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레녹스 칼라일.
벨로키타나는 자신의 계약자를 꽤 좋아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인간을 봐왔지만, 그는 악령 들린 검의 소유주가 되고도 뭘 해 줄 수 있느냐 묻지 않은 최초의 계약자였다.
"쓸 만하군.”
그는 단지 녹슬지 않는 검이라는 사실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
벨로키타나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욕망이 없는 인간을 만나는 것은 무척 드물다.
그리고 악령의 힘을 빌리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아는 현명한 인간을 만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아마 이번 생에서 불의의 사고로 일시적으로 시력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계약자는 자신과 말을 섞는 것조차 귀찮아했을 터였다.
나태한 악신과 오만한 인간 계약자는 제법 좋은 파트너였고, 벨로 키타나는 자신에게 관심 없는 계약자에게 꽤 정이 들었다.
한동안 마검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 세상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고, 어쩌면 은근슬쩍 가문의 수호령비슷한 것으로 눌러앉을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도 인간을 닮아 가는 걸지도.’
벨로키타나는 지나치게 인간을 을닮아 타락한 뱀을 떠올렸다.
인간을 증오하다 미쳐 버린 뱀은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성질 급한 나비들이 어떻게든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몸부 림친다면, 그 뱀은 광적으로 이 세계에 집착했다.
'그 뱀은 아마 자기 이름도 잊어버렸을걸.'
저 미친 뱀이 원하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계약자를 되살려 내는 것.
‘엘레노어 칼라일..'
그리고 공교롭게도, 레녹스 칼라 일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악령의 계약자였다.
물론 그 여자가 갓 죽었던 수백년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눈앞에 방법이 있는 한 절대 단념하지 않겠지.)
이전 생에서, 젊은 칼라일 공작에게 붙잡혀 온 직후. 뱀은 단번에 그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뱀은 제 뜻대로 그를 휘두르기 위해 레녹스 칼라일에게서가장 소중한 존재를 죽였다.
'그래야 저 녀석이 문을 열어 시간을 되돌릴 테니까.'
죽은 연인을 되살리기 위해서.
뱀은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희망 만으로 레녹스 칼라일을 자신과 똑같은 쌍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뱀이 원하는 대로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가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희생과 제물이 필요했는 데, 그건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떻게든 막고 싶었는데……….)
인과율이 손상된 틈을 타서, 벨로 키타나는 어떻게든 해 보려고 나름 애썼다.
비록 그 뱀이 걸어 둔 ‘언령’의 제약으로 인해 무엇 하나 똑바로 말로 전하기도 어려웠지만.
벨로키타나가 한낱 인간의 일에 개입하려고 애쓴 것은 방관을 즐기는 시간의 수문장답지 않은 처사였다.
그는 뱀의 눈을 피해 어떻게든 기억을 일깨워 주려고도 해 보고, 열쇠를 쥔 인간 여자에게 경고도 해 봤다.
둘 중 누구라도 진실을 깨닫는다면 저 미친 뱀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벨로키타나는 우울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기기기.
육중한 석조 문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리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껏 노력한 결과가 이거라니.)
벨로키타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뱀의 요구대로 먼 과거로 로돌아가려면 보다 더 큰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더 큰 고통'이란 당연히 그의 계약자인 레녹스 칼라일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결코 모든 것을 깨끗이 되돌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깨진 잔에 실금이 남,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다.
'저 녀석의 영혼이 몇 번의 회귀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벨로키타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성을 상실한 뱀은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두 사람을 쫓아다니며 결코 이 미친 짓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금도 줄리엣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면 그의 계약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또다시 시간을 되돌릴 것이다.
그러면 다시 원점.
'어떻게 해야 이 굴레를 끊을 수 있을까?'
결국 벨로키타나는 이번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검은 표범은 무력한 눈으로 미세하게 열리기 시작하는 시간의 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줄리엣이 나비들의 필사적인 암시를 알아들은 것은 그것이 그녀가 항상 궁금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과거로 돌아온 걸까?
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을까?
줄리엣은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단순히 행운에 감사하는 대신 줄곧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검은 표범이 시간을 거스르는 힘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내가 죽고 나서, 레녹스를 부추겨서 과거로 돌아오게 했어?”
“생각보다 제법 영리하구나, 인간.”
뱀이 생각보다 순순히 긍정했다.
"눈치챌 줄은 몰랐는데. 그건 칭찬해 주지."
줄리엣은 답에 근접했다.
줄리엣 모나드는 뱀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을 잘 짜여진 판으로 끌어내, 뜻대로 조종하기 위한 미끼.
뱀이 진정으로 노렸던 것은 레녹스 칼라일의 검이었다.
오래전, 뱀이 엘레노어의 핏줄들에게 저주를 내린 이후로 뱀은 북부의 인간들과 탈출했다가 붙잡혀오는 지겨운 술래잡기를 반복했었다.
