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
하루 전,
줄리엣의 나비들이 그녀를 공작성으로 보낸 바로 그 전날 밤.
공작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둑, 북부의 기사들은 커다란 모닥불을 켠 채 막사 앞에 모여있었다.
“차라리 시신이라도 나오면 좋 좋을 텐데요.”
기사들은 불 켜진 막사를 힐끔거렸다.
그들은 산을 쥐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바위를 뚫고 폐광의 바닥에서 돌로 지어진 지하 석실을 찾아냈지만 거기에 줄리엣은 없었다.
설령 폐광 안에서 죽었다고 해도 시신이 나와야 할 텐데. 줄리 엣 모나드는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
흡사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마법사까지 동원되었지만 한 달이 넘게 줄리엣의 행방은 묘연했다.
텅 빈 지하 공간을 보고 모두가 할 말을 잃었을 때, 기술자 하나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혹시 지하수로로 휩쓸려갔을지도 모릅니다.'
산을 끼고 흐르는 물줄기에 쓸려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지 희박한 가능성만으로, 그날 이후 칼라일 공작은 북부의 강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레녹스 칼라일은 미친 듯이 산맥을 끼고 흐르는 강의 지류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럼에도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줄리엣은 물론이고 그녀의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공작가의 가신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줄리엣을 찾기를 바라기도 했고 바라지 않기도 했다.
제정신이 아닌 칼라일 공작을 보는 것도 괴로웠지만 정말로 시신이 나오면 그가 주저 없이 목숨을 끊을까봐 염려스러웠다.
젊은 칼라일 공작은 미혼에, 후 계도 없다.
직계는 죄다 목이 달아나거나 추방당했으므로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부유한 북부는 정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하지만 죄책감에 제정신이 아닌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서 놓지 말았어야지.’
불 켜진 막사 안,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노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가 다시 테이블을 향한 레녹스는 멈칫했다.
- 안녕, 레녹스?
분명 조금 전까지 텅 비어있던 테이블의 맞은 편 자리에 턱을 괸 여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색이 연한 머리칼을 한쪽으로 땋아 늘어뜨리고, 검은 초커 목걸이에 어깨가 드러나는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붓으로 그린 듯 우아한 얼굴과는 달리 다리를 꼰 채 발목을 흔드는 푸른 눈의 여자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그 여자였다.
줄리엣.
하지만 그녀는 줄리엣이되 줄리 엣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린 레녹스는 잠시 막사 입구에 슬쩍 놓인 작은 향 단지를 발견했다.
이어서 그는 눈앞의 여자를 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내뱉었다.
“꺼져.”
-어머, 서운해라.
심술궂게 눈을 빛내는 여자는 줄리엣의 모습을 한 환각에 불과했다.
그의 환각 증세는 열흘 전부터 시작되었다.
레녹스가 도통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제 몸을 돌보지 않자, 보다 못한 그의 비서가 독한 수면향을 구해다 밤마다 몰래 그의 근처에 피우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비서인 엘리엇 입장에서는 공작이 강제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하려고 쥐어 짜낸 특단의 조치였다.
실제로 강력한 수면향은 효과를 발휘했다. 최근 며칠간 그는 짧게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부작용이었다.
그는 잠들지 않고도 악몽을 꿨다. 레녹스는 어렵지 않게 원인을 찾아냈다.
엘리엇이 가져온 독한 수면향중에 환각작용이 있는 흰독말풀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이미 죽었으니 헛수고라니까. 도통 듣질 않으시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환각이 속삭이자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되도 않는 수작 집어치우고 꺼져.”
-그래? 그러면 왜 당신 비서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아요?
줄리엣의 모습을 한 환영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웃었다.
-아니면 저 수면향에서 환각 성분만 빼는 방법도 있잖아?
-난 알아. 당신,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보고 싶은거지.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건 환각제와 그의 죄책감이 뒤섞여 만들어낸 줄리엣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가증스러워. 내 아기를 죽이고도 이제 와 그러고 싶을까?
그가 만들어낸 줄리엣은 붉은 입술로 그를 조롱했다.
-당신, 날 두 번이나 죽게 내버려 줬잖아. 그런 주제에 나한테 사랑하긴 했느냐 물었죠?
그녀는 진짜 줄리엣이라면 결코하지 않았을 신랄한 말을 쏟아냈다.
-그럴 리 없잖아. 그냥 살기 위한 거짓말이었는걸.
