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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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줄리엣은 어두운 실내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가 어디지?
사방이 깜깜해서 줄리엣은 잠시 나비들이 그녀를 엉뚱한 곳으로 보낸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운 건 밤이기 때문이었다. 줄리엣은 자신이 커튼이 내려진 커다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딘진 모르겠지만 드디어 지긋지긋한 지하를 빠져나온 것이다.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네…….'
신기하게 여기면서 줄리엣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주기 전, 나비들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저주 풀려면 부드러운 물, 찾아야 해”
“그 다음은 왕관이야!”
"보라색 관, 호수에 던져야 돼!
그래야 우리가 뱀 멀리 보낼 수 있어.”
"하지만 서둘러! 안 그러면......!”
줄리엣은 여전히 '부드러운 물'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나비들의 반복된 설명에 따르면 그건 북부 공작성 근처의 거울 호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뱀을 담는 그릇이자 족쇄인 아티팩트.
공작가의 가보인 달리아, 즉 보석 관을 가지고 호수로 가야한다고 나비들은 몇 번이고 말했다.
악령을 풀어주거나 다른 차원으로 쫓아내려면 우선 아티팩트를 없애야 하는데, 오직 '부드러운 물'만이 아티팩트를 파괴할 수 있다고 했다.
"알았지? 순서 잘 기억해야 해!”
"보관 먼저, 그리고 호수!”
그럼 그냥 처음부터 보관을 호수에 던져 넣으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잖아?
줄리엣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뭘 서두르라는 걸까?
나비들이 서두르라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줄리엣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 빨리 보관을 찾아서 처리하지 않으면 위험한 걸까?
서둘러 보관을 치워버리지 않으면, 다시 그 뱀이 힘을 되찾는다거나?
벽을 손으로 짚고 걷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여긴…..’
어둠이 눈에 익자 줄리엣은 나비들이 자신을 어디로 보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 방이잖아?’
정확히는 북부 칼라일 공작성.
줄리엣이 머물던 침실이었다.
나비들은 줄리엣을 보석관이 있는 곳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말재주는 좀 모자라도 일처리는 확실하네. 줄리엣은 내심 감탄하며 며 재빨리 보관을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데다 오랜만이라 좀 헤매긴 했지만 줄리엣은 더듬거리며 장식장을 찾아냈다.
레녹스가 보관의 이름이 '달리 아'라는 것을 알려준 뒤로, 보관은 줄곧 줄리엣의 짐 속에 있었다.
'아마 여기쯤 됐을 텐데.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물건을 정리하는 규칙이 있었다.
만약 줄리엣이 중간에 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그녀의 짐이 공작성에 도착했더라면, 꼼꼼한 하녀들은 귀금속을 장식장 두 번째 칸에 넣어뒀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줄리엣의 추측은 옳았다.
거기에 있었다.
손에 잡히는 벨벳 상자를 열자 보라색 보석이 촘촘히 박힌 티아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보라색 보석관은 요사스러운 빛을 발했다.
'그럼 이제 이걸 호수에 .'
던져넣기만 하면 다 끝난다는 거지.
지긋지긋한 저주도, 끈질긴 뱀과의 악연도.
급한 마음에 보관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호숫가로 달려나갈 기세였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이상하네.’
줄리엣은 아까부터 희미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아무리 한밤중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성 안이 적막한가?
하다못해 순찰을 도는 경비병이나 사용인들의 인기척, 혹은 밤에 걸어 두는 램프의 작은 불빛이라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줄리엣이 서 있는 침실 뿐 아니라 성 전체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예 문을 걸어 잠근 것처럼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었다.
다들 어딜 간 거지?
'게다가 이 향냄새는……….’
은은하게 진정제나 약초를 태운 듯한 냄새가 풍기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기분 탓인지 분위기가 좀 스산했다. 커튼은 왜 또 있는 대로 다 쳐 놓았을까?
괜히 어두운 게 아니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불안감에 줄리 엣은 보관 상자를 든 채 창가로 향했다.
차르륵.
