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문?’
그건 언젠가 줄리엣에게 나비들이 보여 줬던 커다란 문과 똑같이 생겼다.
끼이익.
“널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아주 오래 고심했단다.”
뱀은 노래하듯이 지껄였다.
"그놈 눈앞에서 찢어 죽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좀 식상한 것 같더라고?”
따악.
"....…!”
줄리엣은 소스라쳤다.
뱀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하의 어둡고 차가운 석실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은 사방이 빽빽한 숲 안에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의상조차 바뀌었다. 줄리엣은 검은 상복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발견했다.
“무슨 짓을…….”
겁에 질린 인간 여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직감한 것처럼 보였다.
“항상 궁금하더라고, 너희 인간들은 은근히 신체적 고통은 제법 잘 버티던데, 과연 정신적으로는 어디까지 망가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줄리엣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비가 쏟아지는 숲길에 있었다.
진짜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환영인 게 분명한데도, 피부를 세차게 때리는 차가운 빗줄기가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다.
우르릉, 쾅.
-줄리엣! 아가!
-뭐 하는 거야, 릴리안! 어서 도망치지 않고!
부서진 마차, 검이 부딪히는 소리.
어머니의 비명과 아버지의 마지.
막 외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줄리엣은 숨이 꽉 막혔다.
이건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이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투로 뱀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마,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 * *
"그만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엣 모나 드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괴로운 듯 흐느꼈다.
“이런. 기껏 네 나비들이 과거를 보여주겠다는데, 성의를 무시하면 쓰나.”
뱀은 다정하게 속삭이며 줄리엣의 어깨를 짚었다.
를 었다.
“똑바로 봐두라고. 네 과거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뱀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겨우 하찮은 인간들이 자꾸만 자신의 계획을 훼방 놓고, 멋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데에 화가 났었다.
하지만 현재는 무척 즐거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인간 여자는 숫제 서럽게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조금만 자극해도 울음을 터뜨리기는, 약해 빠진 게 시시하기까지 하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뱀은 인간 여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겁게 관찰했다.
이전 생에 그녀는 충분히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다.
부모가 살해당하고, 연인에게 외면받고.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잃고.
결국 연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순간,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독이 든 잔이었다.
줄리엣 모나드를 고문하는 데에는 공들여 가짜 악몽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단순히 과거 기억을 훑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고통스러워했다.
줄리엣의 가느다란 어깨선이 흐느끼듯 들썩였다.
“제발…… 이런 건 보고 싶지 않았어……”
"다른 것도 보여 줄까?”
뱀은 우아하게 웃으며 우악스럽게 나비들을 움켜쥐고 명령했다.
그러자 눈앞의 장면이 휙휙 바뀌었다. 본래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을 보여 주는 환시는 나비 마물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기에서 승리했 했고, 이제 나비의 권능은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넓은 연회장 안에 서 있었다.
“그래, 맞아. 이건 네가 죽던 날의 기억이란다.”
뱀이 짐짓 다정하게 웃으며 속삭이자 줄리엣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흐윽…"
뱀은 일그러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줄리엣 모나드라는 여자의 영혼은 악령의 기준으로도 꽤나 탐스러웠다.
필드의 권능을 가진 악령의 계약자답게 그녀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깊고 광대한 정신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뱀은 흡족하게 웃었다. 제물로 그녀를 고른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 사이 배경은 다시 바뀌어 그들은 붉은 휘장이 내려진 커다란 침실에 와 있었다.
피에 젖은 침상과 다급히 움직이는 하녀들. 그리고 문가에 못박힌 듯 망연히 서 있는 젊은 남자의 실루엣.
대충 어느 시점의 기억인지 짐작이 갔다.
뱀은 느긋하게 웃으며 어리석은 인간 여자가 괴로워하는 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해.”
“그렇게 애원해 봤자."
“시시하니까 그만하라고.”
"......?"
빙글거리던 뱀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울며불며 고통에 에찬 목소리로 애원하던 인간 여자가 조금 이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무미건조했다.
‘고통을 곱씹다 미쳐 버린 건가?’
여전히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검은 드레스차림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고개를 든 줄리엣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은커녕 서늘한 미소만 걸려 있었다.
'뭐지?'
뱀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서 일어난 줄리엣은 태연하게 치맛자락을 툭툭 털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네.”
“뭐?”
