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99화 (196/229)

199화.

그녀는 아직까지 손안에서 반짝이는 열쇠를 꼭 움켜쥐었다.

“악마를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자만심과 속임수라더구나.”

줄리엣은 외할아버지에게 들었던 그 한마디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뱀이 강제로 그녀의 과거 기억을 열게 했던 찰나.

그때 뱀의 눈을 피해 나비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줄리엣의 손안으로 몰래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줄리엣이 나비들에게 부탁해 몰래 엿본 건 그녀 자신의 과거 기억이 아니었다.

'퀴리에 모나드.'

수백 년 전, 악령을 속여서 '문’안에 가뒀던 최초의 인간.

나비들은 자신들이 갇히던 순간의 기억을 보여주었고, 줄리엣은 퀴리에 모나드가 어떻게 악령을 속여 문 안에 가뒀는지 알게 되었다.

거기다 줄리엣은 최근 한 가지 눈치챈 사실이 있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저 교활한 뱀은 그녀를 터무니없이 우습게 보고 있었다.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 거라고,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악령다운 자만심이었다.

줄리엣은 이전 생의 자신을 싫어했다.

이제나저제나 버림받지는 않을까 전전긍긍 불안해하고, 지레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고, 그건 그녀에게 마주하기 두렵고 끔찍한 기억이었다. 무력하고, 휘둘리는 과거의 자신은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그 정도에 무너질 정도는 아닌데.’

고작 악몽을 꾸는 정도에 미쳐버릴 만큼 약해빠지지는 않았다.

는 뜻이다. 그녀는 두 번의 생에서 잔인한 일을 수없이 겪었지만 아팠던 만큼 단단해졌다.

“오지 않을 거야.”

줄리엣은 직감했다. 누군가 구하러 오기 전에 자신은 여기서 죽을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여기 갇힌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 이틀?

몸이 아프니 시간 감각조차 모호했다.

'그래도 말해 주고 싶었는데.'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줄리엣은 눈가를 훔칠 기운도 없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되뇌었다.

'내가 없어도, 당신이 괜찮았으면 좋겠어.'

뱀이 보여 줬던 과거의 일 중에 딱 하나, 줄리엣을 놀라게 했던 장면이 있었다.

그건 그녀의 기억이 아니었다.

대신, 줄리엣 자신이 죽은 다음에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었다.

한 남자가 인세의 지옥 한가운데에 서 있는 풍경이었다.

사방에 산처럼 시체가 쌓여 있고, 몹시 지쳐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남자가 검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레녹스 칼라일이 너를 되살리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궁금하지 않아?”

뱀이 그 장면을 보여준 것은 아주 잠시 뿐이라 줄리엣은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끔찍한 장면임은 틀림없었다. 찰나였지만 레녹스는 정상적인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뱀은 그게 '시간을 되돌리기 위 한 대가' 라고 했다.

그가 뭘 바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엣은 이번만큼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

그래서 줄리엣은 절망하는 동시에 안도했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를 구슬려 검은 표범의 능력을 이용하라고 부추길 뱀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이번에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여기서 나가야 했지만….

"나가고 싶어?”

"......?"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줄리엣은 소스라쳤다.

그러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그녀는 혼자 있지 않았다.

줄리엣은 조그만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동글동글한 머리, 통통한 흰 뺨.

머루알 같은 십수 쌍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시 공포에 질렸던 줄리엣은 간신히 이성적인 사고를 도출해냈다.

"… 나비야?”

"맞아!”

“우리야!”

다섯 살쯤 되는 어린애 모습을 한 나비들이 기쁜 듯 그녀를 우르르 둘러쌌다.

"왜…… 인간이 됐어?"

줄리엣은 얼떨떨해서 물었다.

“우리가 뱀한테 이겼어!"

“그래서 뺏었어!”

“이제 이 능력은 우리 거야!"

나비들은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혼란스러워하던 줄리엣은 이 불가해한 나비들이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는 엄청난 수다쟁이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심지어 이제는 더듬거리지도 않았다.

물론 어휘력은 여전히 다섯 살 수준이라, 말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줄리엣은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대충 ‘뱀이 나비들의 능력을 가로채서 환시를 쓸 수 있었던 것처럼, 반대로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빌리는 능력을 나비들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정도로 알아듣기로 했다.

"아.”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줄리엣은 늑골을 붙잡고 신음했다.

그러자 나비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계약자, 여기 아파?”

“우리, 고쳐 줄 수 있어!”

줄리엣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무슨 수로?”

“옛날에, 뱀이 잡아먹었어, 물고기!”

“이건 신전에 숨어 살던 물고기 능력이야!”

“바보 같은 물고기!"

… 저건 또 뭐라는 건지. 줄리 엣은 해석을 포기했다.

한마디 질문을 하면 서너 마디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야단법석을 떨던 나비들이 그녀를 꼭 끌어안자, 놀랍게도 숨만 쉬어도 죽을 것 같던 통증이 사라졌다.

‘치유력인가?'

