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95화 (192/229)

195화.

줄리엣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비들은 그녀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뱀이 눈치 채지 못하게 줄리엣 가까이로 다가오려고 애썼다.

(목적. 아냐. 수단.)

(건방진, 인간. 남자. 칼라일.)

(계약자만, 힘. 빌려.)

(그래서. 뱀. 억지로 …….)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나비들은 분명히 뱀의 감시를 피해서 그녀에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고 있었다.

문제는, 줄리엣이 다급한 단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거지만, 줄리엣은 애가 탔지만 더듬거리는 나비들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가느다란 데다가 말을 할수록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았다.

안그래도 희미한 푸른 빛을 점점 잃어갔다.

검은 표범이 그녀에게 뭔가 직접적으로 알려주려 할 때마다 금빛 사슬의 제약을 받았던 것처럼.

나비들이 답답하다는 듯 파닥거리며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계약자. 칼라일. 검. 주인.)

(검은, 짐승.)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듯, 파닥이며 나비 한 마리가 조금 날았다.

뱀의 눈을 피해 살그머니 손안으로 날아든 나비를 감싼 줄리엣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이미지에 흠칫 놀랐다.

필사적으로 날아 들어온 나비 한 마리가 그녀에게 억지로 환시를 걸고 있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지.”

'어?’ 줄리엣은 멈칫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전달한 것 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기억이었다.

"너 같은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못할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잔뜩 으스대는 검은 표범 악령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걸 왜………?

'아.’

의아해하던 줄리엣은 불현듯 어떤 사실을 직감했다.

다 죽어 가며 반짝이는 그녀의 나비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알려 주고 싶어 했던 메시지.

검은 표범은 몇 번이고 그녀에게 대놓고 자랑했었다.

하지만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줄리엣은 단 한 번도 그 수다스럽고 의뭉스러운 악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표범 역시 아티팩트에 종속된 악령이다. 뭔가 능력을 숨기고 있고, 그건 아마 계약자인 레녹스의 요구에 의해서만 발현 될 수 있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

조각조각 머릿속에 떠다니던 단어와 정황들이 하나로 꿰어 맞춰졌다. 흩어진 구슬들을 하나로 꿰듯이.

줄리엣은 뱀이 줄리엣과 여러번 마주치고도 그녀를 오랫동안 살려두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체스판 위의 말이었다.

목적을 위해서, 레녹스 칼라일을 뜻대로 움직이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란 건 필시 레녹스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계약한 악령에게 어떤 능력을 요구한다든지……….

“아, 알았다.”

"......?"

서성이던 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뭘 알아?”

줄리엣은 뱀의 사나운 보랏빛 시선을 차분히 마주했다.

“네 소행이었어.”

"뭐?"

“내 잔에 독을 탔던 거, 네 짓이지?”

뱀은 대답대신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악령은 거짓말을 못하니까. 부정도 긍정도 아닌 침묵으로도 줄리엣에게는 충분한 답이 되었다.

이전 생에서 줄리엣은 독이 든 잔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그것이 레녹스 칼라일의 비정한 이별인사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술잔에 독을 넣은 것조차 저 뱀의 짓이었다니.

심장 언저리가 싸늘해졌다.

“.….… 그렇구나. 그것조차 네 짓이었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줄리엣은 은잔에 독이 든 것을 알고도 죽음을 선택했다. 그게 잔인한 연인이 자신에게 건네는 인사라면, 더는 그에게 기대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고서.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였다고 믿었던 죽음까지도 저 뱀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

속에서 왈칵 감정이 치솟는 것과는 반대로 줄리엣의 머리는 차가워졌다.

줄리엣은 싸늘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무서워?”

“……뭐?”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뱀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내가 너 따위 인간 계집을 무서워한다고? 하하!”

“그렇지 않으면 날 오랫동안 쫓아다니며 감사할 이유가 없잖아?”

"어디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미천한 인간 따위가……"

뱀의 신경질적인 웃음이 뚝 끊겼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눈이 번뜩였다.

줄리엣의 눈매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 나붓이 접혔다.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이번엔 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이 없는데.”

명백한 조롱에 뱀은 발끈했다.

“하, 네가 무슨 수로? 여긴 잘난 성유물도 알량한 석궁도 없는데?”

빈정거리면서 다가온 뱀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

었다.

“혹시나 말해 두지만 이번에는 그 잘난 칼라일 놈도 널 못 구하러 와. 넌 여기서 혼자라고."

뱀이 이죽거렸지만 줄리엣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줄리엣은 어떤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왜 나는 과거로 돌아왔을까?

답은 처음부터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다.

"너, 내가 필요하잖아.”

줄리엣은 보랏빛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래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날 그렇게 집요하게 죽이려 들었던 거지?”

물론 아직은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뱀의 표정이 빠르게 굳는 것을 보고 정답에 근접했다고 확신했다.

뱀은 그녀를 단순히 증오한 게 아니라, 죽여야 했던 것이다.

"내가 죽어줘야 레녹스가 네 계획대로 시간을 되돌릴 테니까.

안 그래?”

줄리엣은 일부러 활짝 웃었다.

* * *

구조 작업은 속도가 더뎠다.

눈은 그쳤지만 막막할 정도로 거대한 바위를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기술자들은 공작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바위의 약한 부분을 계산한 다음 특정 부분에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가해 잘게 쪼갠 다음 무너뜨리는 것이다.

쾅!

“이런, 젠장!”

“조심해!”

문제는 엘파사는 지반이 단단했고, 무너져 내린 바위들은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숙련된 석공들과 기술자들이 매달렸지만 일꾼들이 지치고 도구가 망가지는 속도에 비해 작업속도가 느렸던 것이다.

“다시 해 봅시다.”

“이런 식으론 안 됩니다. 차라리 아까 도구를 다시 쓰는 게-"

기술자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한 남자가 성큼성큼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쾅.

후두둑.

기술자들이 몇 번이고 깨뜨리는데 실패했던 거대한 바위가 검으로 내리치는 것만으로 조각나 부서졌다.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쥔 칼라일 공작은 뺨을 훔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음.”

"에?”

"다음은.”

"아…… 예! 저, 저겁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기술자들이 황급히 잔해를 치우고 다음 목표지점을 가리켰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산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막막할 만큼 거대한 바위를 부수고도 칠흑의 검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저게 그 소문의 마검인가.”

“소드마스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오러로 저런 것도 가능하군요.

몰랐습니다.”

외부에서 데려온 기술자들과 일꾼들은 감탄했다.

하지만 칼라일 공작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가신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쟁쟁한 공작가의 기사들 중에는 소드마스터가 몇 더 있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공작이 하는 짓은 흉내도 내지 못했다.

".…… 말려야 합니다.”

뒤에 선 공작가의 기사들이 조용히 의견을 교환했다.

“저대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말린다고 귀담아들으실 분입니까?"

벌써 나흘째.

먹지도 쉬지도 않고 레녹스는 몸을 혹사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공작이 붕대를 감은 손을 쥐었다 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티팩트인 칠흑의 검은 충격을 버텨낼지 모르지만 인간의 몸으로 누적되는 피로와 충격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레녹스는 자신의 상태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잠시라도 몸을 혹사하지 않으면 끔찍한 악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싸늘한 주검으로 그의 품에 안긴 줄리엣이.

악몽에 질식해버리기 전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편이 나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있어.'

살아있다고 믿어야 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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