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쾅.
어쩌면 다시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그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는 줄리엣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숨이 가빠눈을 감거나 숨을 고를 때마다 죄책감이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그러다, 그는 문득 살아 움직이는 줄리엣이 어떻게 웃었는지 금방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칫했다.
줄리엣은 명랑하게 웃기는커녕 소리 내어 우는 일조차 좀처럼 드물었다.
그런 여자에게 자신이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줄리엣이 거짓으로 그를 속이고 달아났을 때. 그리고 그런 그녀를 끈질기게 뒤쫓아 마침내 재회했을 때.
-그렇게 애를 가지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심장을 난도질당한 배신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자신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는 모진 말을 내뱉었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멀고 낯선 험지에서 겨우 붙잡은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진심 대신에 입밖으로 나온 것은 잔인한 비아냥이었다.
- 애원하면 하나쯤 만들어줬을 수도 있잖아. 아, 하긴. 원했던게 내 애가 아니었나?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줄리엣은 그때조차 메마른 눈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왜 또 그렇게, 못된 말만 골라서 해…….
원망을 말하기에는 너무 지쳤다는 듯 맥없이 고개를 떨구는 줄리엣의 눈매가 망막에 새겨졌다.
그날 이후로도 그는 오래오래 그 장면을 되새겼다. 그깟 알량한 자존심으로 애써 무시하며 지나쳤던 기시감이 대체 무엇인지 이따금씩 고민했다. 대체 뭘 영영 놓치고 있었는지.
오랜 세월에 걸쳐 줄리엣 모나 드를 서서히 말라 죽이고, 소리 내어 울 줄도 모르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건 줄리엣이 돌아온 뒤로도 도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작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줄리엣이 또다시 달아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을 뿐.
그는 용서를 구하거나 발치에 에무릎을 꿇고 애정을 구걸하는 대신 아쉬울 것 없다는 듯, 태연을 가장해 그녀를 제 옆에 붙잡아놓을 궁리만을 했다.
동정이어도 좋고 계약이어도 좋았다.
뱀이 본색을 드러낸 다음에도 그는 이따금씩 줄리엣을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끝까지, 제 욕심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서.
캉!
검이 빗맞자 불꽃이 튀는 것과 동시에 돌조각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주군!”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그의 눈바로 아래를 스치고 생채기를 냈다.
결국 보다 못한 밀란이 달려와 공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미친 짓입니다!"
“비켜.”
레녹스는 헐거워진 붕대를 다시 단단히 묶으며 검을 쥐었다.
어쩌면, 다시는 줄리엣에게 용서를 구하고 애정을 구걸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급함이 레녹스 칼라일의 눈을 가리고 이성을 좀먹었다.
“안 됩니다.”
밀란은 결연하게 공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칼라일 공작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주군……!”
그때였다.
철썩.
막 도착한 마차에서 내려 성큼 성큼 다가온 한 사람이 대뜸 공작의 뺨을 후려쳤다.
“이런 한심한 놈.”
감히 북부의 공작을 맨손으로 팰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 어르신!”
하지만 소드 스틱을 짚은 채 나타난 노인은 지금 이 상황에 분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리오넬 르바탄이 호통을 쳤다.
“이 무슨 한심한 꼴이냐!”
"......."
“차마 눈 뜨고 못 봐주겠구나.
썩 꺼져!”
살벌한 광경에 공작가의 기사들은 그만 얼어붙었다.
그러나 정작 얻어맞은 칼라일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쯧.”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고 돌아서려던 리오넬 르바탄의 등 뒤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 탓입니다.”
“무슨 소리냐, 그게.”
레녹스 칼라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히 고했다.
“제가, 줄리엣을 혼자 남겨뒀습니다.”
"허, 그래서?”
“줄리엣이 위험해진 건 전부 제 불찰”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그러니까 네놈 말은 내 하나뿐인 손녀가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백치다 이거냐?”
리오넬 르바탄은 조금 전 못지 않게 무섭게 화를 냈다.
“그러니 나더러 네가 무식하게 날뛰는 꼴을 구경이나 하다가 송장이나 치워라, 이 뜻이렷다?”
"아닙니다.”
“그럼 네놈이야말로 걸리적거리지 말고 썩 물러나!"