그가 기억하는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나, 가짜 줄리엣이 하는 일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그의 악몽 속에서 줄리엣은 예쁘게 웃으며 조곤조곤 독설을 퍼붓고, 그를 비난했다.
-당신 같은 인간에게 진심이 가당키나 해요?
환각 주제에 하는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 하지만 레녹스는 환각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저 수면향을 치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초조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살아있는 줄리 엣이 어떻게 웃고 말하고 움직였는지, 그의 기억 또한 흐려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비록 가짜에 정신을 갉아먹는 짓이지만 이렇게라도 기억을 되살리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견딜 수 없던 것은 이렇게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비웃는 가짜조차도 날이 밝으면 깨끗이 사라지고 만다는 점이었다.
진짜 줄리엣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로, 그는 혼자 남겨졌다.
-정말 내가 좋으면 죽음으로 증명해봐요.
흰독말풀은 중독성은 없지만 종종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심하면 자살 충동까지 시달리게 하는 환각.
그 때문인지 줄리엣의 환상은 그에게로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사랑한다며? 그럼 같이 죽어줘야지.
레녹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들어줄 수 없어, 아직은.”
- 봐
-아하, 그것 봐. 위선자.
줄리엣의 환각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는 두 번이나 날 죽여놓고서. 역시 말뿐이었구나?
“아직은 죽어줄 수 없다는 뜻이야.”
줄리엣의 환영이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의 고개가 갸웃 기울 어졌다.
"너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줘.”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레녹스는 줄리엣을 찾는 일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그녀가 죽었다는 증거를 찾기 전까지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흥. 시시해라.
레녹스는 입술을 앙다무는 줄리 엣의 모습을 신중하게 눈에 담았다. 이 모습을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일 것이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레녹스는 향로의 불씨를 꺼뜨렸다. 그러자 그가 기억하는 줄리 엣의 모습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향로를 치우고 레녹스가 막사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어스름히 날이 밝고 있었다.
“주군.”
그를 발견한 기사가 다가와 보고했다. 알리체 강 하류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우선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물자도 부족하고요.”
하딘의 말에 레녹스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성으로 귀환이 결정되자 기사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말고삐를 쥔 레녹스는 자신의 비서관을 불렀다.
"엘리엇.”
“예, 전하.”
“몰래 수면향을 피우는 건 그만 두지.”
“저, 전하…….”
엘리엇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말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딱히 문책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레녹스는 별말 없이 말에 올랐다.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 만에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성에 도착하자마자 레녹스는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멈춰선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닌 동관의 2층 침실이었다.
달칵.
잠긴 문을 열자 누군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침실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채로 덩그러니 보존된 침실은 그가 유일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레녹스는 카우치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달그락.
얼마쯤 지났을까. 레녹스는 작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가구가 햇빛에 상할까봐 커튼을 내려둔 방 안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레녹스는 자신을 깨운 달각거리는 소리의 범인을 한눈에 찾아냈다.
어두운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의 형체.
어쩐지 잠이 덜 깬 듯 현실감이 없어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공작성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숨어드는 것이 아예 없던 일도 아니었다.
얼굴은커녕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으로 여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더듬더듬 벽을 짚고는 줄리엣의 침실 안을 돌아다녔다.
자객이나 첩자치고는 어설프고, 좀도둑이라면 엉성하다.
레녹스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뭘 하려는 건지 모를 여자의 실루엣을 눈으로 좇았다.
서랍장으로 다가간 여자는 서랍안을 뒤적이더니, 보석 상자같은 것을 조심스레 꺼냈다.
'좀도둑인가.'
여자는 혼잣말로 작게 투덜거리 는가 싶더니, 익숙한 듯 침대 옆창가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순간 레녹스는 몽롱한 잠기운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
줄리엣의 침실에 멋대로 들어온 불청객이 그녀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을 마구 헤집는 것이 미칠 듯 불쾌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를 쥐고 일어난 레녹스는 단번에 침입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어설픈 좀도둑은 그가 접근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죽고싶어 환장한 모양이지."
입에서 나오는대로 내뱉는 그는 꽤 화가 나 있었다.
“아…….”
하지만 정체불명의 여자가 달빛 아래로 끌려나온 순간.
그는 눈을 의심했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뜨인 푸른 눈, 살짝 벌어진 입술.
동그란 이마와 부드러운 얼굴 선. 치렁하게 흘러내린 머리칼.
“..… 줄리엣?"
잠시 아연했던 그는 다시 차분해졌다. 정말 줄리엣일 리 없지 않은가.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