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어떻게,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들은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폐광의 천장 전체가 내려앉은 붕괴 사고의 규모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피해가 없었다.
당연하다. 실종자는 촌장의 모친이라는 노파와 모나드 백작, 단둘뿐이었으니까.
"백작님께서 저희 아이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저,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들은 줄리엣이 서둘러 먼저 위쪽으로 내보낸 사람들이었다.
“…… 광산이 무너질 때 이들도 줄리엣 아가씨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처음으로 칼라일 공작의 고개가 움직였다.
레녹스가 줄곧 입을 열지 않은 것은 넋이 나가서도 충격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섬뜩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천장이 무너져서, 아가씨가, 사고를.
귓가에 웅웅거리는 단어들. 그가 이곳에 와서 들은 것은 무가치한 이야기 뿐이었다.
레녹스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죽음에 익숙했다. 칼라일공작으로서 평생을 암투 속에서 살았고, 부모를 잃자마자 결코 살아나올 수 없는 마굴로 처넣어졌다.
하지만 그가 익숙한 것은 자신 또는 그 자신이 죽일 누군가의 죽음이었지, 어떻게 해서든 제 곁에 붙잡아놓고자 했던 연인의 의죽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가 어쨌다고?'
그가 알아들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줄리엣.
그의 시선이 침통한 표정의 마을 사람들을 향했다.
“줄리엣과 함께 있었다고."
“예.”
레녹스에게는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게 느껴졌다.
갱도가 무너져서 줄리엣은 땅밑에 갇히고, 저들은 멀쩡히 살아 나왔다.
줄리엣이 정말로 저 지하에 갇혀버렸다면.
“그럼 저것들은 왜 살아 있지?”
“....…주군!”
바로 옆에 서 있던 밀란은 본능적으로 공작과 마을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밀란은 아차 싶었다. 연인을 잃은 남자 앞에 그녀 대신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건 결코 현명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선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지금의 칼라일 공작은 칼날 위를 걷는 인간처럼 위태했다. 이 성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었다.
“줄리엣 아가씨가 저 아래에 갇혀 계십니다!”
멈칫.
밀란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줄리엣의 이름이 나오자 공작이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잠시 호흡을 멈췄던 칼라일 공작의 붉은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뜨였다.
“우선 아가씨를 구하는 게.”
“얼마나 걸리나.”
“전하."
“지반이 많이 불안한 상태라 뭐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작업을 선불리 서두르다간 자칫 추가 붕괴가.”
“얼마나 걸리느냐 물었다.”
"최소 열흘은 걸릴 겁니다.”
“그럼 그보다는 덜 걸리겠군.”
“예?”
침착하게 미친 소리를 하는 공작을 보고 기사들은 아무도 만류할 수 없었다.
“파성추를 쓰듯 붕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그 말씀이 맞긴 합니다 .
만…….”
기술자들은 당황하면서도 직관적인 공작의 명을 이해했다. 공성전에서 방벽을 무너뜨릴 때처럼 입구를 무너뜨릴 지점을 계산하라는 뜻이었다.
“해 보지요.”
지난한 작업이 될 터였다.
“밀란 경.”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이 밀란을 뒤에서 불렀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엘리엇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전하께서 …….”
누가 봐도 칼라일 공작은 정상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줄리엣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누구도 감히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밀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기도나 하게."
아무리 그녀가 불가해한 존재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해도.
설령 기적적으로 줄리엣이 사고에 휘말려 죽지 않았다고 한들, 과연 물도 식량도 없이 얼마를 버틸 수 있을까?
* * *
'아파.’
줄리엣은 끔찍한 통증을 느끼고 깨어났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다시 기절할 뻔했다.
“흐읏.”
아무래도 늑골이 부러진 것 같았다.
'살아 있어?’
최소한 고통이 느껴진단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줄리엣은 간신히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이상하다.
물론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게 가장 이상했지만, 그 외에도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 갱도가 무너지면서 폐광안에 갇혔을 텐데.
갑갑하다거나 흙더미 아래에 생매장되었다거나 하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눈을 뜨고 겨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은 높은 천장과…….
“깨어났군.”