줄리엣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곡선을 그렸다.
“그거 알아? 너희 악마는 거짓말을 못 하지만, 인간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거든."
“그게 무슨 소리……….”
줄리엣은 손에 쥔 작은 은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하! 그깟 걸로 뭘 어쩌겠다고?”
하찮은 인간 주제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뱀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계집! 그 열쇠는 네 사역마에게나 통하는 거야!”
뱀은 잠시나마 줄리엣의 싸늘한 미소에 움찔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여자의 어리석음에 웃다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깟 아티팩트가 뭐라고, 저건 그녀의 멍청한 나비들을 협박할 때나 먹히는 열쇠였다.
그래, 줄리엣의 사역마인 나비들은 꽤나 유명했다.
손꼽힐 만큼 강력한 악령이면서, 어리석게도 인간의 속임수에 넘어가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던…….
"......?"
뱀은 문득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 놓쳤지?
“아니, 멍청한 건 너야."
기만과 속임수의 왕을 상대로, 인간 여자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줄리엣의 느긋한 태도에는 어떠한 품위마저 느껴졌다.
“여긴 내 영역이야, 멍청한 짐승아.”
“뭐……?”
뱀은 그제야 위화감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나비들이 강제로 연 줄리엣 모나드의 기억, 즉 그녀의 필드 안이었다.
아차.
'너무 깊이 들어왔어.'
빨리 이 공간에서 나가야 했다.
그제야 뱀은 자신이 줄리엣 모나 드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지는 데에 심취한 나머지, 너무 깊이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뱀은 여전히 줄리엣 모나드가 자신에게 뭔가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약해빠진 인간, 성유물도 지켜줄 레녹스 칼라일도 없는 이상 그녀는 자신의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줄리엣 모나드의 여유로운 태도만큼은 확실히 뭔가 꺼림칙했다.
마음이 급해진 뱀은 다급히 나비들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힘없이 휘둘리던 연약한 나비들은 재처럼 변해 손아귀에서 바스스 흩어져 버렸다.
파앗.
그리고 어디선가 생기 넘치는 나비 떼가 나타나 시야를 뒤덮었다.
“이게 무슨…….”
“방금 네 입으로도 말했잖아.”
“뭘?"
“내 아둔한 나비들이 제 꾀에 넘어가 어떤 꼴을 당했었는지.”
잠시 뱀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뱀은 그녀의 주변에서 생기 있게 나풀거리는 푸른 나비들을 볼 수 있었다.
먼 과거에, 저 아둔한 나비들은 어리석게도 퀴리에 모나드라는 인간에게 속아서, 자신들을 문안에 가둬버렸다..….
줄리엣은 빙긋이 웃었다.
“그래. 악마를 풀어 줄 수 있으면, 도로 가둘 수도 있는 거지.
그걸 왜 이제야 눈치챘나 몰라?"
그리고 다음 순간, 뱀은 줄리엣모나드가 문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눈치채기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거대한 문이 그들 사이에 나타나 있었다.
끼이익.
뱀은 문 안에, 그녀와 나비들은 밖에.
찰칵.
줄리엣이 반짝이는 열쇠를 흔드는 것과 동시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이……! 당장 이거 열......!"
쿵.
분개한 뱀의 목소리는 매정하게 닫혀 버린 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털썩.
문이 닫히고 나자 주변은 다시 깜깜하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지하 석실로 바뀌었다.
나비들도 힘을 다했는지 눈앞에서 사라졌고, 줄리엣은 완전히 탈진해서 돌바닥 위로 아무렇게나 쓰러져 버렸다.
‘끝났네.'
검은 표범의 말대로 줄리엣은 악령을 죽일 수도,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낼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뱀을 가둘 수는 있었다.
수백 년 전, 퀴리에 모나드가 나비들을 가둬버렸던 것처럼.
이제 뱀은 누군가 풀어주기 전까지는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흐읏.….”
부러진 늑골이 다시 쑤셔 왔다.
줄리엣은 바로 누울 생각도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극도로 긴장한 탓에 잊고 있었던 피로와 통증이 몰려왔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 살아나갈 수 있을까?'
줄리엣은 문득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기껏 뱀을 영원히 가둬 버리는 데에 성공했는데, 갇힌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못 나가겠지.”
줄리엣은 자포자기해 웃어 버렸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