늑골 부분을 만지작거리던 줄리 엣은 문득 깨달았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나비들은 완전히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게다가 전에 없이 이상한 능력을 마구 써대는 걸 보니, 뱀과의 힘의 우위가 바뀐 것 같다.

'그렇다면…….'

줄리엣은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나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은근슬쩍 물었다.

“있잖아, 그럼 이제 어디든지, 보내줄 수 있어?"

"응! 계약자 어디 가고 싶어?"

“우리, 어디든 갈 수 있어!"

“계약자도 어디든 갈 수 있어!"

물론 당장 급한 건 여기서 나가는 일이었지만, 줄리엣은 잊지 않고 있었다.

검은 표범이 말해 주었던 저주를 푸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는, 저주를 건 악령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나비들의 능력은 어디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필드(field)의 권능.

“그러면 저기 문 뒤에 갇혀 있는 뱀도 아주 멀리 쫓아 버릴 수 있겠네?”

멈칫.

앞다투어 애교스럽게 안겨 들던 어린아이들, 그러니까 나비들은 일제히 굳어 버렸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어린아이 십수 명의 표정이 동시에 굳는 걸 보는 건 아무리 귀여운 생김새라고 한들 꽤나 섬뜩한 장면이었다.

줄리엣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왜? 못 해?”

"아냐! 할 수 있어……"

"우리, 문 열 수 있어!”

발끈한 나비들이 쭈뼛거리면서도 외쳤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줄리엣은 상냥하게 부탁했다.

“그러면 저 뱀을 원래 왔던 차원으로 되돌려 보내 줘. 응?”

교활한 뱀이 공작가에 건 저주를 푸는 법은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비들은 어쩐지 줄리엣을 힐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래?”

우물쭈물하던 나비들은 하나씩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

뱀 무서운데"

"아냐, 조금만 무서운 거야!"

"맞아! 조금만!”

“어쨌든 약간 조금 무서워…….”

줄리엣은 인내심을 가지고 나비들을 살살 구슬렸다.

“갇혀 있는데 뭐가 무서워? 그냥 멀리 쫓아 버리면 되잖아.”

"그치만…."

머루 알 같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던 나비들은 갑자기 한껏 연약한 척을 했다.

“우리, 힘들어….….”

“뱀, 멀리멀리 보내려면 힘 많이 써야 해.”

“그러면 이렇게 귀엽게 생기지.

도 못하는데……."

“계약자는 우리 다시 못생겨져도 좋아?”

줄리엣은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뱀이 그랬던 것처럼 악령이 인간 흉내를 내는 건 좀 섬뜩해서 내심 다시 나비로 돌아오면 안 되나,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줄리엣은 은열쇠를 꺼내 나비들 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나비들의 시선이 은열쇠를 따라 움직였다.

“너희가 먼저 뱀을 멀리, 다른 차원으로 쫓아 주면 너희 모두 아티팩트에서 풀어 줄게."

효과가 있었다.

아티팩트 얘기가 나오자마자 나비들의 검푸른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풀어 줘?”

“……그럼 우리, 원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래. 대신 방법은 너희가 가르쳐 줘야 해.”

“그건 간단해!”

“부드러운 물!”

“먼저 부드러운 물, 찾으면 돼!"

“그리고 우리 풀어줘!”

부드러운 물? 그게 뭐야?

줄리엣이 물어볼 새도 없었다.

신이 나서 그녀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나비들이 갑자기 멈칫했다. 나비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눈빛이 돌변했다.

“하지만 인간은 거짓말을 잘해."

“맞아. 전에도 그랬잖아?"

“우리, 이제 바보 아니야!”

“또 안 속아!”

까만 눈 십수 쌍에 적의가 어렸다.

줄리엣은 등골이 쭈뼛 곤두섰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동글동글 귀여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나비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악령이었다.

약해 보이면 언제 돌변해서 잡아먹힐지 모른다.

“아냐, 이번엔 정말이야. 믿어도 돼.”

“맹세할게.”

줄리엣은 태연히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

“이거 뭔데?”

어린아이 모습을 한 나비들은다행히 정신연령도 다섯 살이었다.

금방 호기심을 느낀 나비들이 손 모양을 따라 하며 와글와글모여들었다.

“이건 약속할 때 하는 손 모양이야. 이렇게 손가락 걸고, 도장.”

“도장?”

“그럼 계약자, 약속 지켜?"

“응. 도장 찍었으니까.”

“정말…?"

“정말정말.”

"으으음…….”

인간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나비들은 힐끔힐끔 저희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더니,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 지켜야 해!"

"우리, 계약자 좋아하니까!"

나비들이 애교스럽게 찰싹 안겨들었다.

“그런데, 계약자 ….…!”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나비들의 눈치가 묘해졌다. 왠지 뒤가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몇몇 나비들이 쭈뼛거렸다.

"저기 있잖아…….”

“응?”

“근데 계약자, 서둘러야 해.”

뭘?

그녀가 무엇을 왜 서둘러야 하는지, 줄리엣이 답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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