반짝이는 금발과 청보랏빛 눈.
“너도 어지간히 목숨이 질긴 계집이구나.”
매끈한 제르망 백작의 얼굴을 한 뱀이었다.
아, 그랬지.
줄리엣은 사고에 휘말리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분명, 산사태에 휘말려서 …….’
노파로 변장했던 저 뱀이 그녀를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다.
"너….”
"그래. 이번엔 구면이지, 우리?"
뻔뻔하게도, 뱀은 이죽거리며 줄리엣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다 돌기둥 쪽으로 밀었다.
“흐윽.”
“얌전히 닥치고 있어 봐. 지금부터 널 어떻게 죽일지 생각을 좀 해야겠으니까.”
그러더니 뱀은 정말로 사색하는 것처럼 텅 빈 공간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바로 앉은 줄리엣은 아치형의 기둥과 높은 천장을 볼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폐광 지하에 이런 거대한 석실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꼭 관이 놓일 법한 높은 제단과 …….
'……왜 보이지?'
몸은 아팠지만 줄리엣의 이성은 멀쩡했다.
갱도가 무너져 지하에 갇혔으니 빛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줄리엣은 깜짝 놀랐다.
빛이 있잖아?
게다가 희미한 광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녀의 나비들이었다.
정확히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것처럼 널브러진 나비들.
한때 밝은 빛을 뿌리며 날아다다.
녔던 나비들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채 간신히 희미하게 날개를 접었다 펴며 빛을 내고 있었다.
“나비야?”
반가웠던 것도 잠시.
줄리엣은 나비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비들은 너덜거리고 상처 입은 날개를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며, 어떻게든 줄리엣에게 다가오려 애썼다.
(.......)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같았지만 너무 작고 희미한 소리라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 망할 칼라일 새끼가."
그러는 와중에 초조하게 중얼거리며 석실을 거니는 뱀도 정상은 아니고,
'결계를 깨고 도망친 부작용인가.’
줄리엣이 석궁을 쏴서 남긴 오른뺨의 상처 자국도 그대로였고, 중얼거리는 뱀은 어딘지 정신이 불안해보였다.
물론 미쳤다고는 했지만….….
줄리엣은 뱀을 노려보는 한편 자신이 처한 상황을 찬찬히 곱씹었다.
……비록 뼈가 부러지고, 수십미터 아래 지하에 위험천만한 악령들과 갇혀 있는 처지지만 어쨌든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하지만 지금 줄리엣에게는 저 뱀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
수중에 있는 건 가보인 열쇠와 힘을 빼앗기고 반쯤 죽어가는 나비들이 전부.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러다 문득 줄리엣은 아주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다.
'왜 그냥 죽이지 않지?'
이번 생에 줄리엣은 저 뱀과 여러 번 마주쳤었다.
대신전에서, 그리고 동부의 경매장에서.
아주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저 뱀은 마음먹기만 한다면 줄리엣을 가볍게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뱀은 그녀를 번번이 살려두었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 더, 아냐, 지금은…….”
초조한 듯 서성이는 뱀은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기다리다니, 무엇을?'
그러고 보니 저 뱀이 그녀를 죽이려 들었을 때는 항상 레녹스가 근처에 있었을 때뿐이었던가?
"인간을 증오하다가 미쳐 버린 거야.”
검은 표범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지를 상실해서 미쳐 버렸다 하더라도 저 뱀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최소한 줄리엣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저 뱀이 공작가를 집요하게 미워하고, 레녹스 칼라일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위협하는 것은 분명 원하는 게 있어서일 거라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증오하다 못해 미쳐 버린 악령의 목적이라. 꿍꿍이가 뭘까?
'생각을 하자, 생각을.'
파드득.
간신히 숨만 붙은 채 바닥에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던 나비 한 마리가 줄리엣의 손등 위로 파닥거리며 날아들었다.
(목적. 아니야.)
"......?"
(그 여자. 엘레노어. 목적.)
(죽었어. 뱀. 화났어.)
(뱀.)
'뭐라고?'
(옛날. 뱀. 눈치 챘어.)
(칼라일. 인간 남자. 검. 가졌어.)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