"네놈의 목숨이나 사죄 따위 나한테는 아무 가치도 없다. 송장치르고 싶으면 다른 자리 알아봐!"
매섭게 쏘아붙인 리오넬 르바탄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매정하게 돌아서 버렸다.
"이봐, 마법사!”
"......예? 예!”
리오넬 르바탄은 홀로 오지 않았다.
그의 뒤로 이상하게 생긴 짐마차와 더 이상한 차림새의 인간들이 눈치를 살피면서 서있었다.
마차에서 우르르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급히 굽신거렸다.
흰 로브를 걸친 그들은 동부 마탑 엘라임의 마법사들이었다.
“그간 내 돈을 그렇게 먹었으면 이제 투자한 값을 좀 해야지?"
"무, 물론입니다. 어르신!"
리오넬 르바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셀리드를 필두로 마법사들은 바로 마차에서 이상하게 생긴 도구들을 꼬집어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오넬 르바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칼라일 공작을 못마땅하게 힐끔거리곤 혀를 찼다.
“뭣들 하나? 이놈 치우지 않 않고!”
"아…… 예.”
리오넬 르바탄의 불호령이 자신들을 향하자 공작가의 기사들이 움찔했다.
“가시죠, 전하.”
가신들의 염려와는 달리, 레녹스는 뜻밖에 눈치를 보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뒤따라 온 하딘이 깨끗한 수건을 건네자 칼라일 공작은 말없이 받아들고 막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마조마해 하던 공작가의 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심 리오넬 르바탄에게 감사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막사로 다가가던 레녹스 칼라일이 순간 휘청하는가 싶더니, 검에 의지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군!”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여기까진가.’
커다란 검은 표범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검은 표범은 담담히 눈을 깜빡였다.
인간들은 며칠째 무너진 바위를 쪼개고 조금씩 산을 깎아내고 있었지만 분주히 움직이는 인간들 중 검은 표범의 존재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자리에 악령을 맨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단둘뿐이었는데-.
검은 표범은 자신의 계약자를 힐끗거렸다.
하나는 산 채로 땅 아래에 파묻혔고, 다른 하나는 연인을 산 채로 파묻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틀렸나.)
검은 표범은 깊이 한숨지었다.
그의 이름은 벨로키타나.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관찰자이자 나태한 왕.
그리고 시간의 수문장의 이름이었다.
벨로키타나는 드물게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은 이계의 신이었다.
스스로가 신이었을 때의 기억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자신이 왕 노릇을 하던 차원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시간의 성질 때문인지, 그는 악령답지 않게 대단히 느긋하고 너 그러웠다.
벨로키타나는 드물게 이성적인 악령이었다.
덕분에 포악해지고 굶주린 다른 악령들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강대한 힘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인간이건 악령이건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 능력을 빼앗는 뱀도 벨로키타나를 넘보진 못했다.
공간을 넘나들며 차원을 휘젓고 다니던 탐식의 나비들과 게으른 벨로키타나는 여러모로 상극이었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굶주린 나비들이 먹잇감을 찾아 수시로 필드(field)의 문을 열듯이, 벨로키타나 역시 그만이 열수 있는 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벨로키타나는 힐끔 뒤를 곁눈질했다.
고풍스러운 석조 기둥을 가진 거대한 문이 서 있었다.
하지만 저 문은 검은 표범이 그러하듯이, 다른 인간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그의 문은 매우 무겁고 거대해서, 아주아주 무거운 대가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열리는 법이 없었다.
(뭐, 이대로라면 다시 열리는 것도 시간문제 같지만.)
벨로키타나는 입맛을 다셨다.
안
저것은 본래 열려서는 안 되는 문이었다. 한 번 열리는 것만으로도 인과율을 거세게 뒤틀어 버린다.
하지만 먼 과거에, 그의 계약자는 이미 한 번 저 문을 열었다.
'정작 본인은 기억도 못하는 과거라는 게 문제지만….….'
줄리엣의 나비들이 '문'을 열기 위해 그녀의 기억과 마력을 조금씩 갉아먹듯이, 벨로키타나 역시 저 문을 열기 위해서는 계약자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저 녀석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 줄리엣 모나드가 죽기 전까지는.'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