 레녹스 칼라일의 모습이었다.

그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옷차림도 좀 더 흐트러진 것 같고.

게다가 가장 이상한 건 그의 왼뺨이 부어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빼면 그는 평소보다 눈빛이 침착하고 맑아져 있었다. 눈이 돌아서 북부를 뒤집어 엎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 보이긴 했지만 레녹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흰 시트를 둘둘 만 것 같은 걸 들고 나왔다.

깨지기 쉬운 것을 옮기듯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고 순간적으로 가신들은 그들의 주군이 정말로 소문대로 미친것인가 의심했다.

'커다란 베개?’

'시체인가?'

천만다행으로 그들의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흰 시트에 덮인 것은 여자였다.

"......?"

목을 길게 빼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은 공작의 험악한 당부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주, 줄리엣 아가씨!"

“아니, 대체 어떻게 ……!"

엘리엇은 물론이고 침착한 부기사단장마저 입을 딱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곤히 잠든 줄리엣이었다.

정작 칼라일 공작은 피곤한듯한 눈가를 찌푸렸다.

"조용히 해. 깨잖아.”

나직한 말소리였지만 가신들은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녀장은?"

“예? 아, 아마 남관에……."

“목욕물부터 데우라고 전해."

레녹스 칼라일은 뭔가 설명하는 대신 잠든 여자를 데리고 복도를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기사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뺨은 왜 그 모양인지 묻지도 못했다.

“주, 주군.…!"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

첨벙.

“더 자도 돼."

“으응.”

줄리엣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참방거리는 더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이었다.

자신을 다독이는 나직한 목소리에 안도한 줄리엣은 스르륵 다시 눈을 감았다.

욕실을 나오고서도 줄리엣은 잠에 취해있었다. 그녀는 레녹스가 수건으로 꼼꼼히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는 동안에도 그에게 머리를 내맡긴 채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레녹스는 자신에게 기댄 채 잠든 줄리엣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더없이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고른 호흡을 내쉬는 줄리엣이 제 손 안에 있었다.

간밤에 줄리엣은 분해하며 좀처럼 울음을 그치질 못했다.

“멍청이야? 죽긴 대체 누가 죽어?”

몹시 서러워하며 그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지만 레녹스는 줄리엣이 겁에 질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만 더 죽었다느니, 따라 죽겠다느니 그런 말 해봐요.”

그는 정확히 줄리엣이 뭘 겁내는지도 모르고 우는 줄리엣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발치에 무릎을 꿇고 수없이 용서를 구했지만, 끝끝내 줄리엣은 그를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것도 서럽고, 저것도 서러웠고, 저를 따라 죽을 생각을 한 너는 멍청이에 등신이라고 매도하면서 엉엉 울었다.

“그것도 사과해요. 빨리.”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런다고 약속해요.”

"약속할게.”

“나한테 못되게 말한 거, 그리고 속이고 혼자 간 것도.…...”

레녹스는 줄리엣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서러워하는 게 무엇 때문인지 전부 이해하진 못했다.

"왜 나만 기억해야 해? 당신은 전부 다 잊었는데....."

하지만 줄리엣의 원망 섞인 그 한마디만은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줄리엣은 울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뱀이 그를 이용하기 위해 줄리엣을 죽이려고 한 것이며, 뱀의 진짜 목적은 다름 아닌 그의 악령인 벨로키타나의 능력이었노라고, 하지만 레녹스 칼라일에게 중요한 건 오직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가 줄리엣을 조심스레 침구 위에 눕히자마자 그녀가 살풋 눈을 떴다.

“레녹…?"

“응. 여기 있어.”

줄리엣은 여기가 어딘지 가늠하는 것처럼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밤새 여기 있었어요?"

레녹스는 대답 대신 줄리엣을 마저 눕혔다.

“...…아프겠다.”

무슨 말인가 하고 보니 줄리엣의 시선이 그의 팔목 언저리에 쏠려있었다.

레녹스는 오래된 흉터와 생긴 지얼마 안 된 상처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다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엿본 과거에서 줄리엣의 몸에는 이보다 심한 상처가 많았다.

레녹스는 조금 웃으며 물었다.

“신경 쓰여?"

“당연하죠.”

즉답하는 줄리엣은 정말로 속상해 보였다. 순간 레녹스는 자신의 저열함에 환멸이 났다.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 봐겁을 내고, 자신은 죽을뻔했던 주제에 남의 흉터 걱정이나 하고, 그럼에도 줄리엣의 동정조차 기쁜 걸 보면 자신의 인성은 형편없는 수준이고, 미쳐도 심각하게 미친 게 분명했다.

“흉 지겠다.”

줄리엣이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도 상했는데…….”

순간 레녹스는 움찔했다. 지금껏 줄리엣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는 자신이 지금 그녀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그에겐 몹시 생경한 일이었다.

"아, 맞아.”

다행히 줄리엣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말해."

“당신이 날 죽인 게 아니었어요."

줄리엣은 그게 무슨 큰 다행인 것처럼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레녹스는 숨이 옥죄는 것 같아, 차마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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