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92화 (189/229)

192화.

줄리엣은 조금 뜯어먹던 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저희는 이게 웬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저희는 공작가를 섬겼는데, 갑자기 황실에서 사파이어를 거둬 간다니요?"

짚이는 데가 있는 줄리엣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건 몇 개월 전, 칼라일 공작이 그녀를 양녀로 들이는 조건으로 황실에 사파이어 광산을 넘기면서 시작된 일이 분명했다.

물론 엘파사는 엄연한 북부의 영지였으므로 땅을 넘기는 것은 아니고, 보통 몇십 년간의 채굴권은 종종 거래되고는 했다.

'미치겠네.’

물론 양녀 이야기는 줄리엣 본인이 질겁하면서 거절하는 바람에 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사파이어 광산 건은 그냥 황실에 가지라고 했었다.

어차피 엘파사 광산은 공작가에 별로 중요한 수입원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왜 그랬지……….’

이제 와서 후회막심이었다.

물론 줄리엣의 의지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와 관련 있는 일로 피해를 본 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애꿎은 마을 주민들만 신나게 쥐어 짜이는 모양이었다.

“황실에서 요구하는 채굴량이 터무니없이 많아서 .…”

"통상적으로 공작가에서 작업하던 양의 서너 배는 됩니다!"

“무리해서라도 작업량을 맞추라는 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우는 소리를 하자 다른 광부들도 기다렸다는 듯 앞다.

투어 푸념을 쏟아 놨다.

그들의 신세 한탄을 듣고 있자니 줄리엣은 양심이 아파 왔다.

“…어떻게든 도울 방도를 찾아볼게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마을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감격했지만 줄리엣은 괜히 속이 쓰리고 미안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황실에 넘어가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줄리엣은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저, 광산 얘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만.”

또?

“실은 얼마 전부터 사파이어 광산에 이상한 일이 생겨서요.”

"예. 줄곧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일꾼들이 겁을 먹고 일하기를 거부하고 있답니다.”

이상한 소리?

"아니, 이 사람아!"

영주 대리인 엘파사 행정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백작님이 그렇게 한가하신 분인 줄 아는가!"

마을 사람들의 용건은 대략 이랬다.

얼마 전부터 폐광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거길 한번만 조사해 주면 안 되겠느냐?

“영주관에서 조사대를 보내면 되잖아요?"

"보내 봤지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데도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작업을 못하겠다고, 툭하면 영주관으로 달려오질 뭡니까."

아하.

줄리엣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푸념하는 엘파사 행정관조차도 은근히 줄리엣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백작님께서 한번 둘러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마을 사람들한테 말씀해 주시면…….”

'높으신 분'의 확인이 있으면 일꾼들도 더 이상 작업을 못하겠다고 뻗대지 못할 거란 이야기였다.

공작가의 기사들이 끼어들었다.

“위험한 거 아닙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그 폐광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말라 있어서요! 문제는 그 광산과 연결된 다른 작업장들에서도 소리가 들린다고 작업을 못하겠다.

고 난리니, 원…….”

“그러니 백작님께서 보시고 아무것도 없다고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줄리엣은 난처해서 턱을 괴었다.

그때였다.

"안 돼! 외부인을 들이면 뱀 님이 노하신다!”

“아이고, 어머니! 여긴 또 어떻게 쫓아오셨어요!”

촌장자코보가 화들짝 놀라 일어서서 노파를 만류했다.

“뱀 얘기는 뭐죠?"

“그냥 오래된 마을 전설입니다.

뭐 옛날 산속에 뱀이 숨어 살았더라는 그런 얘기죠."

줄리엣은 촌장에게 붙들려 영주관 밖으로 끌려나가는 노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파 뿐 아니라 아예 온 마을 사람들이 영주관으로 몰려온 것 같았다.

줄리엣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자신을 간절히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양심이 아팠다.

".…그 폐광이 어디죠?"

결국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자코보의 안내로 폐광을 향해 떠났다.

광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뜻밖에도 광산 입구에서 가로막혔다.

“저, 백작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광산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마을 청년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뭐지요?"

“마수를 데리고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꾸륵?”

그때까지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오닉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기 얘기라는 걸 알아듣기라도한 것처럼.

“왜요?”

“그게 규칙입니다. 광산에 마수가 들어오면 큰 사고가 나기 마련이라서요.”

그러자 줄리엣의 호위로 따라온 주드가 웃긴다는 듯 킬킬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니 그거야 광산에 마수가 침입했을 경우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오? 이 고양이 새끼 같은 건 딱 봐도 아무것도 못하게 생긴-."

"미야옹.”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귀를 의심했다.

“야옹!”