그러기를 수백 년.
-빌어먹을 저주를 풀어.
뱀은 단번에 자신을 붙잡아온 새파랗게 젊은 칼라일이 마검의 소유주임을 알아보았다.
시시한 아티팩트와는 급이 달랐다. 마검에 갇혀 있는 것은 시간을 관장하는 나태한 왕이었다.
그 대단한 시간의 왕도 역시 아티팩트에 종속된 가련한 악령에 불과했다.
계약자가 합당한 대가를 바치면 꼼짝없이 문을 열어 줘야 하는 신세.
레녹스 칼라일은 아이를 가진 여자를 살리기 위해 당장 저주를 풀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뱀은 해묵은 저주로 칼라일을 괴롭히는 일 따위에는 흥미를 잃었다.
'저것만 있으면 엘레노어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수백 년 만에 목표를 발견한 뱀은 희열에 차 계략을 꾸몄다.
물론 새파랗게 젊은 칼라일이란 인간 녀석이 만만치 않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인 줄리엣 모나드는 속이기 쉬운 먹잇감이었으니까.
결국 뱀은 가련한 인간 여자를 꾀어 젊은 칼라일 공작의 눈앞에서 죽였다.
그가 악령의 힘을 빌어, 강제로 시간을 되돌리도록.
물론 뱀의 계획에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다.
이전 생의 레녹스 칼라일이 계획대로 시간을 되돌리긴 했는데, 고작 1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는 데에 불과했던 것이다.
수백 년 전 인물인 엘레노어를 되살리려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뱀은 그 정도 사소한 오차쯤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령이 발휘하는 힘은 계약자가 대가로 바치는 고통과 희생의 크기에 비례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좀 더 큰 대가와 희생을 제물로 바치면 되는 게 아닌가?
어차피 레녹스 칼라일의 유일한 약점인 인간 여자는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만에 하나 이번에도 실패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내 속셈을 눈치챘다고 한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림같이 웃던 뱀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칼라일 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기라도 할 건가?"
창백하게 질린 줄리엣은 입술을 깨물며 뒷걸음질 쳤지만 금방 차가운 기둥에 등이 닿았다.
“이번에도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성큼성큼 다가온 뱀은 줄리엣의 멱살을 거칠게 낚아챘다.
“약해 빠진 인간 주제에.”
화륵.
줄리엣은 흡사 보랏빛 불길이 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널 어떻게 할지 가르쳐 줄까?”
뱀은 잘생긴 얼굴로 씩 웃었다.
“처음엔 그 레녹스 칼라일 앞에서 널 산 채로 죽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빠른 죽음은 너무 자비롭잖아. 안 그래?"
문득 줄리엣은 석궁으로 그의 뺨을 긁어 놨을 때, 뱀이 불처럼 화를 내던 게 기억났다. '엘레노어가 좋아하는 얼굴인데!'라고 했던가.
하지만 저 얼굴 역시 어떤 인간을 잡아먹고 훔친 껍데기가 분명했다.
줄리엣은 저 뱀이 엘레노어 칼라 일이 사랑했던 누군가를 잡아먹고 그 외양을 훔친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맞아, 나는 널 당장 죽이지 않을 거야. 네 덕분에 재밌는 생각이 났거든.”
이죽거리는 뱀의 보랏빛 눈이 광기로 일렁였다.
“레녹스 칼라일이 미쳐 버린 널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줄리엣의 시선은 자신의 목을 잡고 위협하는 뱀에게서 조금 빗겨나 있었다.
반짝반짝.
그녀는 눈가를 조금 찌푸린 채, 뱀의 어깨 너머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직도 바닥에서 가련하게 파닥거리는 나비들을.
'필드의 권능이라고 말했어.'
빛을 거의 다 잃어서, 이제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지만, 검은 표범이 말하기를, 그녀의 나비들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대단한 나비들을 속여서,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 ‘문 너머에 가둬 버린 퀴리에 모나드의 이야기.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줄리엣은 엉뚱하게도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생각에 잠긴 줄리엣의 표정을 공포로 해석한 것인지, 뱀이 킥킥거렸다.
"너는 곱게는 못 죽어. 그동안 애먹인 게 괘씸해서라도."
줄리엣을 바닥에 던지듯 놓아준 뱀은 허리를 굽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나비들을 움켜쥐었다.
나비들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어떻게든 뱀의 손을 피해 도망치려 애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바닥에 떨어진 나비들은 필사적으로 부러진 날개를 퍼덕이며 숨을 곳을 찾는 것처럼 줄리엣의 손안으로 간신히 날아들었다.
뱀은 나비를 움켜쥔 다음 명령했다.
“열어."
그러자 눈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