침대 옆 커다란 창가로 다가간 줄리엣은 커튼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하필이면 보름달이 완전히 구름 뒤로 숨어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좀 있으면 구름이 걷힐테니 좀 낫겠지. 그럭저럭 만족하고 침실을 살펴보려고 뒤돌던 줄리엣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칼날이 그녀의 목에 닿아있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지.”
단검을 겨눈 남자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가려 있었지만 붉은 눈과 서늘한 눈매만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면 내 말이 말 같지 않았던가.”
남자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는 웃음기는커녕 비웃음조차 없었다. 차가운 말투에 줄리엣은 순간 겁을 먹었다.
다투고, 울고, 윽박지르고, 수년간 뒹굴면서 줄리엣은 피차 서로 험한 꼴을 많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녹스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협박한 적 없었다.
그림자 속에 숨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
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자기도 모르는 새 주춤 뒷걸음질 치려다 그에게 붙들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과 말투. 레녹스는 냉막하다 못해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남자의 손이 그녀의 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래, 이번엔 누구 사주를 받은 쥐새끼지?"
빈정거리는 내용을 보아 좀도둑이나 침입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숨을 죽이고 눈만 깜빡였다.
침실 안을 비추는 달빛은 아주 희미해서 겨우 사물을 식별할 정도였다.
얼마 안 되는 한 뼘의 달빛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대치 중이었다.
창문 그림자에 몸을 숨긴 줄리 엣이 볼 수 있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흉터가 생긴 남자의 팔목 언저리뿐이었다.
"분명 경고했을 텐데.”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단단히 붙든 줄리엣의 목덜미를 그대로 끌어당기자 줄리엣은 속절없이 달빛 아래로 끌려 나왔다.
“한 번만 더 몰래 여자를 밀어 넣으면.”
그 순간,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혔다.
'아.’
그리고 줄리엣은 어둠 속에서 사납게 빛나는 붉은 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 줄리엣?”
시종일관 사나운 태도로 일관하던 남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줄리엣은 그제야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진짜 돌아왔나 봐, 나.'
그간의 고생이 차르륵 떠오르면서 뿌듯함과 서러움이 왈칵 치밀었다.
돌아왔어.
어쩐지 방심하면 눈물이 날 것처럼 목이 됐다.
줄리엣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레녹스 칼라일의 모습은 뱀이 보여주었던, 지옥같은 풍경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있었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너.”
뭔가 인사를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헷갈리는 심장박동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다짜고짜 목숨을 위협받은 탓인지, 아니면 뜻밖의 재회에 놀란 것인지는 줄리엣 자신도 좀 헷갈렸다.
태평하게도, 그를 이 각도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야위었나……?'
이마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귀족적인 콧대와 어쩐지 깊어진 듯한 눈매. 그새 도드라진 턱선, 수려한 외양은 그대로였지만 아무렇게나 걸친 가운 하며. 그는 어쩐지 나른하고 퇴폐적인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줄리 엣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져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헷갈렸다.
'당신이 날 죽인 게 아니었어.'
줄리엣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이제 더는 그 뱀이 활개를 치지 못할 테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 보관부터 처리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줄리엣은 활짝 웃으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을 했다.
“안녕, 레녹스.”
'내가 바꿨어.' 자신이 해낸 것이다. 뱀을 영영가두고, 저주를 풀 방도를 찾아내고.
줄리엣은 그에게 잔뜩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녀를 노려보는 붉은 눈의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어, 그녀의 인사를 받아줄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10년 같은 10초가 흐르고, 충격으로 잘게 흔들리던 남자의 붉은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네가, 왜-"
챙강.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단도가 가떨어졌다.
하지만 레녹스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급히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다급한 동작으로 줄리엣을 부드러운 침구 위로 풀썩 주저앉혔다.
그런 줄리엣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남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흡사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시선을 여전히 줄리엣에게 고정한 채, 이를 악물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동안 줄리엣을 노려보던 레녹스 칼라일이 스스로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또 꿈이겠지."
'뭐라고?' 줄리엣은 그의 혼잣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되묻기도 전에 줄리엣의 연인이 내놓은 감격적인 재회의 의첫 인사말은 이랬다.
“꺼져.”
"......?"
상상도 못 한 환영 인사에 줄리 엣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