"토, 통과.”

문지기 청년이 홀린 듯 중얼거리자 옆의 사람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통과는 무슨 통과! 정신 차리게, 이 사람아!”

“?”

닉스는 열심히 야옹거려 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어설픈 애교에 속지 않았다. 편들어 주던 주드마저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백작님. 규정이 그러하니 따라 주시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줄리엣은 조금 부끄러워서, 후다 닥 닉스를 다른 기사에게 넘겨주었다.

“착하지, 닉스? 잠깐만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랑 기다려."

“꾸륵?”

닉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금방 보고 올게. 알겠지?"

줄리엣은 입구의 다른 기사들에게 닉스를 부탁하고는 폐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광산의 구조는 줄리엣이 상상하던 것과는 꽤 달랐다.

좁고, 깜깜하고, 깊은 갱도를 생각했는데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중간중간에는 웬만한 저택의 홀을 연상케 할 정도로 탁 트인 공간들도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비탈길을 조금 내려가는 것 같더니, 이내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생각보다 넓네요?"

"예, 이런 방들이 잔뜩 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갈수록 다른 갱도와 연결되고요.”

과연 그 말대로였다. 그들은 중간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는 다른 광부들과 마주쳤다. 심지어 그들의 가족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나 젊은 부인들도 있었다.

“오래된 광산일수록 이렇습니다.”

램프를 들고 앞장서는 촌장 자코보는 폐광 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 사파이어 광산은 족히 수백년은 됐을 겁니다. 엘파사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이었지요."

"아, 그렇지.”

주드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 줄리 엣에게 소곤거렸다.

“아까 저 노파가 그러던데. 그분도 여기 엘파사 출신이셨답니다.”

“그분이 누군데요?"

“초대 칼라일 공작이셨던, 엘레노어 칼라일 님이요.”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지난 며칠간 줄리엣이 공작가에, 존재하는 초대 가주에 대한 자료란 자료는 모두 긁어모았기 때문에, 기사들 역시 '엘레노어 칼라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칼론이 아니라요?"

칼론은 칼라일 성이 있는, 북부의 심장부였다.

대부분의 칼라일 가문 사람들은 공작성이 세워진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긴, 수백 년 전에는 공작성이 없었겠구나.'

“쉿.”

앞서가던 주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 소립니까?”

"예!"

일행은 잠시 소리를 죽이고 침묵했다.

캉, 캉, 캉.

과연, 그 말대로 멀리 깊은 곳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다른 작업장의 소리가 넘어오는거 아닙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저희도 확인을 해봤습죠. 작업시간이 아닐 때도 저 소리가 들립니 다요.”

뭔가 금속성의 소리 같았다.

“저쪽인 것 같은데요?"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앞장섰다.

정말 마수가 있는 건 아니겠지.

줄리엣은 램프를 들고 걷다가 바로 옆에 있던 주드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주드, 혹시 엘레노어 칼라일 얘기를 했다는 그 노파가 저 노파예요?”

"아, 예.”

아침에 뱀 이야기를 꺼냈던, 촌장자코보의 모친이라는 노파였다.

노파라고는 했지만 그녀는 허리가 굽은 걸 빼고는 어두운 갱도를 굉장히 수월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노파는 이 마을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 광부라고 했다.

"얼른 돌아보고 나오죠.”

주드가 씩 웃으며 막 앞장서려던 그 찰나였다.

“지진인가?”

“그, 그럴 리가요.”

그러나 또다시 쿠르릉, 하고 저 아래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광부들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땅울림이 심상치 않으니, 일단 나가시는 게.”

와르르.

“으악!”

주드의 머리 위로 자잘한 모래 따위가 떨어졌다.

잠시 동안 램프가 일제히 훅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이, 이쪽입니다!”

광부들이 겁을 먹는 걸 보니 꽤 심각한 상황 같았다.

“일단 나가는 게 좋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우선 아이들이랑 노인부터……."

줄리엣은 무심코 자신의 뒤쪽에서 있던 노파부터 내보내려고 했다.

그녀가 이곳에서는 가장 걸음이 느린 노약자니까.

하지만 램프를 들고 있던 줄리엣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왜, 저 노파만....….’

그림자가 없을까?

줄리엣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낡은 담요를 뒤집어 쓴 조그마한 노파는 어딜 가고, 보랏빛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들켰네?"

“-!"

후두둑.

한 번 더 땅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램프가 다시 깜빡였다.

그 찰나, 어둠 속에서 줄리엣은 발밑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발목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아가씨!”

사방이 흔들리면서 줄리엣은 빠르게 멀어지는 주드의 비명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쿠르르릉.

그러곤 사방이 깜깜해졌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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